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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의 행복 (마 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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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추구하는 것이 많지만 그 궁극적인 추구의 대상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지기 위하여 공부하고,행복해지기 위하여 참 고 일하고,행복해 지기 위하여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욕구의 최대 공약수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리스외 최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행복은 인간 의 최고의 선이다.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목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은 늘 행복을 묻습니다. 그러나 그 답에 있어서 는 형형색색의 행복론이 있습니다. 행복은 덕에 있다고 말합니다.

행복은 쾌락에 있다고 말합니다.최고의 행복은 지식에 있다고 말하 기도 하고 행복은 황금에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파는 행복이 마음의 평정에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행복은 인격의 영속적인 만족에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무수히 말하는 행복론을 찾아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 발견하는 것은 아직도 진정한 행복은 저 멀리 있다는 것이고 이처럼 처절하게 행복을 갈구하며 살아야만 되는 불행한 존재라는 것을 발 견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책중의 가장 많은 제목이 행복하 게 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이것은 행복에 굶주려 있는 상태를 말하 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행복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고,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있어서 첫 설교의 내용입 니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시고 제자들을 선정한 후에 동산에 올라 앉으 셔서 첫번째로 인류에게 선포하신 것이 행복은 무엇이며 그렇게 되 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패턴은 한 자는 복있나니복을 받는다! 는 식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행복에 관하여 관심이 많신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행복의 개 념과는 파격적으로 다른 내용들입니다.

이를테면 마음이 가난해야 되고,애통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힘을 가져야 행복할 것같은 온유해야 된다고 하 는 사실입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요리조리 적응하면서 살아야 할 것같은데 의에 주리고 목이말라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맨 마지막 8번째에 가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행 복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사람들과 신분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 의 자녀요 백성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법으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그 렇기 때문에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정의도 다르고,그것을 찾아 가는 길도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4가지 복에 대하여서는 생각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에 대한 내용을 생각했습니다.

 다시 기억에 되살려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4가지는 모두 내적인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내용은 밖으로 이웃과의 관계 에서 얻는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살 수없는! 그래서 가족이 있고,이웃이 있어서 더불어 살아가야 만 하는 우리들, 그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행복을 찾고 얻으며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4가지 것을 상고하겠습니다.

 1.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복이며 이런 복을 받기 위해서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중의 큰 복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생명으로 살아나고,중생하게 되고,새롭게 되는 배후에는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엡2:4-5에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딛3:5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또한 우리가 매일 하나님앞에 기도하고,교제하는 시간을 가지는 이 유도 그의 긍휼하심을 입기 위한 것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또한 마지막 심판대에 설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여겨주심 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여겨주심이 없다는 우리 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약2:13에서는 이렇게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이 여김을 받는 이 놀라운 축복을 소유하기 위 해서는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럼 상대를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마9:13/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비웃을 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긍휼을 위해서는1)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긍휼은 상대가 불쌍하기 때문에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상대가 죄를 지었고,잘못했기 때문에 용서로 베풀어 주는 것이 긍휼 인 것입니다.

내가 당연히 받아 드릴 수 있고,내가 사랑을 줄만한 대상에게 주는 것을 긍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죄악이 할퀴고 간 깊은 상처를 가지고 괴로워 하는 자들,어렵고 힘 든 자들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긍휼은 자기 자신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면 긍휼을 베풀수가 없습니다.

(예)강도만난 자에게 긍휼을 베푼자는 제사장도,레위족속도 아니 었습니다.체면도 떠나고, 오히려 자신의 돈과 시간을 낭비한 사마리 아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악착같이 손해안보려고 살 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참된 긍휼은 자신을 어느정도 생각지 않아야 가능한 것입니 다.

3)긍휼은 감정이 아니라,행동입니다.

불쌍한 생각이 들고,용서의 감정이 생겼다고 긍휼이 아닙니다.긍휼 은 말도 따뜻하고 눈동자도 부드러운데서 지나서 실재로 무언가 행 동하는 것입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를 데리고 주막으로 가서 치료 하였던 것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약2:13과 그 뒤인 1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긍휼을 말하면서 행함을 말한 것입니다.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 이 긍휼입니다.

 참으로 살면 살수록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긍휼이 더욱 더 필요하고 성도들이 말은 잘 하는데 정말 긍휼을 나타 내야 될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넘어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왜 그렇게 걸려서 넘어지는 지를 모르겠습니다.

(예)하기는 쇼펜하우어는 인간관계를 고슴도치에 비유했습니다.

추운 겨울밤-추위를 잊기 위해 다가섬-서로 찔려서 피를 흘림

-멀리 서 있다가-추우니까 또 달라붙는다-춥지도 아프지도 않는 거 리를 확보한다.

제가 생각할 때는 가운데 끼워넣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한 사람이라도 이것만 스폰지로 두둑 히 껴 놓으면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긍휼로서 옷입고 서로를 대하게 될 때 긍휼을 얻는 복을 얻습니다.

 2.하나님을 보는 복을 위하여 마음이 청결함을 가져야 합니다.

8절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요,이것은 하나님을 깊 히 느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계시로 알게 되고 삶 가운데서 그의 임재와 역사를 느낄 수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축복입니다.

(예)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형을 속인 죄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형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에 그 부분에 대 하여 청결함을 가질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형님을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같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얼굴로 보임을 가지게 되니 얼마나 평안하고 마 음에 축복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뵙게 되는 것은 마음에 청결함을 가져야 이루어지 는 축복입니다.

 (예)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직접 생수의교리를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관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그 교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여인의 부정 함을 지적하십니다.'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남편이 없다고 말하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남 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지금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정욕적인 삶,부정한 삶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이 여인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 게 되는 것입니다.

(예)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대인의 국회의원이었고,종교인중의 종교인이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 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우리가 잘 생각해야 됩니다.

창녀에게,세리에게,무식한 사람에게,더러운 죄인에게 하신 말씀 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층이요,권력층에 있고 삶이 남보기에 반듯하 고 어느정도 진리에 대한 열의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말씀하신 것 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거듭남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됩니다. 내 힘으로 안됩니다. 성령의 씻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씻겨져 중생되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새롭게 태어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하늘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예)어느 신사가 배를 타고서 가다가 사공에게 철학에 대하여 묻 고 파리가 어느 나라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대답을 못하자 당신은 생의 1/4을 허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람이 불어서 배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신사는 수영을 하지 못 하고 허우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사공이 말합니다.당신은 수영을 못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목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게 보이고 지식이 있고,삶이 반듯해 보여도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거듭나서 깨끗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곳에 행복이 있는데 이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 살 때에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본문 마5:9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세상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적어도 이 정도 되 면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가지면서 사는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정과 그런 능력속에 산다면 이것이 축복이 아 니겠습니까 왜 화목케 하는 자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것은 고후5:17-1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 화목케 하는 직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세상이 돌아 가지 않습니다.

(예) 쇳덩어리인 자동차의 윤활유항상 점검해 보지 않습니까

그만큼 희생해야 합니다.

내가 희생하지 못하고 화목하겠다고 하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낮은 사람이 되셨고,낮은 말구유에 오셨고,낮은 무덤속에 들어 가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목의 직책을 감당하 신 것입니다.

정말 웃으운 것은 자신의 자존심 다 세워놓고 명예와 입장을 다 고 려하면서 화목하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 웃으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기에 이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요, 이것을 감당하려고 하면 벌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형상을 닮 은 것이며,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전하게 되는 것 입니다.

 4.천국의 상급을 받는 복이 진정한 행복인데 이를 위해서는 의를 위 해서 핍박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주님의 상급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을 위하여서는 의를 위한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핍박의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1)어떤 사상이나 이데 올로기 혹은 사람을 반대해서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2)지혜가 없고 미련해서 자신이 받는 것을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 니다.

3)자신의 성격이 못되고,남을 무시하는 가운데 받는 것을 핍박이 라고 하지 않습니다.

4)잘못된 광신적인 열정 때문에 받는 것을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 니다.

의를 위해! 나를 인하여-즉,주님을 위하여 받는 핍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현대의 핍박은 예수믿기 때문에 거짓말 못하 고 예수믿기 때문에 손해 좀 보고,예수 믿기 때문에 절제할 것을 절제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이 나에게 주는 행복이 내가 조금 더 가지고,조금 형통하게 되고,조금 이익을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은 경험한 사람이 알게 되는 행복인 것입니다.

 예수믿으면서 조금은 부담을 가지고 믿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들 행복이란, 뭔가 정열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헌신할 일이 있고, 내 삶을 바쳐서 소망하고 바 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정열을 바쳐서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 도 봉사할 수 있는 사명이 있습니다. 내 삶을 바쳐서 소망하고 얻고 픈 주님의 나라와 그 상급이 있습니다.

받아야 할 고난을 받으십시오. 남이 헌신할 때 뒤로 물러서지 마십 시오.

성전건축에도 부담을 가지고 참여하십시오. 많이 헌신하고 고난을 느낀 만큼 참여한 사람은 너무나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의 봉 헌을 바라보고 그것만 생각해도 너무나 기쁜 경험을 가지시게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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