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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문제 (마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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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줄곧 팔복의 전체를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5:3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있다고 하는 것을 살펴왔다.
이러한 천국의 현재성과 긍휼 과는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많은 주석가 혹은 설교가들은 일반적으로 5:3-6절까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이룩되어질 상태로, 그리고 7절부터 11절까지는 이웃과의 관련으로 설정해 놓고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즉 지금까지 언급된 4종류의 복이 원인이 된자들에게서 이룩되어져야 할 對人과의 관계성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담고 있는 위험성은 그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큰지 오늘날 기독교의 참상을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오해일런지 모르나 대부분이 본문을 이해할 때, 구원과의 관련이 아닌, 즉 구원문제와 결부된 것이 아니고 구원 그 이후의 성도의 삶을 본문이 잘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분이 저 불쌍한 인간들을 얼마큼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또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는 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려고 하고, 때문에 자신은 의로운(데 저 불쌍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주기 위한 경쟁이 불 붙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 이원론적인 구획정리식의 규정도 문제가 된다. 어느것은 신과의 관계이고 어느 것은 이웃과의 관계라는 획일적인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우를 범하고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1차로 우리가 더 급선무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성경은 다분히 긍휼(e[leo) 할 때 2차적인 경우에 있어서 보다도 자신과의 관련에서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원하심이 긍휼 을 원하시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점은 우리가 익히 들어 온바가 아닌가.
마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라는 기사가 있고 실제로 의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그들이 긍휼을 입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새술과 새부대에 관한 기사 이후에 열두해 혈루병으로 앓던 여자가 구원 받는 장면과 죽은 소녀의 살아나는 기사. 그리고 27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ejlee;w) 여기소서 라고 함으로 긍휼을 입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위와 같은 기사에 등장하는 많은 주인공들은 자신이 긍휼을 입어야 할 필요를 절감한 이들이었다. 즉 자신을 긍휼히(불쌍히) 여기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감상적인 무능에 대한 자기학대가 아닌 그러한 경우는 실제로 자살도 가능한 경우이지만 절대의 문턱앞에서의 절망적 상황에서만 가능한 고백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하는 상황이다. 즉 내 속에 있는 두 존재의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항상 패할 수 밖에 없는 속사람의 처절한 상황전개 앞에서 누가 절망하지 않겠으며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실은 긍휼을 필요로 하기 보다는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善意志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편에서는 선의지에 속할지 몰라도 이미 악한 성품이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이며 세상의 선의지가 사실은 악의지임을 알지 못함 때문이기도 하고 이러한 실상이 옳게 자신에게서 드러나서 그러한 의지가 포기될 때만 비로소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되고, 또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하는 것과 동일하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망의 몸에서 건져냄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롬 7:25)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긍휼(ejlezmwn gevnhtai 히 2:17)이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어떻게 자신의 행하는 것이 악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열심히 자기 의를 세워가는 자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義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義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쫓아간 이스라엘은 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
그런데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비밀이 담겨져 있다. 롬 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다. 또한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라고 하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은 결국 순종코자 하나 순종할 수 없음에 갇혀 있다는 절망적 사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의지적 활동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발생하고 또한 하나님은 그러한 속에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문장 구조 역시 oti(호티) 이하가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아니한 것은 본문의 복이 긍휼히 여김을 받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김으로 얻어지는 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즉 maka;rioi oiJ ejlehvmone(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아직 긍휼히 여김을 받기 이전의 상태요,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현재가 아닌 미래 상황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불쌍한 것 자체가 복일 수는 결코 없다. 그것은 치욕이요,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불쌍히 여길적에 비로소 불쌍히 여김을 받기 때문에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긍휼히 여기지 않는한 결코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가 넉넉하고 건강한데, 불쌍히 여길만한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누군가가 긍휼을 베풀 수 있겠는가.
긍휼은 아마도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 나오는 강도만난 자의 경우에도 잘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야말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마땅한 상황이다. 이렇게 죽음의 상황에서 긍휼은 살려냄을 받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만이 참된 긍휼이며 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도 만나 죽어가는 상황은 불쌍한 상황,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이지 복있는 상황이라고 누가 감히 말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죽어가고 있는 단편적 상황에서는 그 말이 옳지만 결국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지금 주어진 죽음의 상황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서 긍휼히 여김을 마침내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이 저희 것이기 위한 필수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어두움의 체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옛 것을 청산해야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5共의 습성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증이 나고 진절머리가 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그리고 그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불쌍해지지 아니하면 결코 5共은 청산될 수 없을 뿐더러 새로운 세계의 가치가 들어와 자리할 여지가 전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변화이어야 한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기에 앞서 자신의 존재를 먼저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도 물론 긍휼히 여겨달라는 믿음 좋은 신앙적 고백이나 감상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며, 단지 그러한 죽음이라는 사실적 상황 아래서, 긍휼히 여길 수 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후에 나오는 소위 맏아들과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아마도 이때의 둘째 아들에게서는 당당한 분깃에 대한 요구만이 있었지 자신의 어떠함에 대해서는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듯 하다. 아니 돌아보면 자신은 당당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어엿한 아들의 모습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긍휼히 여기기는 커녕 의기탱천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복이 있는 자인 것은 마침내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혀 예상밖의 일이었다. 믿음 좋은 오늘날 기독교인
들의 사치스러운 40일 금식기도가 아니라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주는 자가 없어 굶어 죽게 되었고 금식 아닌 금식을 하게되는 모습이다. 차마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실제적 죽음의 상황에 직면하는 그의 탄식소리,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는 말씀대로 둘째 아들은, 비로소 긍휼히 여기는 자로 그의 생애가 뒤바뀌고 있는 순간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 신자들과는 전혀 대조적이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죄사해 주심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는 당당한 신앙고백의 모습은 어느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들은커녕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다.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 주체는 누구이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상은 누구인가 즉 긍휼히 여기는 주체도 자신이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대상도 자신일 때 그는 불쌍한 자요. 마침내 새로운 주체에 의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만한 불쌍한 자니,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ejsplagcnivsqh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하는 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장면이다. 때문에 필자는 마 5:7절 오늘 본문의 oiJ ejlehvmone(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자라기 보다는 긍휼한 자 라고 해석함이 더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 가 되려면 ejlehv-mone(에레모네스, 형용대명사, 남성, 복수)를 쓰기 보다는 차라리 5:6절의 주리고 목마른 자들(oiJ peinw'nte kai; diyw'nte th;n dikaiosuvnhn)에서처럼 ejleevw(불쌍히 여기다)의 현재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 형태인 oiJ ejlew'nte(호이 엘레온테스)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oiJ ejlehvmone(호이 에레모네스)를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해석해야 한다면 5장 5절의 oiJ praei'(온유한 자)의 경우도 동일한 구조의 언어 형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온유하게 여기는 자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5:5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야말로 웃지 못할 해석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웃지 못할 해석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oti 이하의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의 삶 속에서 당연히 주위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능동태적인 삶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긍휼히 여김을 받은 후의 당연히 이룩될 결과적 삶이지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한 삶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ejleevw(엘레오)의 현재분사 능동태의 oJ ejlew'n(호 엘레온)이 로마서 12장 8절 하반절에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oJ ejlew'n ejn iJlarovthti. 또는 긍휼을 베푸는 자 여기서는 개역성경의 긍휼을 베푸는(긍휼히 여기는)자 로 번역한 것이 바르게 여겨짐에서 단 한번 쓰이고 있다. 이것은 oiJ ejlehvmo-ne(호이 에레모네스)를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라고 하는 문장이 성립되려면 oiJ ejlehvmone(호이 에레모네스)대신 oiJ ejlew'te(호이 엘레온테스)를 써야한다는 나의 생각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결코 결과적인 삶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구태어 하지 않겠지만 성경은 대부분이 긍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긍휼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받아야할 대상이 너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며 그러한 충실함만이 비로소 너에게로 긍휼이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것이다. 긍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긍휼히 여기려고 부터하는 경우가 오늘의 일반이다.그러나 긍휼을 입은 이는 긍휼히 여길래서가 아니라 긍휼의 눈으로 인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는 2차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는 말씀이 성립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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