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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입니다 (막 14:6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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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는-이다」(I am)라고 일곱 가지 로 자신을 계시(啓示)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일곱 가지 의 자기 계시 선언 이외에도, 예수님이 간접적으로 자신을 밝히신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사흘 동안에 자신에 대해 밝히신 세 부분이 있는데, 가룟 유다와 빌라 도와 가야바의 반응이 각각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예수님의 「나는-이다」라는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권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이 땅에서와 영원한 세상 에서 우리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응답의 문제는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이 자신 을 우리에게 보이실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응답을 해야만 합 니다.

가룟 유다와 빌라도와 가야바는, 예수께서 하나님 되심의 권위를 주장하셨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반응 속에서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 는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세 경우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예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유다의 반응 요한복음 18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1절).

이 구절에서 동산은 겟세마네 동산을 가리킵니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 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2-5절).

이 말씀을 얼른 읽으면, 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만나 잡아갔다는 정도로만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을 좀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는 밤이어서, 등(燈)과 홰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을 쉽게 알아보 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를 찾소.』 이때 예수께서 권위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로라(I AM).

이 내로라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나다라고 하는 말처럼 대단 히 평범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당당한 대답입 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정체를 나타내신 이 말씀 앞에서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 러지는지라.

이것은 보통의 반응이 아닙니다. 땅에 사정없이 엎드러질 정도로 기절초풍하는 장면입니다. 도대체 그 말씀이 그리도 대단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내로라는 말은 희랍어 성경에서 에고 에이미(Δβ´ψ δ θλθ)라는 두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I am이 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만 쓰여지던 단어 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 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어서 있는 자다(「I AM」 THAT I AM)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때 쓰인 I AM의 표현을 지금 예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어디 있소? 이때 예수님이 그냥 내가 여기 있다 정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인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러니까 이들이 깜짝 놀라 몸둘 바를 모르고 땅에 엎드러진 것입니 다.

나는 야훼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선언입니다.

 유다의 배신감 지금 유다는 왜 이 동산까지 올라왔습니까?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돈에 대한 욕심도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돈 때문만 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동기는 아마 자기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본래 가룟 유다는 셀롯인 출신으로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족주의자입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에, 그 민족을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삼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를 살피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8장에 이르기까 지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기대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그 리고 그 속에서 가룟 유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분이 죽은 사람을 살리시다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 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부터 예수께서 물로 포 도주를 만들고 병자를 고치는 등의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을 보아 왔고, 그분이 메시야일 것이라는 기대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 로의 부활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모든 열망을 결정적으로 부풀어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0절부터 보십시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절).

살아난 나사로를 죽일려고 모의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절).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그 당시 사람들에 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12절부터는 장면이 바뀝니다. 이른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入 城) 사건입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 다 함을 듣고(12절).

무리들이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 다음에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그냥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죽은 사람을 살리신 자로서 예루살렘에 오시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배경 을 오늘의 현실로 옮겨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쇼가 아니라,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리신 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신 다면 교회가 미어 터지도록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왔습 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 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 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16, 17절).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연결되고 있 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할 때 이스라 엘의 왕이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가 들 어 있는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압제 하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생활을 했듯이 말입니 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 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열심당원을 포함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도 그분께 당연히 정치적인 회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피끓는 열심당원이었던 유다의 마음 속에도 정치적인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세주로서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 들이 요구하는 메시야는 구세주가 아니라 혁명가였습니다. 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자기 민족을 그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인 메시 야, 정치적인 혁명가를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높았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이스라엘의 정치 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군중들은 애국심에 불타 있었고 정치적인 메시야가 불만 당기면, 금새 사방 으로 쏟아져나가 목청껏 만세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 그런 판이었습 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기회를 무너뜨리셨습니다. 민족의 영웅 이 될 정치적 메시야의 길을 가시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부각시키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 그러나 그분은 민중 봉기에 의한 혁명가의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세주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선동된 사람들의 응집된 힘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시려 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그러더니 자신의 목 숨을 십자가에서 힘없이 내어 놓았습니다.

 이 사건에서 매우 실망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열심당원 출신의 사람들이 더 낙심했을 것입 니다. 시므온도 그랬겠지만, 가룟 유다는 더욱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정치적 메시야 상에 계속 연연해 있 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모두들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 사도행전 1장 6절에 무명(無名)의 한 제자가 주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우리는 이 말에서 그때는 안 하셨지만, 지금이야말로 진짜 찬스 가 왔어. 부활하신 그분이 이제는 정말 뭔가를 하시겠지라는, 정치적 메시야 상에 대해 끈끈하고도 집요한 기대가 제자들에게 여 전히 팽배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내 그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하여간 가룟 유다는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버 리지 않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여호와라면 이 민족을 이 수치와 굴욕에서 해방하셔야 합 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한 민족 해방의 꿈은 멀어져만 갔습니다. 치밀어오르는 배신감을 억제키 어려웠으나, 아직은 실낱 같은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최후의 수 단을 쓰기로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팔자. 막바지의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혹시 비장의 카드를 던질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 정치가들과 흥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 로 군병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왔을 것입니다. 군병들이 묻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누구요?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로라!』(에고 에이미!)

이 얼마나 놀라운 기회입니까? 예수께서 한 번 더 분명하게 자신 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계시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생각한 대로,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 같습니다. 잠시 긴장하며 기대 가운데 숨을 죽입니다. 이제야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이 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은 순순히 잡혀가셨습니다. 혁명이 아닌 죽음의 길로 가버린 것입 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대하는 그 방법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특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지만 , 반드시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그 능력을 행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 도 역시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부수고 로마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모습만이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 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놀랍게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감 동시키며 세계를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약한 자로 오신 가장 강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십자군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힘으로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 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외적인 힘은 절대의 부패를 낳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기 원하셨습니다. 자신을 못박음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 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혈기 왕성한 민족주의자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운동권 출신 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말입니다.

 유다는 이 사건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다른 공관복음서에 는 그가 주님의 손등에 입맞추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 막 입맞춤을 하고 떠나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제자를 붙들고 야단치지 않습니다. 아마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아픔으로, 사랑했 던 제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했지만 이 마지막 기회 앞에서도 회개 하기를 거절했던 유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멸의 길을 선택하여 걸 어간 유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 들이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수 앞으로 달려오 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그분이 자신의 깨어진 꿈을 이루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의 여정 중에 그 꿈이 쉽 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돌연히 신(神)의 무의미를 선포하고 내팽 개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유다의 후손입니다. 당신 은 주님께 어떤 기대를 걸고 계십니까? 혹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유다와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빌라도의 반응 요한복음 18장에 기록된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를 들어보겠습니다 . 빌라도는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이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官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33,34 절).

예수님의 질문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 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 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 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 라(35,36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였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정치 왕국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 히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 신의 능력을 행사하기 원하셨다면, 그분은 이 로마 병정들과 빌라 도의 군대들을 능히 물리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37절).

내가 왕이니라(I am a king)는 예수님의 대답에는 I am이라는 선언이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이 전제하신 것처럼, 이 왕은 이 땅의 정치가들이 자리를 탐하는 세속 왕국(kingdom)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왕국, 즉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 사랑의 원리와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고 확장되어 가고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예 수께서는 내가 그 나라의 왕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 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 니 바라바는 강도러라(38-40절).

빌라도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적어도 예수님 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마침내 십자가에 넘겨주기로 결정한 데는 나름대로의 원인 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도의 인기 영합 빌라도는 시류(時流)에 편승하고 인기에 영합하여 인생을 살던 사 람입니다. 즉, 확고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철학을 빌려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군중들의 박수 갈채에 도취하고, 무엇이 옳든 간에 그들을 기쁘게 하는 일 이 정치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고 그리스도 자신이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이유 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고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 가 무엇이겠습니까? 놀랍게도 빌라도와 똑같은 이유로 주님을 거절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할지 몰라.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질지 몰라.

그들은 빌라도의 후예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가야바의 반응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47절).

나사로가 부활한 후의 사건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단순한 종교인들이 아닙니다. 특별히 대제사장들은 막 강한 정치적 힘을 행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가들은 나라를 올바로 이끌어가야 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라를 혼란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 정치가인 경우가 많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무엇인지를 이 야기하고 있었답니다. 먼저 의사가 말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직업은 의사다.

다른 친구들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 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으실 그때부터 수술이 있지 않았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건축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합니다.

아닐세,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세계를 설계하실 때부 터 건축업은 이미 있었네.

깊은 사색(思索)에 잠겨 있던 철학자가 무겁게 입을 열며 말합니 다.

자네도 모르는 말일세. 성경에 보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땅 이 혼돈했었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혼돈(chaos)이라는 철학적 인 관념이 존재했네.

그때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치가가 한바탕 웃으며 말합 니다.

아니, 이 사람들 여태 그걸 모르는가? 그 혼돈을 만드는 장본 인이 바로 우리 아닌가? 흐흐흐….

 대제사장들은 당시에 일종의 정치가들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48절) .

나사로가 살아난 후 주님의 인기는 그만큼 높았습니다. 그것 때문 에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던 사람이 바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

가야바가 등장하여 유명한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50절).

이 말은 우리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는 저 예수를 죽음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2절 이하를 보십시오.

또 그 민족만을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2,53절).

그러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 해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도 나사로의 부활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이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인 마가복음 14장으로 돌아갑니다.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 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60 절).

이 대제사장이 바로 가야바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는 그 마당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 가야바가 왜 너는 아 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1절).

예수님의 무거운 침묵입니다. 그는 자신을 구태여 변호하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십자가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 변명해야 할 아무런 필요를 느끼 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치밀하게 각본 을 짜 놓았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단서는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 다. 그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맹점(盲點)이었습니다. 증거가 없으 면 재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기 위해 이렇게 되묻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입니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입니다. 찬송받을 자,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찬송과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가야바는 제발 이 말에 대답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며 묻는 것입 니다. 그래서 만약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면, 영락없이 신성 모독죄로 몰아부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람하도다라는 무 서운 선언이 그들에게서 내려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 모든 것 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 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62 절).

여기에 다시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내가 그니라(에고 에이미 !).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선언을 다시 한번 하시고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은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 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 구하리요(63절).

인간으로서 범할 수 있는 최대의 범죄가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이 라고 선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최대의 범죄입니다. 이것은 가장 끔찍한 죄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 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이런 결과가 올 줄을 뻔히 알고 계셨을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 라고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를 분명히 보시면서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시고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 니다.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 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 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64,65절).

예수님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이 저주를 받고 계십니다.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이 이 제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모욕과 무시와 거절을 당하고 계신 것입 니다. 사람들의 조롱감이 되어서 그들 앞에서 치욕을 받고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가야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야바의 기득권 수호 가룟 유다는 주님에게서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배신감에 사로잡혔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선언과 그 권위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지 못 했습니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인기를 위 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고 말았던 것 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밝히는 이 엄청난 선언의 순 간에도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그분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신 성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잘 알았으면서도, 가야바는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바치기를 거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한복음 11장과 관련시켜서 왜 가야바가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 후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로 그분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습 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인기가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에도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권력 유지가 불가능해지리 라는 두려움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자,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께서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앞에 굴복하기 보다는 그분을 죽이기로 음모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가야바와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가야바의 모습을 찾 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으면 손해본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모든 것에서 바보 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기득권의 이해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외면하는 가야바의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 야 합니다.

 적용

나다! I AM! 에고 에이미!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하나님 되심과,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고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룟 유다, 빌라도, 가야바의 반응 은 과거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복음 가운데 선포되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세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위치가 흔들릴까봐 또는 손해를 입을까봐 그분을 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 슬픈 것은,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빌라도처럼 사람들에게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의 올무에 매여 죄악의 탁류 속을 헤매느라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가룟 유다처럼 자기의 꿈을 성취하려 했다가, 자 기 생각대로 안 되자 배신감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판 유다의 후예 들은, 오늘 우리의 거리에서도 별로 낯선 얼굴들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당신 앞에 다가오시며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보 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그냥 예수님이라고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 님! 심판자이신 그 하나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면 그리고 당신이 그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 안에서 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이 순간 그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나! 나는 그분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 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분은 사랑 으로 받아주시고 놀라운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제 그분의 거 룩과 권위 앞에서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분이 영 원히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시고 사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이 신비, 이 놀라움, 이 경 이! 예수! 하나님!

예수님이 단순한 우리의 친구라면, 우리는 그분의 의견을 묵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존경받을 만한 단순한 스승 정도라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그 분 앞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적인 욕망과 이기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살았던 일 세기의 죄인들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여 당신 자신의 모습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환한 미소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항상 품 어주기 원하십니다. 지금 주님의 품에 안겨, 주님 안에 늘 거하 면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오, 주님! 제게 남아 있는 날 동안에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항상 인정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주 예수 께서 진정 저의 하나님이 되시고, 제 삶의 주장자가 되시길 원합 니다. 주께 순복하고 예배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인도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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