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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 노래 불러라 (시 118:1-4, 엡 05: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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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 가운데 프랑스의 화가 밀레(J. Millet)의 만 종이라는 그림이 있다. 19세기의 종교화가인데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성찰하며 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경건미를 느끼게 된다.

 우리 나라의 흥사단 운동을 계승해 가고 있는 석학 안병욱 선생의 글 에 이 그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일하는 사 람,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다. 과연 훌륭한 관찰이요 심미안을 지닌 사람의 평가라 여겨진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성숙해진다. 아울러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한 줄로 여기고 일할 수 있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사 람으로 하여금 더욱 아름답고 어른스럽게 한다. 교회 안에서 흔히 말하는 삼박자 축복이란 바로 일과 기도 그리고 감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으로 승화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의 축복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더더욱 특별한 축복이다. 아무나 기도할 수는 없다. 은혜받은 사람, 특별한 소명감 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자기의 불완전함을 아는 사람,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해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 더 큰 일 도 수행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줄을 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생활은 빈곤의 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진 허기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씨 뿌리는 사 람의 그림이지만 그의 희망은 추수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신령한 노 래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에베소 5:18)

(2) 1895년엔 미국의 남부 알라바마 주에는 일대소동이 벌어졌다. 목화벌 레 소동이었다. 목화농사로 부를 구가하던 알라바마, 그 농장에서 흑인노예 들을 착취하던 백인들에게 최악의 위기가 닥쳤던 것이다. 그들은 생각 끝 에 목화 농사 대신 낙화생 농사를 짓기로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이곳은 세계적 낙화생 영농지가 되었다.

 알라바마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여 한 동상을 건립했다. 목화 벌레동 상이다. 그들은 그 동상의 주춧돌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목화벌레에 대해서도 심신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이 벌레 는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주었다.

 옛날 히브리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하느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느님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하느님은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 118:5-)

하느님은 우리에게 땅을 주셨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 둘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알라바마의 땅은 목화농사에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낙화생 농사에도 적합한 땅이다. 그와 같이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을 여러가지 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적 선입관이나 전통적 관습에만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날마다 새 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존재는 새로운 윤리, 새로운 사상, 새로 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알라바마는 낙화생 농사로도 유명하지만 흑인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M.L.King)목사가 백인들에 의해 암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총도, 몽둥 이도, 돌도 가지지 않은 그에게 총을 쏜 사람들, 그들은 알라바마 땅은 하 느님께서 백인들에게만 부여한 땅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킹 목사의 죽음은 알라바마 주 뿐만 아니라 전 미국땅이 백인과 흑인 그 밖의 소수민족이 공 존하는 땅임을 밝혀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 점에 있다. 킹 목사는 흑인들에게 언제나 다음과 같이 충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거리의 청소부일찌라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노래를 작곡하듯 여기 흑인 아무개 청소부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 놓으 라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만이 흑인의 해방이 요 승리라는 뜻이다.

 (3) 존 와너메이카((J. Warnermaker)의 소년시절 이야기 가운데 있었던 일 이다. 그는 후일 세계 최대의 백화점 왕이였고 YMCA운동가였고 체신부장 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어릴 적에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어서 벽돌공장의 직공으로 자랐다. 그러나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 를 찾는 신실한 신도였다.

 19세기의 미국은 결코 부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다니던 교회도 가난한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예배당으로 들어 오는 오솔길이 흙탕물로 더러워져서 출입하는 사람들이 곤혹을 느끼고 있 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난데없이 그 길 여기 저기에 벽돌이 깔려 있었 다. 그 다음 주일에 더 많은 벽독이 깔려 있어 신도들에게 편이를 주었다.

 이에 놀란 목사님이 세번째 주일 이른 아침 예배당에 숨어서 그 길을 지켜 보고 있었다. 한 어린 소년이 벽돌을 지고 와서 또 깔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소년이 바로 와너메이카였다. 그는 주급으로 받은 품삯 가운 데 십일조를 떼어 벽돌을 구입 예배당 길목에 깔았던 것이다. 이 사실이 온 신도들에게 밝혀지자 신도들은 모두가 일대각성, 마침내 예배당을 새로 단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유명한 부흥목사 스폴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 느님께 감사하면 하느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 마음의 빛, 영 혼의 빛을 주실 것이다. 마음의 빛, 영혼의 빛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 리를 깨닫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한국의 신도들은 무엇이든지 세계제일, 온 세상을 몽땅 차지하려는 엄 청난 기적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한 사람에게서 잃어버렸던 하느 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목적하여 선교하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 하느님 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적더라도 능히 하느 님의 일을 성취하고도 남는다. 병고침을 받고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그 일에 감사하여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한 사람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다. 풍년이 들어 엄청난 추수를 하여 곡간을 확대 수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자기소유를 절반을 가난 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한 사람이 이 땅을 복음화하는 역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사람인가 사람이란 창조된 존재이다. 은혜의 빚을 진 존재이 다. 그러므로 사람됨의 참 모습은 감사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다(A. 헤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창조 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얼마일까 한국에는 1천만의 그리스도 신 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 가운데 얼마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의 사람됨의 참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세인들은 교회는 너무나 많은 연보 를 거둬들인다고 비난하고 심지어 걱정까지 한다.

 그러나 1천만 하느님나라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거 둬들이는 헌금을 몽땅 다 사회에 희사해도 어지간한 대학 하나 세우기에도 벅차다. 모자란다. 어지간한 주요기업 일으키기에도 충분치 못하다. 교회 는 사람을 본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선교기관이다. 본래의 사람의 참 모습은 감사하는 것이다. 그 비결은 찬양이라는 헤셀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다. 그래서 옛날 시인은 노래하였다.

 야훼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는 어지시다.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시 118:1-)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혜 를 받은 것이다. 하느님께는 언제나 빚진 존재이다. 그 빚은 계약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에서 진 빚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참 사람은 늘 감사하며 노래 불러야 한다. 거듭 감사노래 부르며 살아야 한다. 빚을 진 사람은 그 것을 갚아야 한다. 그것이 곧 부르심을 받은 것이요 사명을 가지는 것이 다. 그 부르심, 그 사명은 복음의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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