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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받고자 하기전에 먼저 드림을 배워야 합니다. (고후 0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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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훌륭한 예술가의 이름을 듣게 되면 한가지에만 열중하고 다른 인생의 영역에는 무관심하고 균형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을 우리는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오스트리아가 낳은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요 작곡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가 아닐까 합니다. 그는 본래 의학을 공부하고 미술에도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음악을 공부한 동기조차도 흥미롭습니다. 그 동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은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한 곡들을 작곡하고자 애썼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부자가 될수 있는 기회를 거절했던 음악가로도 유명합니다. 그것은 그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던 독특한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비싼 출연료를 받기를 거부했고 비싼 음식 대접받기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유분의 돈은 교회나 사회사업 기관에 아낌없이 헌금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을 언제나 최소화하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돈은 신이 자기에게 잠시 맡겨준 공적인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는 곳마다 따뜻한 인간미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예술가로서 흔하지 않은 인격적인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주는자로서 살고자 했지만 실상은 더 큰사랑과 존경을 받는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을 들으면서 그의 사랑의 실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의 결정에는 일반적으로 기대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기로 했을 때 신앙생활에의 입문을 통해 갖게 된 새로운 기대가 있습니다. 그 기대가운데는 명백하게 우리가 이제부터 '받을것'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고,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은혜를 받을것에 대한 기대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받을 것을 기대하기에 앞서서 드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받는자가 되기전에 먼저 드리는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의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 영적인 은사들을 자랑하면서도 신앙생활의 기본인 드리는 것을 아직도 배우지 못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늘의 본문에서 이 역설의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받고자 하기전에 먼저 드릴줄 알아야 한다고.

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1. 하나님의 모본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연보의 바른자세를 가르치고 기근당한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을 위한 연보에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동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일년전에 헌금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실행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경제적인 문제라기 보다도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고린도후서8:10-12의 말씀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그것이 일년전의 약속임을 상기시킵니다. 11절에는 이제는 그 약속을 실행하라고 권면합니다. 12절에서는 할 마음만 있으면 할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이 이런 연보에 동참해야 할 결론적인 이유로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15절 말씀입니다. 말할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놀라운 은혜의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는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마지막 구절은 바울사도가 이미 고린도후서8:9에서 말씀한바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얼마나 부요하신 분이십니까 그러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자신은 가난해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서 가난한자가 되어 머리 둘곳이 없는 삶을 사시다가 마지막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의 은혜로 오늘의 우리가 구원받고 사랑받고 감사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인되신 그분에게서 내어 주는 삶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만드셨다. 줄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늘은 축복을 내린다./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셨다. 줄수 있도록. 그리하여 태양은 따사로이 우리를 지킨다./하나님은 달을 만드셨다. 줄수 있도록. 그래서 달은 우리가 가는 밤길을 은은히 비쳐준다./하나님은 공기를 만드셨다. 줄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는 이 공기를 호흡한다./하나님은 땅을 만드셨다. 줄수 있도록. 그리하여 땅은 모든 열매를 제공한다./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 줄수 있도록. 그러나 인간은시는 여기서 끝납니다. 오직 인간만이 아직도 주는 것을, 드리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이기심을 깨트리고 주는 자가 드리는 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자.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이유-하나님이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는 자식이 부모의 장점을 닮아갈 때 마음에 큰 희열이 있습니다. 부모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더 큰 희열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가 아니시겠습니까 자녀된 우리가 주는자의 삶을 사는 것을 보면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즐겨 내는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7절)그러나 만일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도 억지로 혹은 인색함으로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나는 내 아들도 너에게 주었는데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헌금의 인색함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앞에 깨어지지 못한 이기심의 증거일지 모릅니다. 30년이상 목회를 하다 보니까 목회추억가운데 가끔씩 잊어버리기 어려운 인상적인 장면이 되살아 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처음 목회실습을 하던 시골교회에서의 일입니다. 처음 전도 받아 나오신 과부되어 혼자 살며 자녀들을 키우신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는데 부흥회 끝나는 날 헌금시간에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모습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분은 그 마을에서 별명이 노랭이였습니다. 악착같이 일해서 한푼이라도 아끼면서 자식들 키우면서 살아온 이 분은 좀처럼 동네행사에도 돈 한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은혜받고 처음 헌금하면서 지금 울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이 분은 돈이 아닌 자신을 깨트려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에 인색한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식들을 위해 돈을 쓸 때 인색합니까 더 쓰지 못해 안타까운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헌신-왜 그렇습니까 자식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면 주기를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하는 곳에서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헌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자들에 대한 두가지의 약속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 약속은, 헌금은 드림에서 끝나지 않고 더 큰 축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라고도 말합니다. 헌금으로 심고 축복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두게 하시는 이유는 8절에서 설명됩니다. 한마디로 더 착한일 많이 하라고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약속은, 인격적인 성숙의 열매입니다. 헌금행위를 통해 우리가 의로운 인격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일에 헌신함으로 의로운 인격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9-10절의 약속입니다. 이 두가지 약속은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도 경험할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조금 성장하며 부모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부모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날 자식에게 선물을 받습니다. 선물 받으시면 부모의 마음은 어떤 심정입니까 이 사랑스런 자식에게 더 주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자식은 부모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고 더 큰 축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받기위해 우리는 먼저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드림을 통해 부모가 자랑스러워 할 우리의 인격적인 성장이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림이 중요합니다. 드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림이 중요한 이유-무엇 때문입니까

3. 하나님의 사역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의 본문 12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연보행위를 가르쳐 봉사의 직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수 있습니다. 몸으로 봉사할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은사로 봉사할수 있습니다. 또 하나가 헌금으로 봉사할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봉사는 사역을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는 순간 동시에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제 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구원받도록 복음사역에 쓰임받기 위해 구원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자신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재능을 드려야 합니다. 시간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연보행위를 봉사의 '직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직무'라는 단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헌금을 의무의 차원에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이 직무를 신실하게 실천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에 순종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13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역들이 진전되지 못하는 가장 실제적인 이유는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인들이 헌금생활에 헌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헌신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우리의 불규칙한 헌금은 우리의 불규칙한 헌신의 표시입니다. 우리의 형식적인 헌금은 우리의 헌신이 형식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없는 최소의 헌금은 우리의 헌신이 희생을 거부하는 최소의 체면치레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헌금없는 신앙생활은 우리가 헌신없이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위선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열악했던 환경속에서 복음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던 우리의 선배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의 헌신의 차례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희생이 없는 헌금, 희생이 없는 헌신은 헌신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의 세계적인 복음의 사역이 가능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의 서두에서 음악가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가지만 더 하고자 합니다. 한번은 그의 연주가 끝난 후 한 음악도 젊은이가 그의 손을 잡고 훌륭한 연주를 치하하면서 저도 선생님처럼만 연주할 수 있다면 제 자신을 기꺼이 바칠터인데요 했더니 이런 대답을 남겼다고 합니다. 네, 오늘의 저의 연주는 지금까지 제 자신을 바친 결과이지요. 그렇지만 친구여, 나는 당신이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왜 무엇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지를 잊지말기를 바랍니다. 그는 헌신의 소명과 목적을 상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목적을 망각한채 이유도 모르고 공부하고 일하고 돈 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음악으로 음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쳤고, 재능을 바쳤고, 노력을 바쳤고, 정성을 바쳤고, 물질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 소중한 음악가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까

<설교 적용 질문>

1. 바울 사도가 본문을 기록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2. 15절의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8:9의 말씀과 비교하여 대답하시고, 그것이 헌금 정신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말해 보십시오.

3. 6-7, 13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태도를 말해 보십시오.

4. 8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5. 각자의 헌금생활의 어려움이나 축복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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