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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자 (마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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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산상수훈 처음 5:3-12의 내용을 팔복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일컫게 된 연유야 어떻든 사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福의 종류는 여 러개일 수 없다. 다만 복에 대한 전달의 방법으로 팔복 또는 구복이라는 여 러 형태의 표현 수단이 동원될 수 밖에 없는 표현상의 다양성은 어쩔 수 없지 만 성경 전체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복의 내용이 다수일 수는 결코 없다는 말 이다.

죄인인 인간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가 아닌 본질적인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나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거나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는 사실, 그리고 희미하게만 여겨지던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face to face ) 대하여 보고 온전히 그분을 안다는(ejpigi-nwvskw)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라 일컫음 받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하나의(동일한) 복이며 천국이 저 희 것인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복인 것이다.

다만 성경이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복의 한가지 통로를 이렇게 다양하 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양한 인간을 향하신 여러측면에서의 배려임과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는 그것이 둥글다 해야 할지 네모라 해야 할지 하는 표현의 한계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도 그속에 담겨져 있는 반짝 반짝 빛나는 보석을 다만 이 시대에 내가 살고 있는 부분 적일 수 밖에 없는 편협한 개인의 언어로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라고 밖에 는 다른 방법이 없다. 구도자는 다만 그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뿐이라는 것이 다. 그것이 얼마큼 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제한적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다수가 보편적 개념으로 공유하고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마 5:9에서 중요한 단어는 oiJ eijrhnopoioiv(화평케 하는 자)이다. 대부분 번역성경들이 이 단어를 화평케 하는 자들 Peacemakers 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간과해서 안 될 것이 oti 이하의 문장이다. oti aujtoi; uiJoi; qeou' klhqhvsontai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일이 하나 있다. 도대체 누가 화평케 하는 자들 (Peacemakers)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명하다. 화평한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기 코가 석자나 빠진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 을 돌본다고 나설 수 있는가 자신의 가정이 화평치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가정에 화평을 말할 수는 없다. 전쟁광이 평화의 중재자가 된다는 것은 제스 처로는 가능할지 모르나 도무지 불가능하다. 백합꽃이 백합향기를 발하는 법 이요,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오늘날은 가시나무가 가시나무 더러 포도열매를 맺으라고(알고보면 그 열매도 가시나무 열매이지만) 열변을 토하고 있으니 그 상황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 그렇다면 누가 과연 화평케 할 수 있는 Peacemakers 가 될 수 있는가

그는 우리의 화평(eijrhvnh)이신지라 (엡 2:14) 그는 평강의 왕 (사 9:6)이시며 우리의 화평 이시다. 그러므로 평강 의 왕 이신 그리스도만이 Peacemaker 가 본질적으로 가능하다. 동시에 단수 Peacemaker 와 하나가 된 자들, 곧 그와 연합하여 화평을 이룬 자들 만이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가시나무에게 포도열 매를 맺으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리고 맺고싶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 한 것처럼 화평케하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자신이 화평을 이룬 자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그림의 떡이다.

그러므로 Peacemakers 는 누구만이 가능한가 하면 이미 화평을 이룬 자, 즉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일컬음을 받고 있는 자만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oiJ eijrhnopoioiv 가 어떤 자들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여기서 하나님 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klhqhvsontai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 태) 는 현재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라 이제 oiJ eijrhnopoioiv에게 주어질 앞 으로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oiJ eijrhnopoioiv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을 받기 이전의 어떤 상황에 있는 자들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결코 억지 논 리일 수가 없다. 오히려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하는 번역이야말로 성경의 큰 흐름 과 줄거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번역이다. 번역자들이 결코 그러한 의도로 번역한 것은 아닐 터이지만 본문에의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의미가 도무지 가리 워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는 번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따 져보자. 의도야 어떻든 번역문장을 그대로 놓고 헤아려 보자는 이야기다.

oiJ eijrhnopoioiv를 Peace-makers 로 이해를 해야 한다면 어떤 중대한 모 순에 직면하게 되느냐 하면 Peacemakers 들의 행위의 결과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일컬음 받을 수 있는 원인적 행동이 된다고 하는 논리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곧 Peacemakers 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 되는 것 이다. 이러한 엄청난 모순이 숨겨져 있는데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성경구절을 대충 은혜스럽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조금이라도 어색 한 앙금이 있으면 짚어보고 물어보며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eijrhnopoioiv를 Peacemakers 로 번역하는 것에 이의를 두 고 싶다.

오히려 eijrhnopoioiv는 Peace-makers 가 될 수 있는 선행적인 준비자들을 나타내주는 개념이다. Peacemakers 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 은 연후에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맺혀질 열매이다. 참감람나무에 接붙임을 받았으면 돌감람 열매를 맺고자 몸부림을 쳐도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불가능 한 것과 같다. 참감람 나무가 되었으면 태풍과 병충해의 피해로 인해 주렁 주렁 맺히지 못하고 겨우 하나의 열매만 맺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수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돌감람 열매와 비교될 수 없는 참감람 열매인 것이다. 그 렇듯이 Peacemakers 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은 연후의 삶인 동시에 그들의 신분이다.

그러면 이제 eijrhnopoioiv를 어떻게 새겨야 할 것인가 나는 우선 우리말 번역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들 보다도 화평을 이루는 자가 더 적절하다 고 본다. 물론 그 의미는 개개인의 내적인, 안에서 이루질 개념으로 이다.

어떻게 화평을 이룰 수 있으며 화평케 될 수 있는 복있는 자인가 그리고 화평은 무엇으로부터 누구와의 화평인가 또한 화평의 참된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eijrhvnh의 헬라적 개념은 여러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 보다는 끝없 는 전쟁의 와중에서의 막간(interlude)으로 순수하게 되어지는 평화의 상태 (state of peace) 라 한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두 존재의 의견 불일치에서 시작된다. 서로의 이해가 다 를 때, 그리고 그 의견이 팽팽히 대립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일 치될 때 전쟁원인은 소멸하게 되므로 평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은 일시 적인 평화요 언제든지 두 존재의 의견이 대립되면 다시 발발할 가능성은 계속 해서 상존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은 서로 팽팽히 대립하고 있는 두 김씨의 타협으로 인한 일시적 위기극복이 아니다. 상호적절한 정도에서의 양보도 방법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임시방편의 응급조치들일런 지는 몰라도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 (엡 2:15)은 그러한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원수를 제거해야 한다 . 우리 속에 거하는 죄는 곧 나 자신 이라는 사실이다. 마귀는 다른게 마귀가 아니다. 마귀와 하나인 내속에 거하는 그 나가 원수요 그 나 가 아무리 원수야 물러가라 소리쳐도 그 원수는 더 강하게 살아날 뿐이다.

성경적 화평의 방법은 타협에 의한 일치(reconcilication)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 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 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 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eijrhnhpoiov는 바로 위와 같은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eijrhvnh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한 poivew는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는데 있다 . 거기서 진리와 하나됨, 곧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질 뿐더러 화평이 가능 해지는 것이다. 이때야 비로소 초막도 상관이 없고 궁궐도 상관이 없는 존재 가 될 터이니 그 안에서 다투고 있던 전쟁이 사라지고 비로소 하나님의 아 들(uiJoi; qeou') 이라 일컬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eijrhvnh+poivew의 합성어인 eijrhnopoiov의 poivew는 여기에서는 적어도 다른 이들을 화평케 하는 그것에 촛점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는 것이 화평을 위한 poivew이니 원수된 것이 사 라져 버리고 나면 자연히 육신의 생각과 더불어 사망이 사망해 버리고 영의 생각이 지배할 터이니 생명과 평안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eijrhnopoiov가 유일하게 성경에서는 마 5:9에 한번 쓰이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단어에서 파생한 동사가 eijrhnopoievw로서 골로새서 1:20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eijrhnopoihvsa dia; tou' aimato tou' staurou' aujtou')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0)

여기서도 화평의 방법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인 것이 잘 나타나 있다. 악한 행실 속에 있는 마음에 원수를 그의 죽음으로 화목케(ajpokata llavssw) 하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eijrhnopoivew는 ajpokatallavssw와도 밀 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화목을 이룬 사람의 당연히 나타나고 이룩될 삶의 외적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는 야고보서의 어휘선택과 표현방법 이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karpo; de; th' dikaos uvnh ejn eijrhvnh/ speivretai toi' poiou'sin eijrhvnhn) 원문을 직역해 본다면 화평안에 있는 의의 열매가 화평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심기워진다 라고 할 수 있다.

마 5:9와 골 1:20은 eijrhvnh와 poivew를 합성하여 쓰고 있는 반면 야고보서 는 곧바로 poivew를 eijrhvnh를 목적격으로 취하는 타동사로 쓰고 있다. 단 순히 야고보의 필체 또는 표현어법의 독특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표 현이야 하나의 의미를 한 단어로도 할 수 있고 구(句)로도 할 수 있고 절(節 )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번 쓰이지 않는 개념이 합성어로 표현된 곳과 문장의 형태로 기술된 것은 자못 흥미롭다.

이것은 이렇게도 생각이 가능하다. 우리말에서도 돌과 다리가 합하여 돌다 리 라는 두개념의 의미를 담고서 복합어의 독특한 한 개념을 지닌다. 그와 같이 toi' poiou'sin eijrhvnhn과 이 두 단어의 합성어인 eijrhnopoiov와 eijrhno-poievw의 의미는 명백히 뉘앙스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면 아 전인수가 될 것인가 그 뉘앙스의 차이를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oiJ eijrhnopoiov는 바로 toi' poiou'sin eijrhvnhn이 될 수 있기 위한 앞선 과정이요 후자에 대한 영역이 for those that make peace 라고 되겠지만 이것을 한 단어로 표현해 볼 수 있는 단어가 오히려 화평케 하는 자들 인 Peacemakers 할 수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적인 견해요 추론이다.

또한 oiJ eijrhnopoiov 에 대한 영역에 있어서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Peacemakers 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 나 어휘선택의 제한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번역성경이 말하 고 있는 화평케 하는 자들 의 의미로 새겨진다면 그것에는 반대하고 싶은 것이다.

 화평을 이루는 자들(oiJ eijrhno-poioiv)은 복이 있다. 그러나 그 화평을 이 루기 위해서는 한몸되어 애지중지 지내던 원수를,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로 진멸해야 한다. 남편이 죽어야 새로운 남편에게 시집간다. 태어날 때부터 아담안에서 남편이던 세상체제가 무너지지 않으면, 그것도 돌 위에 돌 하나라 도 남기지 않은채 파괴되지 않으면 진리와 한몸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oiJ eijrhnopoioiv는 복이 있나니 그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고아 와 같이 버림받은 것같기도 할 터이요. 그동안 쌓았던 자기 성의 무너져 내 림이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그것은 잠시 잠깐이면 된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 이요, 제자들을 앞에 두고 직접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 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러한 말씀들과 마 5:9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말씀이다. 비록 화평을 이 루는 과정은 십자가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조금 있으면 그분의 평안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더이상 고아로 버려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klhqhvsontai) 참으로 복있는 자들임이여! 김창호씀 추신:이 글을 썼을 때와 지금 올릴 때의 생각이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 다만, 수정을 하고 올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 글을 썼을 때의 분위기를 유지 하는 것도 듯해서 그냥 올립니다. 화평을 누리시며, 화평케하는 이들 이 모두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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