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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루터와 카톨릭의 교회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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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전도서의 말씀대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때를 정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역사의 때가 이르도록 기다리시기도 한다.

가정해서 마르틴 루터가 그의 시대보다 100년전에 교회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면 그래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16세기 루터의 교회개혁 운동이 성공한 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성경을 비롯한 모든 책과 기록은 손으로 필사되었다. 필사본 시절 새로운 지식의 확산이나 정보의 전달은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 한정되었고 그 전달 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변혁을 가져온 것이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1400년대 중엽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납으로 활자를 주조하고 인쇄용 기름 잉크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그가 개발한 인쇄기로 처음 인쇄해낸 책은 라틴어 성경이었다. 이로부터 5년 동안 만들어진 성경은 과거 1000년 동안 필사된 성경보다 많았다.

1500년대에 들어서자 인쇄기술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되었고 유럽의 대도시에는 인쇄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인쇄술은 보편화되었다. 이로써 지식과 정보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를 기다려 마르틴 루터를 들어쓰셨다.

1517년 10월 마지막 날 루터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했을 때 즉각 독일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독일 주요 도시의 인쇄소들은 앞을 다투어 ‘95개 조항’을 인쇄했고 한달이 채 되지 않아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95개 조항’이 확산되자 루터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면죄부 판매는 급감했다. 신설 대학의 무명의 젊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일약 화제의 인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만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루터의 주장은 조용한 대학도시에서 일어났던 ‘작은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쇄술 때문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루터의 ‘95개 조항’에 대해 로마교황청의 초기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교황청은 젊은 신학 교수의 혈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95개 조항의 내용이 알려지고 독일에서 루터의 지지자들이 늘어나면서 면죄부 판매가 급감하자 교황청은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의 신부이며 수도사 신분을 갖고 있던 루터에게 로마로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신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루터의 로마행은 위험한 것이었다.

이때 루터와 교황청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작센의 선제후 프레드릭이었다. 독일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까지 갖고 있던 그는 독일 에서 뿐만 아니라 교황청에도 영향력이 컸던 당대의 거물이었다.

그는 그의 영지 안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설립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젊은 교수를 보호해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중재로 루터는 로마로 가지 않고 독일에서 교황이 보낸 인물에게 그의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교황청에서 지명한 인물은 당시 손꼽히는 신학자였던 추기경 카예타누스였다. 면죄부에 대해 신학 논쟁을 고대하던 루터는 그와의 만남이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루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서 추기경 앞에 섰다(1518년 10월).

그러나 진지한 신학적 토론을 기대했던 예상과는 달리 추기경은 일방적으로 루터를 혹독하게 견책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터의 입장은 확고했다. 추기경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했다.

루터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교황청은 이번에는 신학 논쟁의 달인으로 이름난 신학자 에크를 루터와 만나게 했다. 에크라면 젊은 신학 교수 루터를 충분히 제압하리라고 믿은 것이다. 루터와 에크의 만남은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졌다. 이 논쟁에서도 루터는 종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성역이었던 교황권과 종교회의의 최고 권위까지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로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이제 가톨릭 교회로서 남은 길은 루터를 ‘파문’하는 것뿐이었다.
/박준서 교수(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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