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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청결한 자 (마 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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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이 청결치 못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만물은 모두가 정하다 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더러움과 혼돈의 존재이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구원이 필요한 피조물이다.
성경은 애초부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고 있다.
만물은 정하다. 한번도 만물, 즉 거기에 있는 땅은 혼돈하거나 공허한 적이 없었다. 다만 만물이 혼돈하고 공허한 적이 창조시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혼돈하고 공허한 인간이 창 1:2의 말씀을 볼 때 자신은 보지 못하고 괜스레 애꿎은 저 땅이, 저 우주가 혼돈과 공허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해석할뿐이다. 생각해 보라. 우주가 혼돈이라든지 공허라든지, 하나님에게 있어서 혼돈, 또는 공허라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지.

만물은 정하다. 오직 그 자체로, 즉 있음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것은 청결치 못한, 혼돈과 공허한 인간의 손이 미칠적마다 인간과 함께 몸살을 앓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청결치 못한 자기 시각에 모든 것을 맞추려 하기에 있음 그대로를 무질서라느니 혼돈이라느니 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자기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품종을 개량한다거나 정원수를 따로이 가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것을 자기 취향에 맞도록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기 취향에 맞는 하나님이면 좋으신 하나님이요, 자기 취향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 보다 이다. 자기 취향에 맞으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느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생함을 목도했다는 간증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으련만 .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보았다면 자기 취향에 맞는 하나님을 보고 경험했을 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는 전혀 별개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함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청결(kaqarov)! 깨끗함 , 정결함 , 순결함 이다. 마음이라는 방에 먼지나 더러움이 있을 수 있기에 깨끗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더러움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떤 인간도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때문에 다만 아-멘 일 뿐이다. 그리고 청결치 못한 자신을 돌아보며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이 마음이 청결하다 는 것이 어떤 것일 거라는 제나름의 결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예수께서 팔복중에 하신 말씀이니 당연히 우리는 청결해야 한다 고 수용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이들에게는 도대체 마음이 청결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시시콜콜 생각하는 자체가 마땅치 못하고 신앙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마음이 청결하다함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바로 그 알고 있다고 하는 막연한 앎이 정작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인줄은 왜 알지 못하는가

청결(kaqaro;)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아직 청결치 못한 더러움(ajkqavrto)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여기서 더러움 은 외식과 불법이요,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때의 더러움 을 잘 나타내주는 개념은 마음의 정욕대로이다.
마태복음 23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어떠하였길래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한 자 들이며 그리고 그 안을 먼저 깨끗이 하라고 질책을 듣고 있는가
그들이 과연 그렇게 더러운 자들이었는가 적어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릴줄 알며 어느 정도의 구제와 사회 사업, 때로는 종교적인 경건을 위한 금식기도와 절제 있는 생활을 보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는 모범된 신앙인들이 아니던가 적어도 그들의 생활중 무절제하거나 사회의 눈살을 찌푸릴만한 더러움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에 적어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한 자들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도 인정한 사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도록 했으며 반면에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고 또한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자들이 되도록 하게 하였는가
모범적인 종교 생활이 탐욕과 방탕이요 더러움이라는 것이 말이되는 소리인가 십일조, 금식, 구제, 새벽기도, 봉사, 전도 등 그것도 누구보다도 열심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계의 지도자가 되기까지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봉사 훈련을 하였는데, 그것이 과연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죄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라는 칭호를 얻을만큼 그렇게 죄질이 흉악한 것이었느냐 하는 말이다.
사실 오늘날 강조하고 독려하며 달음질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자취를 쫓는 것이라는 것은 왜 깨닫지 못하는가 그들 신앙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로지 탐욕과 방탕과 불법만이 경건한 기독교인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에게서 자행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열심내는 그것이 다만 탐욕의 소산물에서 나오는 열심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 십일조를 하고 금식기도를 하고 있는가 자녀가 잘되고 교회가 부흥되고 사업이 번창해야 믿는자로서 덕이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무서운 탐욕이며 이기심인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도색하고 마음껏 자신의 정욕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정직을 강조한다. 왜 정직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정직해야 하는 참으로 불행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기에 정직도 탐욕이요 불법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이 사랑을 강조한다. 이제는 사랑도 기독교인이기(혹은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비극의 시대요 불법을 행하는 시대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사랑 이라는 모든 행위도 탐욕과 방탕과 죄악일 따름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물질만능에 빠졌거나 향락에 도취되었기 때문에 더러운 자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도덕적이었고 모범적이었으며 신앙적이었던 것이 질타 받게 된 것이다. 향락에 도취되거나 타인의 것에 욕심을 내는 것도 물론 탐욕이다. 그것은 다만 현상계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래도 봐줄만한 탐욕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왜 도덕적이고 율법적이었는지 아시는가 그들은 적어도 현상세계에 대한 탐욕은 적당히 절제할 줄도, 때로는 나눔의 모범도 보일줄 아는 신사적인 종교인들이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기도 하고 조직도 잘 운영할 줄 아는 신앙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하나님을 위해서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질 그 모든 영광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모든 재산을 아끼지 않고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드릴 각오가 되어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것은 더 큰 것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알겠는가 더 고상한 가치에 대한 욕심 때문에 기꺼이 덜 고상한 가치를 희생하는 것일 뿐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탐욕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니 그러고도 어찌 화가 없기를 바라는가 차라리 옆집 물건을 탐하는 것은 그 물건에 대한 욕심밖에는 없는 훨씬 덜 죄악적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탐하고 있는 도적놈의 심보를 마음에 가득 담고서 하나님 나라를 선전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그들로 하여금 배나 더 하나님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도록 탐욕을 불어넣어 주고 있으니 이러고도 화가 없기를 기대하는가
이 땅위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욕심으로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봉사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깊고도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이 도적놈의 심보를 감추어 둔 채, 아니 그것이 욕심인지도 알지 못한 채, 모범적 신앙인인 줄 착각하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고 있으니까 .
율법적 신앙의 헛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맹이요, 소경들인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다. 왜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자신이 보여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탐욕이나 욕심으로 얻어지는 그런 대상들과는 전혀 별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는가 바로 그와 같은 탐욕과 방탕, 이기심이 청소되어야 청결해진다. 욕심을 제거한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의 발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 수 있겠는가 욕심을제거하려는 그 탐욕도 사라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바로 욕심을 제거하려는 그 욕심도 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당연히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이 또한 역시 신의 개입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요 바로 탐욕의 주범이 죽지 않으면 마음의 청정은 불가능하다. 마음속에 두존재가 있는한 두개의 법이 엉켜서 항상 전쟁의 와중 속에 있게 된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래서 잔과 대접의 겉도 중요하나 속부터 깨끗이 해야 한다.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여 질터이요, 방법은 깨끗하신 그분이 살아있는 나를 몰아내고 그 살아있는 나는 진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해지는 과정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와 같은 고통의 과정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이 청결해지는 때는 마음속의 다툼이 사라지는 때요, 혼돈 때문에 가리워져 있고 희미하던 하나님을 보게 될터이다. 바로 복있는 자인 것이다.

이를 요한복음은 너무나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요 14:8-10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물론 빌립이 보고자(zeivkgumi) 할 때와 예수께서 나를 본(oravw) 자 할 때의 보는 것에 대한 개념차이가 현저한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그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 즉 진리의 영을 세상은(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oJ kovs-mo) 능히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를 보지도(qewrei') 알지도(ginwvskw)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영(to; pneu'ma th' ajlhqeiav)이 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삼고 함께 거하실 때 비로소 그와 하나가 되며 그는 내 안에 나는 그 안에, 곧 그를 보게 된다. 이 와중에서 물에 잠기는 사건이 일어나고 물에 잠기면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장사되어야 깨끗해진다. 탐욕 덩어리가 죽어버렸는데 무슨 다툼이나 혼돈이 있겠는가
그래서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5)이다.
내가 스스로 욕심과 더러운 것을 제거할 수 있다거나 스스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주체가 되어서 진리에 의해 몰아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뤄 보려할 때는 그 큰 신앙생활의 열심이 열심히 진리를 거부하는 몸짓이 되는 것이다. 열심히 성경을 보아도 당신 자신이 성경을 해석하는 주체가 되어버리니 성경과 진리 자신이 당신을 해석해 줄 자리를 박탈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보지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
고 있으니 하나님은 섬김이나 받고 계시고 당신은 계속하여 섬기고 있는 자이니 당신과 그는 영원히 하나가 아닌 두 존재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나님 생각 따로, 당신 생각 따로. 영원히 일치할 수 없는 각각인 것이다. 하긴 그렇게라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마음 불안해서 잠시도 그냥 있을 수 없을 것이며 거저 하나님 자신을 받아들이기(lambavgw)에는 당신의 그 잘나빠진 양심이 허락지 않으실터이나,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양심임을,즉 하나님을 몇푼어치 되지 않는 값으로 계산해서 받으려는 허위의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깨끗하고 선한 양심(딤후 1:3)은 감히 하나님 자신을 값으로 계산하지 못한다. 아니 값으로 계산하려던 옛날의 그 녀석이 이미 내가 아니므로 값으로 계산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거룩한 양심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져 받았으니 이제는 배은망덕의 죄를 짓지 말고 한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십시다 하고 설교한다.
그리고 아멘한다. 이 말의 엄청난 모순과 함정을 이제는 간파하실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은혜를 거져 받은 자라면 그런말을 할 수도 없고 그런말에 아멘하지 못한다. 은혜가 임했고 진리를 거져 받았다면 이제는,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발버둥치던 그놈이 진리에 의해 내어쫓김바 되고, 이제는, 참으로 이제는 진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당신의 삶을 내안에서 살고 계시며 나는 그안에서 그와 더불어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이제는 자신의 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진리의 열심으로 살 뿐이다. 자신의 열심은 식어버리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열심은 그냥 하나님의 열심으로 존재하시며 나를
움직이신다. 앞서와 같은 말의 함정은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고 은혜를 무엇인가 값으로 계산해서 보답하려는 허튼 잔꾀에 불과하다. 이같은 행위에 하나님은 속지도 않으실 뿐더러 속으실 수가 없다. 다만 열심있는 경건한 종교인들만이 스스로 속고 있고 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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