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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면죄부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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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성경을 읽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해도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 옳지 않으면 칭찬 받지 못한다. 좋은 목적이 잘못된 수단을 결코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교회의 일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나 2000년에 걸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하는 일에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권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한 교황이었다. 한편 그는 예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고 예술을 깊이 사랑한 교황이었다. 그는 당대 예술 거장들을 육성했고 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다.

오늘도 예술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라파엘의 바티칸 벽을 가득 채운 벽화들은 모두 그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또한 큰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꿈이었다. 그는 1506년 로마에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다.
설계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Bramante)에게 맡겼다. 워낙 방대한 구상이었기 때문에 율리오 교황은 건축이 진행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세상을 떠났다(1513년).

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그는 늘어나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전가의 보도와 같은 교황의 면죄권을 사용하기로 했고 결국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를 증명하는 증서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용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면죄부였다. 목적은 좋았으나 그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편 그 당시 독일의 중부지역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에는 대학이 신설되었고(1502년) 그 대학에는 젊은 성서학자 마르틴 루터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였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수도단에 속한 수도사이기도 했다.

마르틴 루터는 에르푸르트의 수도원 시절부터 인간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깊이 사색하며 기도했다. 때로는 금식과 고행도 하며 인간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며 씨름했다.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루터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인간이 힘쓰고 노력해서 ‘공적’을 쌓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너무도 보잘것 없고 미미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인간은 원죄(原罪) 가운데 태어났으므로 인간들이 행하는 선행까지도 인간의 죄성(罪性)으로 오염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밤낮으로 고민하던 루터에게 성경말씀 한 구절이 마치 하늘의 계시처럼 들려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 1:17). 이 한 마디 말씀에서 루터는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해답을 얻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며 인간의 구원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감겼던 눈이 떠지며 밝은 빛을 보듯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신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은총의 순간이었다.

구원의 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루터의 눈에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만들어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성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이 어떻게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이것은 성서의 진리에 전혀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당시 유럽에는 신학자와 신분이 높은 성직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면죄부 판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와 이를 매매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서적인 일인지를 진정 교회를 위한 충정의 마음으로 또박또박 적어내려 갔다. 모두 95개 조항에 이르는 장문이었다. 그는 먼저 이 문제를 주제로 대학내에서 공개토론을 하고 싶었다. 1517년 10월31일 루터는 공개토론을 제안하는 글과 함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95개 조항을 대학교회문에 게시했다. 루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교회개혁이라는 역사의 새로운 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박준서 교수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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