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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해지기 위해 약해져야 합니다 (고후 1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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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처럼 쉬운 대답이 없었습니다. 늘 그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제 자신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싫을 때가 많습니다. 마땅히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나 자신의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제 자신 안에는 제가 좋아할 수 없는 기질상의 약점이 있습니다. 성격상의 단점이 있습니다. 이같은 나의 연약함을 의식할 때마다 거의 조건 반사적으로 다시 내 속에서 튀어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나같은 사람을 목사로 부르셨나요라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유머처럼 말합니다만 이 유머의 배후에는 저의 솔직한 내면의 고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나라는 선지자에게 연민과 공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요나가 꼭 요-나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 목회의 장애물을 경험할 때마다 목회의 장에서 요나처럼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느낄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에게 늘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바울사도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의 유형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기질적으로 담즙질의 유형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는 어떤 상황적인 연약함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마도 그의 육체 안에 있었던 난치의 질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바울은 '육체의 가시'라고 말합니다. 성경학자에 따라서 어떤 이는 바울에게 고질적인 안질병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6:11에서 그가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안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우리도 시력이 감퇴되면서 점차 큰 글씨 성경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학자들은 아마도 다메섹 도상에서 강력한 하늘의 빛이 바울을 거꾸러뜨릴 때 주님의 징계로 얻어진 병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다고 추측합니다. 갈라디아서4:14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고 했는데 안질병 정도로 그런 고백을 했겠느냐고 의문을 표시하면서 당시에 사람들이 아주 부끄러워하던 간질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그의 육체에서 쉽게 떠나가지 않고 그를 찌르고 괴롭히던 어떤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놀랍게도 자신의 연약함이 오히려 강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0절) 우리가 이런 역설(paradox)을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진정으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약해져야 한다는 역설적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연약함에는 보이지 않는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하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연약함의 영적인 유익이 무엇인지요

1. 연약함은 우리로 인간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소위 잘 나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소위 '자아신화 컴플렉스'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나 된 것처럼 스스로를 우상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래된 유머 가운데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환자가 늘 자기는 신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옆에 있는 환자가 말하기를, 야, 제발 정신 차려라. 난, 너 같은 아들을 둔 일이 없다고 했답니다. 사실 인류역사의 처음에 사단이 첫 사람들을 찾아와 선악과로 유혹하면서 던진 미끼가 네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는 삶의 도상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이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우리네 삶의 장애는 우리가 한계를 지닌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는 학습에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면서도 인간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에 고백되어진 바울사도의 육체의 고난의 이유가 그런 유형의 케이스였을 것입니다. 그는 우선 본문에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7절 말씀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면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1-4의 고백에 의하면 신비한 체험을 통해 몸을 떠나 그의 영혼이 삼층천(셋째 하늘)에 까지 이끌려가게 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통해 병을 고침받고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만하면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추앙할 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육체의 찌르는 가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도 그의 병은 고침받지 못했습니다. 남을 고치면서도 자신은 고침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 그가 받은 응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신이 아닌 한계와 불가능을 지닌 채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임을 깨닫기 위해서 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연약함은 우리로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연약함은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자, 바울사도가 자신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육체의 가시를 경험하면서 그가 한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간절히 이 문제로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는 것 곧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의 응답이 당장에 우리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말할 때 응답에는 영어로 Yes/No/Wait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경우에는 No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No는 더 좋은 Yes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남겨 두심으로 그것으로 인하여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그가 자고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겸손한 종이 되게 하려는 응답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깨달음이 그가 기도함으로 얻은 응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육체의 가시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과정에서도 엄청난 고난들을 극복해야만 했었습니다. 한때 그는 그의 인생이 사형선고를 받은 심정이었고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극한상황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우리는 직접 그의 간증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1장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자 이 고백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고난을 허용하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연약함은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은총의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약할 때 내가 강함이라고. 그리고 내가 자랑할만한 것들을 자랑하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연약함은 우리로 이웃들을 사랑하게 합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본문의 고백을 편지로 기록하게 된 이유의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 중 어떤 이들이 바울을 반대하고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무력하게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아마도 이런 같은 성도들 그리고 복음의 동역자들에게서 바울이 받고 있었던 오해는 육체의 질병 이상으로 그의 마음을 찌르고 괴롭히던 예리한 가시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본문이 끝나는 고린도후서12장 11절부터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까지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호소하고 있는 한 일관성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가 받고 있는 모든 오해, 부당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들을 변함없이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12:15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그들이 바울을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자신은 그들을 사랑하고 자신을 내어 주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연약함과 고난이 오히려 바울을 이런 사랑의 사람으로 그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사도에게 고난을 허용하신 중요한 하나의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고린도 후서 1장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4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이미 고백한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는 많은 경우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만 '왜'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고난의 와중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를 경험한 사람마다 고난 받는 이웃들의 아픔에 눈을 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새롭게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이웃의 동일한 연약함에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바로 이 진리가 이번 이라크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가르치시는 또 하나의 레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미국의 거듭난 그리스도인 대통령인 조지 부시가 왜 도대체 무고한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릴 것이 뻔한 이번 전쟁을 왜 결단해야만 했었는지 그 길밖에 정말 없었는지, 제 머리로는 아무리 아무리 묵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꼭 그래야만 했었는지 저는 사담 후세인 이라는 인간도 동일하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벌써 여러 해 독재를 하면서 권세를 누린 것이 모자라 죄없는 자기 백성들을 볼모로 잡고 인간방패를 삼으면서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왜 항복하고 도망가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솔직히 하나님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전쟁을 막지 않으시고 허용하시는지 제 아둔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역사의 어떤 때보다 인류는 지금 무고한 생명들 특히 어린이, 노약자, 여성들의 희생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대한 반전운동의 물결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라크 전쟁 발발이후 저에게 어떤 성도가 보내온 이 메일에는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의 반전집회에서 연설한 13세 이라크 소녀 커닝햄 중학교에 막 입학한 샬롯 앨더브런(Charlotte Alderbron)양의 연설문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이 연설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제 모습을 떠 올려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사람들은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하면 군복을 입은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나 총을 들고 있는 검은 콧수염을 기른 군인들이나 알라시드 호텔 바닥에 '범죄자'라는 글씨와 함께 새겨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걸 아세요 이라크에 살고 있는 2천 4백만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15세미만의 어린이들이라는 걸, 이라크에는 모두 1천 2백만명의 어린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저와 같은 아이들이지요.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래 동안,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리 속에는 바로 제 얼굴이 떠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제가 운이 좋다면 1991년 2월 16일 바그다드의 공습 대피소에 숨어 있다가 여러분이 떨어뜨린 '스마트' 폭탄에 살해당한 300명의 아이들처럼 그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 그날 공습으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고, 벽에 몰려있던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형체도 없이 타버렸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승리를 기념하던 그 순간에, 제가 바로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는 어쩌면 바그다드 어린이 병원의 죽음의 병실에 있는 알리 파이잘처럼 천천히 죽어가게 될 겁니다. 알리는 걸프전에서 사용한 열화 우라늄탄 때문에 악성 림프종이라는 암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는 18개월 된 무스타파처럼 '모래파리'라는 기생충이 장기를 갉아먹는 병에 걸려서 손을 써 볼 수도 없이 그저 고통스럽게 죽어갈 겁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무스타파는 단돈 25달라 밖에 안되는 약만 있으면 완전히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는 살만 모하메드처럼 심리적 외상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살만은 1991년 이라크 폭격당시 여동생과 함께 살아났지만 아직도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만의 아버지는 온 가족을 한 방에서 함께 자게 했습니다. 모두 다 살든가 아니면 같이 죽고 싶어서, 살만은 아직도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악몽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여러분의 아이들이거나 아니면 조카나 이웃집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이들이 사지가 절단되어서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고, 무기력하다고 생각해 보세요.여러분의 딸이 무너진 건물의 돌더미에 깔려 울부짖고 있는데 구해줄 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이들이 자기 눈앞에서 여러분이 죽는 걸 보고 나서, 굶주린 채로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는 세계의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는 그 결과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목소리는 너무 작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를 때 두렵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우리의 미래를 훔치려 할 때 화가 납니다. 우리는 내일도 엄마와 아빠가 살아 있기만을 바랄 때 슬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를 때 혼란스럽습니다.

바로 이 아이의 호소가 오늘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되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찌해서든 빨리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거대한 노력들이 세계의 양심을 깨우고 있습니다. 전쟁 종결을 위한 방법론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인류 공통의 아-멘이 새롭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 무엇은 우리 각각의 성도들이 주님의 인도를 받았으면 합니다. 주께서 만일 성령의 음성으로 당신에게 반전 평화집회의 참여를 명하시거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누가 성령의 인도를 거스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중보기도를 명하시거든 그렇게 하십시오. 만일 그가 고통받는 그 땅의 백성들과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군인들을 위하여 금식기도를 명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우리가 분당 비전센터 입당을 하면서 드려지는 감사헌금은 이라크 난민들을 돕는 일에 쓰여졌으면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수습되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이라크 단기 평화선교단이 구성되어 상처받은 그들을 섬기기 위해 현장에 달려가는 행렬들을 보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의 방법론들을 비판하지 말고 무엇인가를 하십시오. 무엇이든 우리는 이라크의 이웃들에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먼 후일 우리는 이 인류의 재앙이 인류의 사랑의 학습장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섬김을 위해 우리 주께서 약한 자가 되어 이 세상에 오시사 약한 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십자가는 오늘날 가장 큰 사랑의 능력이 되어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진실로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약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여러분과 저도 진정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약한 자가 될 차례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연약함을 비관하지 마십시다. 오히려 우리들의 약함을 인하여 주께 달려오십시오. 강한 자이셨으나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약한 자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약함을 대신 담당하신 주, 그래서 진정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도우실수 있는 그를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강함이라고 고백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부끄러워했던 모든 것들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바로 이런 약함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게 된 것을 오히려 자랑하는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 7절에서 바울 사도는 주께서 육체의 가시를 자기에게 허용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2. 바울이 체험한 여러 계시 중 본문에서 자랑거리로 생각했지만 자랑을 절제한 계시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가 절제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참고:고린도후서 12:1-4)

3. 바울이 본문에서(5절, 9절)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4. 바울이 자신의 인생의 고난을 극복한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고린도후서 1:4-10을 읽고 요약해 보십시오.

5. 자랑에 대한 자신의 습관을 나누어 보고 그리스도인다운 자랑의 태도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참고:고린도후서 1: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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