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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빛 (마 05:14-16)

첨부 1


누가 소금이며 누가 빛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약속이 이루어진 자만 이 소금이고 빛이다. 팔복은 새 언약의 성취 여정(旅程)임은 그동안 살펴본 바 대로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의미파악을 옳게 하기 힘들다. 아무든지 예수 만 믿으면 이제 소금이고 빛이므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야한다는 것은 억지이 다. 왜냐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은 그런다고 된다거나, 혹은 세상의 그 무엇 이 곧바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하겠다고 설쳐대면 댈수록 세상은 더욱더 어지럽게 되고 혼돈의 와중 으로 떨어지게 된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율법적 행위로 하겠다는 시도는 무 엇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기에 그 자체가 혼돈이요 어두움인 것이다.

팔복의 모든 과정들을 되짚어 보라.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부숴뜨리지 않 는 곳이 있었던가 어떻게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어두움의 음 침한 터널을 지나고 흑암의 모든 요소가 더불어 못박혀 버리지 않으면 빛되신 그리스도와는 한몸을 이루기가 도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너희가 소금이라는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의 그 모든 풍요와의 결별을 선언함 일 뿐만 아니라 그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그럴때 비로소 소금인 것이다. 소금 아닌 것이 소금이라고 주장하고 확신하고 그러한 행위를 하려 고 한다고 해서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 겠는가 소금이라는 신분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서 농사지음의 시초 가 되는, 능히 그의 자녀로서 발을 내딛는 삶의 시작이라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JUmei' ejste to; fw' tou' kovsmou) 할 때의 이 빛은 조금더 생 각해 보면 소금인 자가 비로소 빛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땅의 소금(to; ala th' gh')인 자만이 세상의 빛(to; fw' tou' kovsmou )이라는 것은 하나의 원리적인 사실이다. 손바닥만 있고 손등이 없을 수 없 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동시에 역으로도 성립된다. 손등만 있고 손바닥이 없 을 수 없다. 소금의 역할 따로, 빛의 역할 따로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인 것이 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알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다. 오늘날은 아예 설교자들에 의해 로마서 따로 야고보서 따로이다. 그래서 로마서와 야고보서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괴리 가 운데서 항상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언은 로마서的이요, 삶과 행 위는 로마서에서 철저히 고발하고 있는 행위를 야고보서의 말씀대로인양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것은 복음도 아니요, 그렇다고 철저한 율법 도 아닌 것이니 그야말로 철저한 혼돈일 뿐이다.

 어떻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는 선언이 가능한가 빛이 무엇인지는 요한복음이 잘 증언해주고 있다. 왜 빛이라고 하는지도 또 한 요한복음에 귀기울여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태초에(ejn ajrch'/) 말씀이(oJ lovgo) 계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zwh;) 있었으니(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hJ zw h; hn to fw' tw'n ajnqrwvpwn) (요 1:1-4)

ajrch'/(아르케)에는 oJ lovgo가 계시며 이 oJ lovgo(호 로고스)는 하나님 과 함께 계실 뿐더러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다. 만물로 하여금 만물되게 하는 근본이기에 그것은 빛이다. 자기의 근본됨이 무엇인지는 이 빛에 의해서만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두움인 세상이 이 빛을 빛으로 깨닫기란 그렇 게 간단하지가 않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katevlaben) (요 1:5)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 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9-11)

이것이 곧 빛과 어두움의 실상이다. 어두움의 생명은 어두움 그것이기 때문 에 빛을 자기의 생명이라 생각지 않는다. 빛을 영접하는 것은 자기 생명인 어두움을 잃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큰 불행은 종교가 발흥하는 때이다. 역사적으로 암흑기라고 일컫는 시대치고 종교가 위세를 떨치지 않은 때는 많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도 동일하다. 종교의 풍요를 만끽하는 동안은 빛이 필요 없다 . 왜냐하면 이미 자신은 빛을 영접했고 빛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새삼스럽게 빛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신사적 종교인의 모습을 갖추고 조직과 체제가 제시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빛의 자녀로서 손색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새삼스럽게 무슨 참빛이 필요한가 이미 참빛을 영접하고 그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데 .

이것이 바로 종교부흥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이것이 바로 빛이 세상에 비취되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교회생활과 빛을 영접하는 것은 전혀 별개일 수 있다. 사랑이 사랑의 장애물 이요, 찬송이 찬송의 장애물이요, 기도가 기도의 장애물이며 빛이 빛을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참빛이 무엇인지 알 기란 요원하다. 사실 빛(to; fw') 에 참(ajlhqinovn) 이라는 한정어 가 동반할 수 밖에 없음은 인간의 죄악과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는 선언은 가히 어떠한 상태인지 짐작이 갈 수 있으리라.

 이제까지 빛으로 여기고 자기 생명으로 여겨왔던 그 모든 가치의 체계가 어두 움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지 나고서야 비로소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이요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제까지 팔복의 과정에서 이루어져 왔던 약속 성취의 모습이 아니던 가 이러한 언약의 성취만이 세상(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자신을 주관하던 이 전의 본질적인 가치체계로서, 그것은 법적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성경에 서 질타하고 있는 인간본질의 종교적인 바리새적 속성 등을 지시하는 개념이 다)과 결별이 가능하고, 이제는 세상과 무관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빛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복은 또 다른 표현으로 빛의 영접 과정 이요 빛과 하나됨의,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는 선언이 가능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우들에게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 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ejn kurivw/)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안에서(ejn kurivw/) 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 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여기까지만 살펴보더라도 이제는 무엇이 그 리스도인지는 어느 정도 드러났으리라 여겨진다.

예수 자신이 자신을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 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라고 自證하면 서 이러한 自證根據를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요 8:14)라고 하고 있다.

바로 ajrch'/ 속에 있는 만물의 원리를, 우주의 진리를 스스로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선포가 가능하리라. 그리고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시 작 지점이 어디며 이르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렇게 걸어가셨기에 우리는 그를 주로 삼으며,그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다.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자. 마 5장 14절에서 16절까지는 매우 웅장하고도 완곡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번역문장에서는 그것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원문의 서술형태를 우리말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등불을 켜 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면 그것은 집안의 모든 이들에게 비추인다 . 이처럼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볼 수 있고 또한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를 영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사람들 앞에 너희의 빛이 비추이게 하라

번역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의미의 손상을 가져오고 있다. 5장 16절의 번역문 은 그야말로 지나치리만큼 주절과 종속절이 전도되어 있다. 또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는 애매한 표현이다. 너희는 빛인데, 그 빛이 어떠하다는 것을 간결하면서도 웅변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얼마나 분명한 말씀인가.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당시의 도시는 주로 언덕 위에 많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언덕위의 도시 는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눈에 띄게 마련이다. 무엇으로 가리운다거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빛 인 너희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등불 을 켜서 말아래 두는 법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정신나간 짓이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이다. 그렇듯 너희의 빛은 가리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 요 등불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이듯 비취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러 한 빛을 발함은 너희의 착한 행실(ta; kala; e[rga)이요 그를 보고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이 빛을 사람들이 무조건 즐거워 하거나 영접하지는 결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도덕적인 행위에 속하는 것이 라든지 사회의 부조리 척결 운동정도라면 환영받지 못할리가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모범적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됨과 참된 진리의 길을 말하는 것인 다음에야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함이요, 빛을 빛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요한복음 1장의 참빛을 세상이 깨닫지도 영 접지도 못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빛은 반드시 어두움의 청산을 동시에 요구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 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 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 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 게 하려 함이라 (빌 2:12-16)

빛은 사람의 근본됨을 알게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一喜一 悲하며 喜怒哀樂에 휩쓸려 사는 人生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그곳에 있다.

이 참빛을 교회 봉사나 전도나 그 잘나빠진 신앙적 행위들로 도덕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to;n patev ra uJmw'n to;n ejn toi' oujranoi')이 결코 아니다.

또 하나 속아서는 결코 안될 일이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할 때 무엇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지를 분명 히 알지 못하면 많은 이들을 속이고 우롱하는 짓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 있다 . 이것은 얼마든지 사람을 미혹할 수 있는 요소로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특 히 오늘날 더욱 그러하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니 의 나 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헛다리를 짚고 그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의 빛은 껍데기 예수를 가리켜 빛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아기가 누워있던 말구유가 아기일 수는 결코 없다. 어떻게 된일인지 이곳 저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니 어린 양이니 하는 자들이 출몰하고 있다. 그래서 나를 따르며 나의 말을 들어야만 구원인양 떠드는 이들도 종종 보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할 때 이 빛은 껍데기의 너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너희 속에 있는 너희 자신이 없어지고 그 안에 그와 하나가 되어진 그 어떤 것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하면 질그릇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너희가 세상의 빛 이라 고 할 수 있는 것은 너희라는 그릇 속에, 즉 어두움을 담고 있던 그 자 리에 너희 자신이던 그 어두움이 내어쫓기고(죽고) 빛이 자리했기 때문에 그 빛에 의해서 비로소 세상의 빛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 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빛을 담고 있는 질그릇을 보며 감탄하고 추종하 고 따르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는 그러한 인간의 죄악적 속성을 부숴뜨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던 것이다. 그 질그릇을 과감히 까부심으로 참빛인 그리 스도를 보지 못하고 예수만을 따르던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마침내 그리스도 를 발견케 하고 만나게 하는데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의 나 와 그리스도의 나 가 철저히 분리될 수 있을 때만 나는 세 상의 빛이라 는 자증적 진술이 가능하다. 더구나 그 가는 길과 마침내 잘못 보고 추종하는 세상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할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나는 빛이다 라는 自證은 참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나누 임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自證은 죽어야할 어두움이 죽음을 가장한채 웅크리고 앉아 왕노릇하고자 함이요 광명의 천사로 둔갑해 있는 모습에 불과 하다. 왜냐하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나는 빛 이라 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 다는 자가 내가-운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더욱 견 고히 살아 있음을 스스로 증거할 따름이다.

다만 그와 연합된 자들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고 指稱(지칭, designa tion)될 수 있을 뿐이며 진리의 삶을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살 뿐이다. 그럼 에도 自己가 누구인지 自己 認識은 분명하게 갖고 있다. 더불어 그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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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 (1469217 ) 산상수14(율법의 폐기와 이룸) 12/30 14:26 281 line

율법의 폐기와 이룸

마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 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산상수훈의 모든 것은 팔복의 내용에 담겨 있다. 팔복 성취자들의 존재 의미 와 역할은 5장 16절까지 함축적으로 충분히 언급되었다. 사실 이제부터는 5:1-16까지에 대한 주석적인 성격으로 보아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아니 본질 적인 골격은 이제까지의 내용이라면 그것에 대한 보충적인 부연설명이 17절부 터 전개되고 있고 또한 여러가지의 사례들을 통하여, 즉 부분으로 전체를 설 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본래성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부 분도 갑자기 돌출되어 설명되거나 등장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 성경 해석자 들이 한부분을 구분지어서 그 의미를 새기려 하기에 본문의 진정한 의미에 도 달하지 못한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본문의 경우도 그러한데 해 당된다고 보겠다. 지금까지 논의와는 별개로 갑자기 율법 문제를 들고 나오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시점에서는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 부분을 독립된 주제로 다루는 것이야말로 팔복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결코 예수께서 지금까지 대화의 화제를 전환시키 고 계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까지 팔복의 내용들을 반추해 보라.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 자들의 상태와 반응을 생각해 보라. 모름지기 팔복의 내용을 듣고 있는 제자 들은 적어도 유대주의 종교와 분위기속에 젖어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서 자연스러운() 종교적 삶은 유대전통의 율례와 규례에 따라서 모세의 법대 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복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 러한 세계관 내지 종교적 삶과는 정면으로 배치될 뿐더러 오히려 그러한 기존 의 틀을 철저히 깨트리고 있는 내용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로부터 의 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이전의 자신들, 또 는 종교인들의 종교적 상식과는 맞는 것이 없다. 도리어 그러한 것의 철저한 분쇄만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이르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에게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이것은 철저한 율법의 파 기요, 예수는 완전히 율법 폐기론자로 비추일 것이 당연할 터이다. 팔복의 내용을 들어보면 자칫 도대체 이가 누구이기에 율법을 폐하려 하는가라는 의 구심이 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마도 이 글을 읽어오던 독자들께서도 도대 체 이 글은 기존의 신앙체계를 완전히 부정하고 교회의 생활(전통적 종교생활-즉 기도, 구제, 성수주일, 십일조 등 성도로서의 기본적 의무조항) 전체를 철저히 파기하는 율법의 폐기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동일한 물음을 갖을 수도 있겠다.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것은 역사의 되풀이이며 성경에서도 그러한 염려는 오늘 본문의 기록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의구심어린 눈길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심중에 갖고 있는 오해를 일거에 물리치고 계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 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팔복의 내용은 얼핏 들으면 율법을 폐하는 내용인 줄로 착각(nomivshte)하기 에 꼭 알맞게 되어 있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것이 반드시 착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 율법적 모든 행위의 체계를 폐하는(katalu'sai) 내 용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율법을 폐하는 내용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언어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으니 율법을 폐하지 않으면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 장난을 하려는가 이것은 말 장난이 아니다. 아주 심각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정개념의 율법이 폐기되지 않으면 본래적 율 법의 의미가 드러날 수 없다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 문에 참된 율법 본래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짓된 율법은 폐기되지 않으 면 안된다. 필자가 거짓된 율법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 모든 이들에게서 그 것은 거짓된 율법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된 율법이다. 팔복 의 내용은 철저하게 이것을 깨뜨리고 무너뜨린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 고는 인간을 죄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을 뿐더러 율법의 본래적인 그것에로 들 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에서 그는 어떠한 율법은 철저히 폐하는 (katalu'sai) 자이며, 그러나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의 복귀 측면에서는 율법 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자가 아니라 이루려(plhrw'sai) 오신 분이다. 그러므 로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결코 율법이 나 선지자를 폐하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것을 충만케. 혹은 이루려(plhrw 'sai)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반율법주의자나 율법 폐기론자로 착각해 서는(nomivshte) 안 될 일이다.

반대로 율법을 완전케 하러오셨다고 해서 강화자(强化者)로 여겨서는 더더욱 곤란하다. 그러한 오해속에서 성경을 보게되는 경우 대부분 율법주의자가 아니면 반율법주의자가 되어 극단적인 대결 양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소위 율법주의자도 반율법주의자도 따지고 보면 동일한 틀의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율법주의적 요소와 반율법주의적 요소를 동시에 몸에 지 니고 혼돈과 갈등속에서 신앙생활한다. 이들도 같은 種에 불과하다.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깊이 고찰함으로 그러한 오해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 다. 5장 17절은 예수가 오신 이유와 목적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 이 아니고 도리어 완전케 또는 이루려-plhrovw의 의미는 완전케 보다는 충 만케(to fulfil) , 또는 이루다 의 의미에 더 가깝다-오셨음을 말씀하고 있다면 5장 18절은 왜 그러실 수 밖에 없는지, 그것의 必然性을 설명해 준다 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ga;r)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천지가 없어지기까지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율법으로부터는 일점이나 일획도 지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역)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요 예수께서 오셔서 그의 걸음을 걷지 않으실 수 없었던 까닭이다.

마 5:18은 그와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6장 17절, 마 24:35과 함께 성경이 기 록된 이래 철저하게 도용당해온 억울한 본문이다. 교리주의자들이나 맹목적 호교주의자들에 의해서 성경의 영원성을 변증하기 위한 요절로 희생되어온 대표적인 구절이다. 그것은 조직신학자들에 의해서는 물론이요, 본문을 신중 하고도 사려깊게 살펴보아야 할 성경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도무지 앞뒤 문맥 의 고려없이 무차별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구절로만 채택되 어져 왔을 뿐이다. 자신의 터가 반석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신앙적인 모습으로 자위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구습의 종 교적 사고에 젖어 눈이 가리워져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context조차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이 문장을 흔히 말하는 예수의 성경관으로, 특별히 만전적(萬全的) 영 감의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구절로 인용한다면, 그것은 문맥의 고려가 없 는 과잉충성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러한 표 현에서 예수의 성경관 또는 태도를 엿볼 수 있을런지는 모른다 해도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고 특정 의미만을 부각시킨다거나 강조될 때 부득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의미의 부당한 변모(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일점 일획 의 표현을 들어서-일점 은 히브리 어의 요드(y), 일획 은 히브리어의 혼동하기 쉬운 각획-예수께서 성문율법 의 글자들에 관심을 두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이 반드시 정당할 수 만은 없다. 그것은 이제부터 지적될 것이다.

 ajmh;n ga;r levgw uJmi'n, ew a[n parevlqh/ oJ oujrano; kai; hJ gh', ijw'ta en h[ miva keraiva ouj mh; parevlqh/ ajpo; tou' novmou ew a[n pavnta gevnhtai (마 5: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 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라시는 5:17 말씀의 이유가 잘 나타나 있는 18절이 다.

ajmh;n ga;r levgw uJmi'n(왜냐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문장은 ga;r 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와 함께 예수의 간곡한 심정 이 들어있는 문장이다.

웬고하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건데 무엇을 말인가 바로 ew a[n(해오스 안) 이하의 문장이다. 우리말 번역성 경에는-하기 전에는 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것은 잘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ew a[n(해오스 안)은 till, until, while, as long as 의 의미이다. 즉-하기까지 의 의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장에서 유의하여 살펴보아야 할 일은 ew a[n(해오스 안 )이라는 종속절을 이끄는 종속접속사가 두번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하 나의 주절을 놓고 앞과 뒤에서 동일한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접속사로 주문장과 관계하면서 이루어져 있는 독특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주된 문장은 ijw'ta en h[ miva keraiva ouj mh; parevlqh/ ajpo; tou' novmou(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이다 .

이 문장에서 없어지다 라고 번역한 parevlqh/(parevrcomai) 는 pass, 또는 pass away의 의미이다. 그것은 없어지다 의 의미보다도 지나가다 의 의미이다. parevr-comai(파레르코마이) 가 성경에서 쓰이는 사례들 을 살펴보더라도(막 13:30, 31, 고후 5:17, 약 1:10, 벧후 3:10, 계 21:1) 그 것은 분명해진다. 물론 지나가 버리면 그곳에는 있을지 몰라도 지나쳐온 이 에게는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가다 의 의미가 본래 적 의미이기도 하려니와 이해하기도 훨씬 용이하다. 또한 율법의 일점일획이 라는 표현도 원문을 직역해보면 일점 또는(h[ or) 일획이 율법으로부터(aj po; tou' novmou) 지나가지 않는다(ouj mh; parevlqh/) 이다. 문제는 언제 까지 그러하냐 하면 그것은 바로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종속 접속사가 이끌고 있는 문장의 내용이 지시하고 있다.

 천지가 지나가기까지(ew a[n parevlqh/ oJ oujrano; kai; hJ gh')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ew a[n pavnta gevnhtai)

그러하기까지는 결코 율법으로부터는 일점이나 일획도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 이다.

여기서 만일 이 본문을 말씀의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치자. 그러면 어 떠한 자가당착에 빠지는가 하면, 그러한 틀속에서 이 본문을 보면 결코 말씀 이 영원할 수 없게 되는 모순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은 역으로 천지가 없어지면 반드 시 말씀은 없어진다는 반대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씀의 영원 성을 변증한다는 인간의 지혜가 도리어 말씀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꼴에 이르 고 만다. 어찌 말씀이 그러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어떤이들은 그것은 말 씀이 이 땅위에 사는 인생들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이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말씀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말씀 모독에 불과하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진리 그 자체요 말씀 그 자체일진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도리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1)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도 사실은 마 5:18과 병행구절이다.

 사실 본문은 천지는 지나가야 하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일점이나 일 획이 율법으로부터 지나갈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서야 비 로소 율법의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그 어느 누구로 부터도 율법의 일점 일획은 지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아담 후예의 비극이요 , 운명이다.

여기에 바로 비밀이 있다. 예수께서 오신 까닭이 있으며 완성에 이르는 비결 이 있는 것이다.

 덧붙여 논란의 소지가 많은 일점(ijw'ta en) 일획(miva keraiva)의 의미를 단순히 문자적 의미로 볼 수 없다는 것과 함께 본문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 해 보자.

 한 정치가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라고 말했다 하자. 이 때 한 치 라는 용어는 단순히 도량형 단위의 길이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것은 어떤 요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일 게다.

마찬가지로 율법으로부터의 일점 일획이라는 표현 또한 문자적 의미를 지시하 는 것이라고 보면 앞서 예를 든 문장에서 한 치 를 도량형 단위의 길이 로 해석하는 것과 동일하다. 율법의 일점 일획 이란 바로 율법 아래 있 는 인간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 해방되기가-하기까지(ew a[n) 는 한치도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생의 불 행한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 주시고 있는 말씀임과 동시에 천지가 지나가야 하 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그러한 인생의 불행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오실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과정이 팔복의 내용일찐 대, 그것은 율법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므로 그것을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에 다름 아닌 것이다.

도대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며 율법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율법의 역할이 계란의 껍질이라면 그것의 진정성은 그 안에 있는 생명 씨에 있다 . 그것을 일컬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 한다(약 1:25). 그러나 아 직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가능성이요 성취되어질 때만 온전한 율법으로 나 타난다.

그렇게 나타나려면, 즉 생명이 움터 그 활동을 시작하여 태어나려면 지금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고 있던 율법이 깨져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전까 지 계란껍질은 생명의 보호를 위한 절대적 요소였다. 그러나 잠재적 생명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고 새로 태어나는 순간에도 그 껍질이 보호막으로 붙어 있으면 그 생명은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버리고 만다. 이전에 그를 지켜 주던 보호막이 이제는 도리어 자신을 질식시켜 버리는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이 다. 완성적 율법의 진정성은 바로 이 생명의 새로 태어남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은 계란 껍질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폐기한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생명 자체까지도 폐기하는 것으로 착각 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분명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과 이루어지지 않으 면 안 될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며 어디까지인가 그렇다. 율법의 역할은 어 디까지나 때가 찬 경륜에 이르기까지, 안에 있는 생명을 지켜주는데까지만 존 재의미와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몽학선생 이라 한다. 그러 기에 때가 이르기전 율법이 폐해지면 그것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 되어 반율법 주의자나 또는 단순한 율법 폐기론자가 되어 종교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양태 로 나타나고 또한 때가 이르러서도 율법이 폐기되지 않으면 그것도 역시 생명 을 죽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케 하러 오셨다는 의미 는 때가 찬 경륜을 따라 계란껍질을 폐기하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이 병아리로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성경이 단순히 지식이나 내용으로만 전 달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며, 단순히 지식이나 내용으로만 전달될 때 발생되 는 불행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계란껍질은 그림자요,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율법의 실체요, 실상이다 . 그림자는 다만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만으로는 실상을 알 수 없다. 실 체를 보면 비로소 그림자를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림자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된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를 분석하거나 따져볼 필요도 없다.

실체를 영접하려면 실체인양 주인행세하고 있는 그런 그림자로부터 눈이 돌려 져야 한다. 그림자는 그림자요, 그것은 허상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 허상을 허상으로 아는 것이 지혜이다. 허상을 허상으 로 아는 순간부터 실상으로 나갈 수 있는 터전이 시작되며, 하나님은 이 구각 을 깨트리는 작업을 이론으로가 아닌 실제로, 예수를 통하여 이루고 계신 것 이다. 예수는 이 때문에 오셨다. 실체가 오기 전에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그림자가 떠나기 전에는 실체가 임할 수 없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논리싸움이 아니다. 실체가 오기 전에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과 동시에 그림자가 떠나기 전에는 실체가 임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언어적 표현의 한계에서 빚어지는 역설적 진리이다.

그것은 하나의 섭리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탄생과정에 대한 두 측면에서 의 표현일 뿐이다.

어미닭이 계란을 품고 있는 동안 껍질속의 생명은 자라고 동시에 때가 이르러 서 어미닭은 껍질을 쪼아 깨버린다. 어느것이 먼저랄 수 없이 함께 이루어지 는 웅장한 창조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이다.

그래서 ew a[n(해오스 안)이라는 종속절이 주절문장의 앞에와 뒤에서 앞 서거니 뒷서거니 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천지가 지나가기까지는, 동시 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인 것이다.

 여기서 천지라 함은 옛 하늘과 옛땅이니 곧 옛 사람이 발을 딛고 있는 그 터 전의 땅이요, 머리를 향하고 있는 그 하늘이다. 그것을 제발 이 지구와 육안 으로 바라다보이는 저 하늘(sky)로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갑자기 성경의 성경적 개념을 천문학의 개념으로 바꾸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뿐 이다. 그것을 영해(Allegorical interpretation)라고 단순 매도하려 하지 말 고 성경적 개념의 하늘과 땅을 소위 말하는 성경적으로 살펴보라.

옛 하늘과 옛 땅은 지나가야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덧입혀져야 한다. 이 천지가 지나가야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 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 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19-2 0) 이러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은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여전히 계속되고 있 다.

우리는 속히 이 성전을 헐자. 이 높이 높이 쌓아올라간 견고한 성을 무너뜨 리지 않으면 안된다. 유대인들이 46년 동안 쌓은 예루살렘 성전은 보이는 성 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을 있게 한 그들의 신앙의 성(城), 육체로만 아는 신앙, 그 하늘과 땅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4 6년이 아닌 훨씬 그 이상의 세월동안 쌓아온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미련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서 생명에 이르렀다 거나 자유 운운할 수 없다. 그러기 전에는 나는 구원 받았다 말하지 말라. 나는 결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라고도 말하지 말라. 율법은 당 신으로부터는 일점도 일획도 지나가지 않았다. 다만 당신 스스로가 율법주의 자가 아닌 줄로 착각(nomivzw)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7:12의 말씀대로 제사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다. 천지가 지나가고 pavnta gevnhtai(판타 게네타이)되어 야 비로소 율법이 지나가고 완전한 율법이 이루어지는 율법의 변역, 즉 개혁 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라는 Ism이 아닌 개혁(diovrqwsi, reformation)의 진정한 의미이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개혁되어야 할지 본 질이 실종되어 있는 개혁은 구호와 기치일 뿐 공허한 메아리만 남는다.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으면 결코 새 것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으면 결코 이전 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이 말은 결코 모순률의 모습이지만 그렇지 않다.그것은 상호 순환적인 관계이다.그리스도안에 있어야 이전 것이 지나가 고 이전 것이 지나가야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성경의 오묘함이다.

 산상수훈15[너희의, 바리새인들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義보다 낫지 아니하면-마 5:19-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앞의 글에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개혁되어야 할 문제임을 우 리는 살펴 보았다. 개혁의 과정에는 반드시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이 뒤 따 른다는 것도 아울러 지적 되었다. 동시에 율법의 개혁은 곧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완성에 이르는 것임과 아울러 그 과정속에서 반드시 이전 것이 지나가 야 하는 깨어짐이 필요하고 새 것으로 덧입혀 짐의 새 생명의 출생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 본문 흐름의 論旨였다(물론 내 개인만의 의견일 수도 있겠지만 ).

이러한 과정속에서 필히 경계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오늘 본문이 아주 잘 지적해 준다. 이전 것이 지나가는 대 역사는 반드시 때가 찬 하나님의 經 綸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적 사역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이 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이 완성을 이루는 과 정 속에서 율법에 대한 폐함과 이룸의 역학 관계를 주의 깊게 이해하지 않으 면 대단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전 것과 완성적 율법을 혼동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전 것에 대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즉 온전한 율법의 성취는 온데 간데 없이 없어지고 율법의 폐기만 이루어지는 사태를 예견 하시고 하시 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그러한 자들에 의해서 율법은 항상 luvw(to loose , set free, dissolve, forgive, 풀다, 헐다, 파괴하다)되는 현상으로 나타난 다. 그것은 완성을 위한 폐함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미명(지식으로만) 아래 자 신을 망치는 것과 같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폐해지거나 버려서는 안된다. 소위 일점 이나 일획이라후 (pavnta gevnhtai) 지나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벼 이삭이 채 여물기도 전에 추수 하겠다고 낫을 갖다 대면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알곡 을 곡간에 들이는 추수를 하게 되면 그 알곡을 있게 했던 곡식의 줄기들은 자기의 역할이 끝났기 때문에 과감히 버려진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그 러나 무르익기 전에(때가 차기전에) 식물의 줄기 역할을 무시한 채 벼베기를 해버리면 충실한 알곡은 기대할 수 없고 다만 쭉정이든지 온전히 결실치 못 한 지극히 작은 것 밖에는 거두어들일 것이 없다. 이러한 경우가 지식이 사람 을 망하게하는 대표적인 경우이 계명을 luvw(루오)하는 것을 이 시점에서 우 리는 최대한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이루어짐이 없이 계명을 luvw하는 자들의 양상은 마치 율법으로부터 자유 운운 할지는 몰라도 천국시민의 自律 性과 自發性이 현격하게 결여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비유컨데 한 때 유 행했던 미국이 좋다고 불법으로 밀입국하여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이나 멕시코 인과 같다고나 할까 기아와 불합리, 또는 가난의 체제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세계로 밀입국하였는지는 몰라도 그 안에 있는 풍요와 온갖 보화를 누리지 못하는 군상들이다. 미국에 거주한다고 피 권리를 누리지 못하듯 천국에 있 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천국됨을 스스로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까닭에 지 극히 작은자 로 일컬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원리가 그렇기 에 그런 것이지 하나님이 차별대우를 하신다거나 누가 제약을 하는 것이 아니 다. 스스로가 그러한 삶을 살 뿐인 것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공의는 찬란한 빛과 같이 충만히 내재하신다.

 반면에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무슨 말씀인가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처녀가 총각을 만나 결혼하게 되면 아. 아무리 임신에 대한 생리학적 지식 갖고 있고 임신의 과정과 출산에 대한 전문적인 해박함을 갖고 있는 여성 繭 하더라도 남편을 만나지 못하면 임신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훌륭한 지식, 품土 신체를 구비하고, 임신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어도 가장 긴요한 조건인 꼿資 만나지 못하면 새 생명의 탄생은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역으로도 성립한다. 좋은 씨, 충실한 생명씨를 갖고 있어도 밭을 만나 지 못하면 그 역시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떻든 신부가 신랑을 만나면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켜져 왔던 처녀성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남편과 合一 안타까울 痼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신부가 남편과 하나되면 새 생명이 잉 쨉품 출산하는 것은 정상이다. 이렇게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신비려니와 출 位 산모에게는 아이와의 관계성을 위한 신체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철옹성 보다도 더 굳게 닫혀 있던 유두에서 유즙이 분비되고 아이는 엄마의 젖을 통해 신선한 생명수를 공급받게 되니 이 어찌 신비가 아니런가 그 어떠 한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 하는 소위 능력이다. 여기에는 어떤 인위적인 힘이나 노력이 가미되는 것웩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라고 하는 소위 행하며 할 때의 poievw(포이 에오) 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행함이다. 이것이 아벨과 가인의 다른점이 었다. 신부가 아이를 낳기까지는 따지고 보면 수많은 과정이 있었고 고통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전혀 기억되지 않고 아이를 낳은 기쁨의 현실만 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앞으로도 놓여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너희의 義 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義 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제스츄 어는 비슷하다. 제사를 드린다는 외양은 아벨이나 가인 모두가 갖추고 있었다 . 정성으로 따지자면 가인이 훨씬 정성스러웠을런지도 모른다. 만일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사실 화가날 이유도 없었을 터이지만 그의 화난 얼굴 빛 을 보면 대단한 정성을 들였던게 틀림없다. 반면 아벨의 경우는 의식된 정성 은 개입될 겨를이 없었다. 거기에는 정성이고 아니고를 따질 게제가 되지 않 는다. 아이를 잉태하는데 정성이 필요한가 물론 마음 가짐을 바로 갖는다든 지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려는 애씀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아주 부차적인 문제일 뿐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정성은 쓸데없 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이 전부를 수반케 하고 정성도 따르게 한다. 혼신을 다한 합일의 과정을 있게 한다. 탔 힘은 다 사랑이 가능케 할 뿐이다. 이 것이 뒤바뀐 경우는 가짜라는 말이다.즉 혼 탔 다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다고 우기지 말일이다.

이 제사를 받으실까 받지 않으실까하는 의식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다만 그렇게 사랑하며 살 뿐이다. 사랑으로 인해 고통이 생기 면 그저 고통을 받아들인다. 때로는 사랑이 십자가를 지게한다. 다만 그 뿐 인 것이다.

 이것이 너희의 義 와 바리새인의 義 의 차이이다. 바리새인들의 義를 갖고는 아무리 양육을 하려해도 생젖에서 유즙이 나오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옜便풉竪 하며 종내는 이러한 모습들이 종교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성 堧 이러한 것에 질색하는 것이다. 이것에 구역질을 내는 것이며 이러한 인 죄악을 고발하는 책이 성경이다. 이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전도하여 입에 맞는 인스턴트 식품이나 분유를 모아다가 그들을 양육한다. 그들의 설뼁 공급되는 생명의 젖이 아니다. 그들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黴탔 속에서 구체적으로 샘솟는 양식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설교 邦 되고 종교꾼이 된다. 설교를 준비해야 되고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않으 안된다. 동시에 아무리 모범적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그것은 자기의 義일 湛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낫다 라고 하는 perisseuvw(페리슈오)는 to be ov er and above, overflow, abound, remain의 의미를 갖고 있는 개념이다. 홍수 시 강둑을 범람하는 넘치는 물과 같은 풍족함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정상적인 산모에게 있어서 풍성한 유즙과 같은 것이다. 특별한 노력으로는 결코 그렇 게 될 수가 없다. 이것이 두 종류의 義의 근본적인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너희 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義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 어갈 수 없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도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이다.

 5:21절부터는 실제로 그러한 실례를 들어서 적나라 하게 고발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 논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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