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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있는 눈 (엡 0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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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아온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유일하게 앞을 못보는 소경 한 분 이 계십니다.

그 분이 말한대로,또한 제가 잠깐 옆에서 지켜본바에 의하면 너무나 행복한 한 가정의 주부인 여자집사님입니다.

소경이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사랑하고 헌신해 주는 남편이 있고,아 주 귀엽고 똑똑한 한 아들을 가진 분입니다.

물론 소경은 되었지만 신앙을 통하여 모든 불행을 극복해 가면서 자 신의 재능을 따라 자신이 부른 찬송가 테잎을 제작하기도 하고 여러 교회에 간증도 하며 한 때는 앞을 못보는 상태에서 성가대 지휘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참 귀하고 아름다운 분으로 제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제 가슴에 찡한 여운을 주었던 그 분의 소경이 되었던 과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갑자기 어떤 사고로 시력을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백내장 이라는 병으로 조금씩 조금씩 시력을 잃어 버려갔던 것입니다. 점 점 시야에 보이는 것들이 희미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하며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히 사랑하는 나의 남편,그리고 그토록 귀중한 내 생명의 분신 인 아들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말입니다.

점점 어두움으로 묻혀져 가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 다시 볼 수 없다 는 안타까움속에서 너무나 귀중하게 사라져 가는 것들! 어느날 마지막 희미해져 가는 시력이 남아 있을 때,바로 자신과 같 은 처지에 있던 사람을 다룬 TV의 드라마를 가까이 마주보며 보다 가 결국은 TV를 껴안고 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를 본인의 입에서 들 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프게 져며오는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 다.

그리고 그 때처럼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볼 수있고,잘 보는 것이 복입니다.

 그 때 정말 실감한 것은 눈이 어둡다는 것은 모든 것이 어둡다는 것 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밤이 아닌 대낮이건만, 눈이 어두운 자에게는 여전히 밤입니다.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깔들이 현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렇게 선명한 웃음을 웃고 행복의 미소를 짖고 있건만 여전히 그것 은 어두움속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이렇게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는 것도 세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육안,지안,영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안은 육체의 눈을 통하여 보는 것이고, 지안은 지식의 눈으로서 지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시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까막눈이라고 합니다.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것은 글씨라는 정도이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깜깜한 것입니 다. 그러므로 지식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지안이 분명히 있는 것입 니다.

그리고 영안은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영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보는 것이고 영적인 세계의 질서를 알고, 아직은 현실에 나타나지 않았지만,믿 음을 통해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육안으로는 볼 수없는 영적인 세계가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후4:16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바울이 에배소교회를 향하여 한 기 도의 내용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이 영적인 눈이 떠지고 더 밝히 잘 볼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18절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랬습니다.

 밝혀서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가

저는 오늘 세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복이 있 는 눈은 이 세가지가 좋아야 합니다.

 1.멀리 볼 수 있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눈을 밝혀서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볼 수 있어야 하는가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그 소망,아직 나타나고 우리에게 있지는 않 지만 미래에 우리에게 놓여진 그 소망을 확실히 바라보며 나갈 수 있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멀리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망원경이라는 것을 사용해서라도 볼려고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엄청나게 멀리있는 별들의 세계까지 바 라봅니다.

지적인 면에서도,좀 멀리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바둑이나,장귀도 몇수앞을 내다볼 수 있는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 고,급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공부하고 역사를 배우고 하는 것도 앞으로 되어질 사건 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관점을 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치도 그렇고,장사도 그렇고 앞을 잘 내다보는 사람이 성공을 합니 다.

이번에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민주당,국민당에서는 패인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선거전에 일어난 몇가지 사건들이 선거에 호재가 될 것 인지,악재가 될 것인지를 미리 보지 못한데서 오는 요인도 많이 있 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당은 다른 당과 당대당 통합을 선언해 놓았었으나 이제 그것이 오히려 선거에 악재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어서 이제는 솔직 하게 실수였다고 하면서 취소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앞에 있는 현실적인 것만 바라보기에 급급합니다.그러 니까,쉽게 실수하고,쉽고 슬퍼하거나 쉽게 낙관하게 됩니다. 좀 더 묵묵하게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실패했지만,그것이 큰 약이 되어 멀리 바라보면 너무나 귀중한 디딤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들을 키울 때도 좀 멀리 바라보며 키워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 금 다 잘해주고 공부하는 것도 일일히 간섭하여 열심히 지도해 주 고 항상 성공하고 하는 것이 무조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미래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오늘 조금 실패하고,조금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스스로 자립 하고 어려움과 싸워나가며,인생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겸허해질 수 있는 그것이 오히려 먼 안목으로 볼 때,아이들 에게 귀중한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해달라는 것 다 잘 해주었다고 좋은 부모가 되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서울에서 오신 분들의 말을 들으면 그렇게 해줄 수 있었던 장관의 자녀들,교수의 자녀들,유수한 사업가의 자녀들이 온갖 방탕과 타락 의 몸짖으로 압구정동,강남의 거리들을 휩쓸고 지나다닌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멀리 볼 수 있는 눈이 복된 눈입니다.

특히 신앙의 눈은 더욱 멀리 보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이 눈감고 보기 싫어 하는 죽음 늘 바라봅니다.

죽음후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도 늘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니,심판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 총도 바라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에서 그쳐야 하는 인생의 한계에 서 오는 절망을 극복할 수 있고, 죽음이면에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 에 대한 부르심의 소망에 닻을 달고 오늘을 행진할 수 있는 것입니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기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왜,부르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 은 자들에게는! 여기에 그 부르심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소망을 바라보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빌3:14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멀리 소망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금방 지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멀리 소망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눈앞의 상황에 따라 갈지자 걸음 을 걸으며 곁길로 가기가 쉽습니다.

멀리 부르심의 소망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와 상황이 무었인지를 보르고 방황하기가 쉽습니다.

 주여! 내 삶의 어느 위치에 있든지 멀리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복있는 눈을 주옵소서! 기도하십시오.

 2.복있는 눈은 속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18절에,'성도안에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안을 볼 수 있는 눈이 복됩니다.

벌과 나비는 아카시아와 메밀꽃 속에 있는 꿀을 보고 그것을 얻습니 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해도 그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안 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보아도 외모로 보는 것보다는 그 중심을 볼 수 있는 눈이 필 요합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도 들으면서 그 안에 있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내면을 보고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미니는 학교에서는 자기 아들을 포기했지만,그 어머 니의 안목으로 자기의 아들에게 천재성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천재성을 개발시켜 주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좋은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1867년에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알래스카 땅을 그 당시 720만불 주고 샀습니다. 1에이커에 2센트씩 주고 산 것입니다. 지금 미국땅 의 1/5되는 엄청난 땅을 거져 주은 것입니다. 소련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버려진 쓸모없는 동토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그 안에 감취어진 엄청난 지하자원을 본 것입 니다.

지금 미국의 50개주에서 이 알래스카주가 가장 많은 개인소득을 올 리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속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안에 있는 즉 성도들 속에 있는 그 기업 의 영광의 풍성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후사로서 받는 기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속에 있음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상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속하실 것이 이미 우리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입니 다.그런데 그것은 영광스럽고,풍성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믿는 성도들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상속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보는 눈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3.가까운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복된 것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보기가 쉬운데 어쩌면 등잔밑이 어둡다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가장 잘 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가장 가까운 자기 자신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면,네눈에 있는 들보는 어찌하여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보는가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먼데 있는 사람은 잘 알 수가 있는데 자기 가까이 있는 사 람들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당하 는 사람이 많습니다.

 눈이 원시가 되면 점점 가까운 것을 못보아서 돋보기를 써야 되지 않습니까 가까운 것을 잘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9절에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가까이에서 함께 하시면서 크신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들어 쓰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세포보다도 더 가까이 계셔서 역사하고 계심 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 왕하6:10 도단성의 엘리사를 아람왕이 군대를 보내어 겹겹히 포위함.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밤에 가서 성을 에워쌈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 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 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이끌고 사마리아의 이스라엘왕에게로 감

기도하여서 보게 했습니다.

시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 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결론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승에 이런 말이 있읍니다. 어떤 장님이 길을 가는데 자기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힐까 하는 생각에 등불을 켜들 고 길을 떠났읍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 딪혀서 이마가 상했는데, 이 장님이 화가 나서 나는 장님이 니까 어쩔 수 없지만 자네는 왜 눈뜬 사람이 이 등불을 보고 도 왜 들이 받는가!하고 호통을 쳤읍니다. 그러자 저쪽에서 하는 말이 여보세요. 당신이 든 등불은 이미 꺼진지 오래 되었소라고 하더랍니다.

장님이 불쌍한 것은 빛을 못본다는 것 뿐이 아니라 어둠도 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읍니다. 소망만을 못보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실상 조차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오히려, 안목의 온갖 정욕에 눈멀고 세상지식에 눈멀고, 돈에 눈멀고, 질투와 원한에 눈멀고 불신앙에 눈먼 눈을 뜨고서 영안을 열어서 멀리 부르심의 소망을 보고, 성도안에 있는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을 보시고, 우리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께 하심을 늘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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