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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뻐하기 위해서는 슬퍼해야 합니다 (요 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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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 전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가운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책은 루게릭이라는 병에 걸려 전신이 마비된 채로 하루하루 죽어 가는 유대인 노교수 모리 슈워츠와 옛날 제자였던 지금은 잘 나가는 스포츠 기자 미치가 매주 화요일에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감동적인 것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드리는 노 교수의 여유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농담을 할수 있을 만큼 영혼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노 교수가 제자에게 자기가 묻힐 곳을 골랐다고 말하자, 제자는 어딘데요하고 묻습니다. 여기서 멀지않아. 언덕 위의 나무 밑이야.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곳. 굉장히 평화로운 곳이지. 생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지. 제자는 거기서도 생각하며 지내실 계획이세요하고 다시 묻습니다. 아니야, 거기선 죽어지낼 계획이라네.-모리 교수의 친구 랍비 알 엑슬라드에게는 자신의 장례식 집례를 부탁하며 화장을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조크를 합니다. 날 너무 오래 태우지 않는지 자네가 꼭 확인해 주게나 그리고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습니다. 그는 죽음을 미소로 받아드리고 싶어한 것입니다.

저는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드리며 죽음의 슬픔 앞에서 기쁨을 가르친 또 한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늘본문의 배경은 소위 십자가의 사건을 앞두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죽음으로 작별할 것을 아시고 이제 그의 죽음을 암시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의 죽음을 인하여 슬퍼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순간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는 당신의 최후의 시간 당신이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슬픔이 기쁨이 되는 또 하나의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기쁨을 위하여 슬픔을 받아드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뻐하기 위해서는 슬퍼할줄 알아야 한다고.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인의 슬픔에는 특별한 유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슬픔속에서도 기뻐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슬픔 속에서도 기뻐해야 할 이유-무엇 때문입니까

1. 슬픔은 하나님의 섭리를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고난주간에 들어섭니다. 고난은 슬픔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고난은 슬픔이셨습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시며 내 영혼이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스승이신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슬픔이었습니다. 그는 당신의 제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20절에서 너희가 곡하고 애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1절과 22절에서는 근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과 제자들이 이 슬픔에 눌리지 아니하고 이 슬픔을 극복하고 마침내 기뻐하게 되시기를 소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우리 주님은 이런 슬픔을 극복하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수용이었다고 믿습니다. 이 다가오는 슬픔과 고난속에 하나님의 뜻이 계신 것을 알고 믿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의 깊어가는 밤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십자가의 고난이 인류의 구원을 성취함을 아셨을때에 그는 이 십자가의 고난을 기쁨으로 견딜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께서 본문21절의 말씀을 하실때에 정확하게 주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임산부가 고통을 견디는 비밀은 단 하나입니다. 생명을 낳을 것에 대한 창조적인 기대인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이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의미있는 창조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믿을수만 있다면 견딜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산부가 견디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말입니다. 로마서8:28의 약속을 기억하지 않으시는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다면 여러분과 제가 경험하는 오늘의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슬프고 고통스러워도 우리는 믿을수 있어야 합니다. 이 슬픔에는, 고통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견디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내게 이루어질 좋은 결과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머잖아 우리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2. 슬픔은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앞에 슬퍼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죽음을 슬퍼할까요 죽음이 동반하는 고통 때문일까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가져다 주는 가장 큰 슬픔은 관계의 단절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죽음의 슬픔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이 그것을 약속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여기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명백히 자신의 부활사건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의 약속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죽음과 고통을 극복하는 소망의 원천이 아닙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르치면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없는 다른이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합니다.(살전4:13)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인사에는 GOOD BYE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앞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슬픔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시간 전에도 찾아와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임재로 우리는 오늘의 슬픔을 또한 기쁨으로 바꿀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만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당하는 슬픔의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슬픔 당하고 고통당하는 당신의 자녀들 곁에 다가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두신 그의 생애의 가장 외롭고 슬픈 시간에 이 약속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요한16:32의 말씀을 보십시오.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은 비단 주님만이 누리시는 약속이 아니라, 주의 제자들인 우리도 동일하게 누릴수 있는 약속인 것입니다. 33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를 지으시고 만유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픔속에서도 기뻐할수 있는 이유-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슬픔은 하나님의 응답을 선물하기 때문입니다.

극한상황의 슬픔속에서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절망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슬픔속에서 당연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기도를 잊고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속에서 우리는 잃었던 기도를 다시 찾습니다. 우리는 무릎꿇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체험합니다. 16절에 '그날'은 우리가 기도를 다시 찾은 그날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주 부활의 날입니다. 살아계신 주님 그분만이 내 소망임을 깨닫고 그분에게 나아간 그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주께서 지상에 함께 하실 때 언제나 그에게 나아가 그의 도움을 구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이제는 어떻게 그의 도움을 받을수 있는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께서 친히 그때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 땅에 계실때와 동일하게 응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슬픔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슬픔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기도응답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선물받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슬픔을 넘어서서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슬픔속에 절망하지 마십시다. 슬픔속에 기도하는 자가 되십시다. 그리고 기도응답의 기쁨을 경험하고 일어서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리아 함께한 화요일에는 모리 교수의 '나이트 라인'의 앵커맨 테드 카플과의 마지막 대화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모리 교수는 그의 투병생활의 마지막 심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테드,이 병은 내 육체뿐 아니라 내 영혼까지 공격하고 있어요. 그러나 난 이 병이 내 영혼을 절대로 잡아먹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테드 카플이 묻습니다. 잘 하실겁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영혼의 힘을 어디서 얻으십니까 이때 모리교수는 자신의 모든 기력을 상실한 가운데서도 다시 특유의 유머로 이런 대답을 합니다. 저 위에 있는 분하고 늘 협상을 하지요. 날 도와 달라고. 그리고 내게 천사자리 하나라도 내게 예비해 주시라고요. 그의 여유, 그의 유머는 바로 그의 기도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도처럼 평화속에 눈을 감았습니다. 화요일이었습니다. 그가 제자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가운데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난 이제 죽음과 화해한 것 같다고. 죽음과 화해한 사람은 삶과도 화해할수 있는 거라고.-난 이제 죽음을 기뻐할수 있겠다고.

그렇습니다. 참으로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슬퍼할줄 아는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슬픔을 받아드릴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슬픔을 넘어설줄 알아야 합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가르쳐 '슬픔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슬픔의 사람이 되신 이유-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슬픔의 원인이었던 우리의 죄를 질머지시고 십자가에 가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사야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61:3)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계절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위해 우리의 슬픔을 질머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그분 앞에 나아와 우리의 모든 슬픔을 내려놓고 기도하시며 내게 오늘도 여전히 다가오시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도응답의 기쁨을 누리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각 가정에서 경험된 해산의 고통과 기쁨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2.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애통(고통)과 기쁨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3.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가져온 기쁨들은 무엇이었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4. 각자의 고통의 환경에서 체험한 기도응답의 기쁨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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