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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 (마 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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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긍휼(矜恤)이란 무엇인가
팔복 가운데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복, 즉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애통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은 모두 내가 잘되는 복이요, 내 심령을 위한 복이요, 나를 위한 복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섯째 복부터는 남을 향하여 사랑을 베풂으로써 받게 되는 복입니다. 네 가지 복은 나를 위한 말씀이지만 다섯째 복부터는 자기 완성에 이른 성도가 이웃을 향하여 어떻게 살아야 복이 있느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긍휼은 헬라어 원어로 λεο “엘레오스”로서
① 자비, 불쌍히 여기다. 친절하다는 뜻으로 동점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괴로워는 마음.
② 형벌 받아 마땅한 자에게 형벌을 면제시켜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신실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말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이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긍휼이란 말은 하나님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의 긍휼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시면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 긍휼의 뜻을 깊이 생각해 보면 내리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죽을 수 밖에 없고 징계받아야 하며 멸망 받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용서함을 얻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이하에 예수님이 참된 이웃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험한 여리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물건 다 빼앗기고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이 지나 갑니다. 레위 사람도 그냥 지나갑니다.
이 두사람이 그냥 지나친 것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과는 원수 지간이요, 별로 관계가 없는 별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매 불쌍히 여겨 긍휼히 여겨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에 데려 갔습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강도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인 것을 가르쳐 주는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즉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세상 강도를 만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큰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죄많은 모습입니까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오셔서 베풀어 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나의 죄상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처절했던 죄인입니까 탕자처럼 아버지 품을 떠나 내고집대로 내 쾌락 내 환란대로 산 내모습입니다. 요나처럼 순종하지 못하고 내 뜻대로 살던 내모습입니다. 고멜처럼 음탕하기 그지 없이 육체의 욕구와 욕망따라 살아가던 내모습입니다.
멸망받을 우리입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허덕이는 우리입니다. 영원히 죽어 지옥의 고통속에 빠져야 할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변하기 잘하는 우리에게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조건없이 무한히 부어주셨고 사망과 저주속에 멸망받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랑입니까 얼마나 크신 긍휼함입니까 바로 긍휼함을 무한대로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산 소망이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받고도 평강과 평안케 합니다. 시험 받을때에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위로가 되시어 참 기쁨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3. 긍휼함을 받은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의 생각과 그가 느끼는 감정과 그의 경험속에 들어가서 동참하면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낮은 자리에 있는 그에게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감상적인 동정이 아닙니다. 내가 그와 같은 처지로 내려와서 함께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도 강도만난 사람과 제사장, 레위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제상장이나, 레위사람이 지나가면서 강도만난 사람을 본 순간에 측은함과 동정은 느꼈지만 그의 어려운 처지에 함께 동참하고 그 처지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김과 동시에 나귀에서 내려와 그를 구하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느꼈을 때 그에게 내려가 다가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참 이웃이요,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② 대상과 처지와 자신의 입장과 관계없이 베푸는 긍휼입니다.
긍휼의 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강도만나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보면 유대인과의 지역감정이 커서 원수지간이요, 상종도 하지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관계 없습니다. 피투성이 된 사람의 신분이 누구냐 무엇하던 사람이냐 어느 지역 사람이냐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 에 대해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이익이 있는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더나아가서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머뭇거리게 됩니다.
유명한 어떤 사람의 일화가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의 처소에서 기도하고 난 뒤 말을 타고 일을 보러 가는데 웬 거지가 추위에 덜덜 떨며 구걸하는데 보니 온몸에 고름이 나고 얼굴이 문둥병에 일그러져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말에서 내려 “무엇을 원하느냐”하고 묻자 거지가 “너무 춥다”고 대답하자 자신도 추운데도 옷을 벗어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보면서 “옷을 입어도 추우니 어려운 부탁이지만 나를 좀 꼭 안아 주실 수 없습니까” 하며 요구합니다.
얼굴과 온 몸이 피고름에 더럽습니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의 문둥병입니다. 병이 옮습니다. 그러나 이것과 관계없이 이 거지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사라지며 음성이 들리는데 “네가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이제 알았노라”
나의 처지, 나의 손해, 나의 생각을 넘어서서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이 행동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③ 긍휼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동참해서 이해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이 나타납니다.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일곱 번씩 일흔번까지 용서하라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왕에게 일만달란트 빚진 자, 약속한 날이 와도 갚을 길이 없어 용서를 빌매 그 빚 전체를 다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 동관을 만나매 멱살을 붙잡고 빚 갚으라 호령합니다. 친구는 조금만 더 참아 달라 애원하니 그것에 아랑곳 없이 빚갚지 않는다해서 친구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못된 신하를 불러다 “악한 종아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서 네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불쌍한 네 친구의 조그만 빚도 탕감해 줄 수 없더냐”하고 책망하며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마18:35).
큰 긍휼 받은 우리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 못할 것이 없으니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④ 긍휼은 지식의 요소, 감정이 아니라 즉각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일만달란트 비유에서도 긍휼을 베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시면서 참된 이웃이 누구냐 제사장이냐, 레위사람이냐 누구인가 물을 때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명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들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 강하게 강조 되는 말씀입니다. 동정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따름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모든 행함에 있어서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⑤ 우리는 긍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푼 최상의 긍휼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긍휼은 내 이웃에게 전도로 나타납니다. 전도없는 긍휼은 인간적인 동정일 뿐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인정이 많아도 이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죽음 너머로 가는 긍휼은 내 이웃을 향하여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이웃에게 향하는 긍휼은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난하고 병든 자가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도 죽어서 천국 가면 됩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너무 슬퍼할 게 없습니다. 모두 다 가는 세상, 조금 먼저 가나 늦게 가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갑니다. 먼저 가도 천국 가면 그 사람은 잘 간 것이고, 나중에 가도 지옥에 가면 망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참으로 불쌍히 여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누가 불쌍한 자입니까 구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돌보아주는 규례를 두었습니다. 신명기 24장 19절로 21절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 보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야겠습니다. 객은 누구입니까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는 예나 오늘이나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집 없는 나그네들은 불쌍합니다. 생각하면 세상 집보다 하나님의 집이 없는 나그네 인생이 누구이겠습니까 이들은 바로 불신자들입니다.
고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 자들이 고아입니다. 영혼의 고아입니다. 영혼의 고아들은 죽음의 밤이 올 때 갈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과부가 누구입니까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과부입니다. 예수 신랑이 없는 사람이 과부입니다. 혼인잔치날에 예수 시날이 없는 자가 과부인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과부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객과 과부들에게 주어야 할 양식은 무엇이며, 감람유와 포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의 양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성령의 기름이 아니겠습니까 불쌍한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사랑의 손을 펴야 합니다. 저들에게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복음이 없기 때문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생명의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으며(암8:11) 무서운 마귀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에게서 긍휼을 입은 복음의 사랑이 있다면 저 불쌍한 자들에게 복음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입은 긍휼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 긍휼을 베푼 자는 긍휼히 여기는 복을 받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각각 형제를 용서하면 천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리라”, “주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심었기에 하나님께 긍휼함을 열매의 복으로 얻습니다.
용서를 심었기에 하나님께 용서받음의 열매를 복으로 얻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고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진 것으로 긍휼을 베풀기에는 너무 빈약합니다. 우리가 받은 긍휼인 복음을 주는 것이 최상의 긍휼입니다. 이 복음을 주지 않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9:16).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 한 사람도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을 주어 긍휼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의 복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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