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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난한 자에게 임하신 예수님 (눅 02:8-14)

첨부 1


이 세상에서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보면, ‘가난’은 또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5:3절에 보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보면, 가난은 하늘의 축복으로 부요하게 채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부자라고 한다면 그는 부족함을 모를 것이고 결국 하늘의 복을 사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까지 왔다가 거처할 자리를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어떤 집의 마굿간에 들어가서 거기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통 안에다 뉘웠던 것입니다. 구유통 속에 뉘인 아기 예수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결코 처음부터 그처럼 비천하게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태어날 때부터 이 땅의 모든 불행을 한 몸에 짊어 지셨습니까...
고후8:9절에 보면, 그분은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요,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가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가난한 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했던 사람들인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요셉과 마리아가 부자였다면 아기 예수가 그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해산을 금방 앞두고 남의 마굿간에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당시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남편으로 정했던 마리아 역시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로 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나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눅1:48절에 보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천한 일개 시골의 아낙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녀로 하여금 ‘여자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로(눅1:42) 존경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의 모든 존귀와 파멸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실로, 가난하여 내세울 것이 없는 자, 그리고.... 가난하되 겸손하며 경건한 자,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셋째로, 성탄을 축하한 목자들도 가난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그날 밤. 베들레헴 가까운 들판에서 밤새도록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사람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밤 사이에 가끔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습격하거나, 더러는 부근을 지나는 사람들이 약탈해 가는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으례이 밤을 세우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는 고생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들은 뜻밖에 찾아 온 천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동리, 곧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태어난 아기 예수를 보면서 첫번 성탄을 감격스럽게 찬양한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토록 영광스러운 자리에 어찌하여 저 가난한 목자들이 맨 먼저 초대되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세상에는 권세 많고, 재물이 많은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셨습니까....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부자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신 주님!..... 이 사실은 영적으로 귀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가난’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연약성과 죄성을 통감하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간구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3절 말씀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고 하는 자아, 허울, 교만을 다 벗어버리고...,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나의 죄성을 통감하며, 겸허하게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므로... 우리의 심령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놀라운 하늘의 은혜와 축복을 맛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므온과 안나!

새벽예배설교(199

8. 1

1. 29)/박기완 목사 (눅2:25-39)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2: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 땅에는 50억이 넘는 무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이들은 10억 정도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거의 예수님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저버리고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들은 그분을 만나게 되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그분을 만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이 두 사람이 메시야를 만났던 일들이 그점을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시므온은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므온은 무척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성전에 도착한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를 보고서 그 자리에서 즉시 이 아기가 메시야인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하여 아직 갓난 아기를 보고서 곧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 차렸습니까....
본문 25절 말씀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때까지 줄곧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이 그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살아 오는 날 동안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모두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에 바쳤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26절에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것도 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소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비장하게 살아 왔던 그의 앞에 드디어 메시야가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그를 알아 차리지 못하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더 중요한 사실, 곧 성령이 그에게서 항상 떠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쉽게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시므온은 아기를 받아 안고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히 놓아 주시는구나. 내 눈이 기어코 주의 구원을 보았구나.” 하고 고백하여 좋아했습니다.

2.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그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점에서는 시므온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나의 경우에는 또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나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것은 고작 7년 동안 밖에 안 되었고 그후로 84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과부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종종 고아와 과부가 함께 불쌍한 사람들로 꼽히고 있는데, 과부 역시 고아의 불행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안나가 짧은 기간이나마 남편을 섬기던 동안은 메시야보다 남편을 더 의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을 잃고 난 이후에 그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후부터 한 세기가 가까운 긴긴 세월 동안... 줄곧 메시야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잠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간절히 사모하는 심정은 달리 찾아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안나 역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안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메시야 탄생의 복음을 들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알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성령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이 아기 예수를 보고서 당장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 차렸던 사실이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아기 예수를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는 저 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렘29:13절 말씀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찾는 심정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거룩하게 살고, 성령과 동행하며, 성결된 생활로서 마침내 구원의 주를 바라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신의 정체!

새벽예배설교(199

8. 1

1. 30)/박기완 목사 (눅4:31-37)

(눅4: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눅4: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눅4: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눅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4: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눅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눅4: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심리적 환상에 기인하는 허구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현상은... 공장을 건설하고, 운동장 만한 배를 만들고,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기계설비 시설을 갖추고서 의례적으로 돼지머리를 놓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귀신이 없다고 주장은 하지만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귀신을 숭배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은 귀신의 존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은 그와 같은 사실의 한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귀신은 부패한 인간사의 모든 현장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엡6:12절 말씀에 의하면 귀신의 왕인 사단은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요 공중의 집권자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엄청난 부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온갖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여러 형태의 고난을 겪으며 살고 있고 이러한 인생고는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인간의 고통과 죄의 문제에 작용하고 있는 귀신의 세력은 어떤 장소든 가리지 않고 침범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보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거룩한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에서도 귀신이 역사하고 있습니다(33절).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듯이 귀신은 자신의 본성과 반대되는 그런 곳에서 더욱 더 기승을 부립니다. 겸손보다는 교만을, 믿음보다는 의심을, 그리고 경건보다는 세속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그 소행인 것입니다.

2. 본문에서 귀신은 예수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귀신은 인간에게 작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멸하러 왔으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34절).
눅4:34절에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 된 것입니다.
실로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가진 귀신을 멸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해 일생동안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신분과 사역을 알고 있었던 귀신은 예수를 만났을 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귀신은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예수님께 호소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를 훼방하십니까”라는 의미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수께서 계신 곳에 어두움의 세력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예수와 복음은 귀신의 세력을 분쇄시키는 효력 그 자체입니다.

3,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쫓겨났습니다.
35절에서 주님은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이 말씀은 보통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말씀으로 대적자 귀신의 세릭을 물리치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은 종말에도 귀신의 세력을 정복하실 것입니다(계20:7-10).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에게는 가강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의 꾸짖음이지만, 인간에게는 복된 구원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1:18절 말씀에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은 귀신의 세력과의 영적 싸움을 계속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범죄와 온갖 질병 그리고 이런 것들로 인해 신음하는 인간 삶의 현장에는 그 배후에 사단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귀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바로 알고 두려워하며 물러난 것처럼, 구세주 되시는 예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할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며 그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야 하는 것입니다(엡6:13).

귀신도 주님을 알고 있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성도의 직분을 다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17:3절 말씀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것은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엡6:13절 말씀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므로써... 이 악의 세력 가운데서도 날마다 승리하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깊은 데로 가라!

새벽예배설교(199

8. 1

2. 2)/박기완 목사 (눅 5:1-ll)

(눅5: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눅5: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눅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5: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눅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눅5: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부인 베드로와 요한 등을 호숫가에서 만나 첫번 제자들로 부르신 장면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까지 자세히 첨가되어 있어서 더욱 의미 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처음 만나 전개되어진 일들과 이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까지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는 많은 의미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감추인 신령한 의미를 상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먼저, 이 말씀은 마음 깊은 데로 가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그물질을 했지만 잡은 고기라곤 한마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적 허탈감과 육체적 피로를 짐작할만 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무엇을 성취하면 그런데로 피로를 잊을 수 있겠지만, 실패하면 피로는 더욱 가중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저들의 모습은 어쩌면 인생의 모든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날마다 동서 남북을 발이 닳도록 헤매고, 어떤 사람은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사방을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빈 그물을 걷어 올린 저들의 모습처럼 허탈감으로 귀착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누구나 빵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깊은 영혼의 갈증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3: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마음 깊은데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데로 돌아가야만 허탈한 인생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곰곰히 돌아보고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2. 이 말씀은 은혜의 깊은 데로 가라는 뜻입니다.
어부들은 예수님보다 경험도 많고 고기잡이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섭리 앞에 인간이 쌓아온 경험이나 지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이 사건은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은혜의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적 경험이나 인본주의적 방법을 다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허탈에서 충만으로 바꿔 줄 수 있는 귀중한 것들은 다 깊은 데서 나옵니다.
생수가 길바닥에서 나지 않고 땅속 깊은 데서 나오고, 금 은 보석도 돌자갈 밭에서 나지 않고 태산 깊은 곳에서 나오며, 진주도 개천에서 나지 않고 바다 깊은 데서 나오듯이...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채워 줄 영적 보화도 깊은 은혜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많은 고기를 잡고 나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한 것도... 깊은 은혜 가운데서 얻어진 자기 발견이었습니다.

3. 깊은데로 가라는 말씀은 사람들 깊은 데로 가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곧 그를 향하여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마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막1:17절에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은 분명히 그를 전도자로 만들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사람들 깊은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부흥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모이는’ 일에 있어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열정적입니다.
그러나 ‘모이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흩어지는’ 일입니다. 아직도 복음의 빛을 접하지 못한 국내나 해외의 선교지,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고통당하고 신음하고 있는 주위의 이웃들은 교회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깊은 데로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영육간의 굶주림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일깨우는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를 위시한 몇사람의 어부가 뜻밖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경이로운 기적을 보고 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만남과, 경이호운 일의 체험,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 나서는 실제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특히 우리의 삶 가운데서 허탈감을 경험하고 공허감을 느낄 때가 바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깊은데로 가라!” 오늘 주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

새벽예배설교(199

8. 1

2. 3)/박기완 목사 (눅7:24-30)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세례 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께로 몰려 들었는데, 당시 이 무리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도 없이 이리 저리 몰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아니면 선지자냐 하고 질문하시는 장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님의 이 질문은 지금도 당신의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무리들의 특성은 무엇이며 이들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무리들은 주체성이 없었습니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런 주견이 없이 남의 의견이나 행동에 덩달아 따르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따라가고, 남이 하니까 함께 동조하는 행동, 이것이 부화뇌동하는 군중 심리입니다.
“너회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말씀은 바람에 흔들리는 파도와 같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아무런 줏대 없이... 까마귀떼처럼 몰려다니는 충동적인 무리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일격을 가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요한의 주변에 구름 떼처럼 몰려왔지만 그가 감옥에 수감되자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무리들은 주님에게 몰려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 보고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다 떠나갔듯이 지금 당신에게 모인 그들은 장차 떠나갈 것이며 당신을 죽일 대적들에게 동조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이같이 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확고한 주체성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의 특성 중 하나를 들면 바로 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지는 전혀 의식하지 뭇하고 있습니다.
가벼운 바람에도 날려가는 겨는 그 속에 알맹이가 없다는 증거이고, 거센 바람에도 태연 자약한 나무는 뿌리가 깊다는 증거입니다. 뿌리가 깊은 신앙의 사람이라면 세례 요한과 같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 상태도 확고한 주체성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요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무리들은 외형 중심적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하늘을 찌를 듯한 고충 건물, 화려한 백화점의 진열장, 거리마다 빛나는 쇼윈도우..., 실로 오늘의 세대는 화려함과 안락함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속을 들여다 보면, 그 속은 이기심과 물질 만능주의에 노예가 되어 심히 부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 나왔느냐 그런 자는 왕궁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들은 세례 요한에게도 몰려들었던 무리들인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혁명을 일으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쥴 정치적 메시야로 기대했습니다.
즉 이들은 내면적이요 본질적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외형 중심적인 사고 방식으로 굳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리들을 향하여 세상의 화려함과 사치함을 구하는 자는 나에게 나올 것이 아니라 왕궁에나 가면 적합하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즉, 신앙의 세계는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영화를 구하기 위해서 모이는 세계가 아니며, 화려한 장미 빛 꿈을 꾸는 세계도 아닙니다.

3. 결국 주님은 ‘예수 안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그토록 주체성 없이 움직이고 외형 중심적으로 행했던 이유는 ‘참된 자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현대인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물질 문명과 복잡한 사회의 현실에 동화되어 살다보니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본문 28절에서 그 해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하시면서 세례 요한을 크게 칭찬하시고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의 위대함을 축소시키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는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직접 체험하게 된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구속의 은혜를 받은 자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위대하지만 그 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그 앞에 설 때, 그때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발견하는 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실존을 발견하고 겸손히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야말로 세례요한보다 더 귀하게 주님은 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는 신앙의 주견이 서 있는지... 세상의 영화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에게 한 것이지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요,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은 우리를 향한 질문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를 보러온 것도 아니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선지자를 보러 온 것도 아닙니다. 즉, 예배의식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출세를 위해 온 것도 아니고,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 그 분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복된 자녀들이 모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주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새벽예배설교(199

8. 1

2. 6)/박기완 목사 (눅8:4-15)

(눅8: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8: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눅8: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눅8: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눅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8: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눅8: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눅8: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8: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눅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비유들 가운데서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친히 이 비유의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상의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본문의 전후 내용을 볼 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좇는 제자들에게 본 비유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을 것을 촉구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1. 비유의 배경
비유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은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비유의 소재(素材)는 일상 생활 가운데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연이나 풍습 등에서 취해졌다.
본문의 비유 또한 당시 이스라엘의 농사법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팔레스틴 농지의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ㄱ. 파종 방법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먼저 씨를 뿌리기 전에 농부는 밭에서 지난 해의 묵은 것들을 깨끗하게 치웠다. 그러나 농부는 오늘날처럼 밭을 갈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밭을 갈지 않고 깨끗하게 정리된 밭의 표면에 그냥 씨를 뿌렸던 것이다.
따라서 농부는 씨를 뿌린 땅 밑에 반석이나 뿌리같은 것이 들어 있어도 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평평하게 밭의 표면을 고르게 편 다음에 농부는 자기의 허리춤에 조그만 주머니를 차고 그 주머니에서 씨를 꺼내 손으로 씨앗을 흩어 뿌렸다.
일단 씨를 뿌렸으면 농부는 원시적인 나무 쟁기로 씨를 뿌린 밭을 가로 지르며 끌고 다였다. 이렇게 해서 뿌려진 씨는 땅 속에 들어가게 되고 씨를 쪼아 먹는 새들이나 강한 바람으로부터 보호되었다.
ㄴ. 팔레스틴 농지의 특색
대개 길다란 모양이었고 그 옆으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 길 양편에는 밭을 막아 주는 울타리나 담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은 나귀나 소나 사람이 밟고 다녀서 단단하였다.
한편 팔레스틴의 밭은 기름진 평야가 적으므로 대부분이 산지(山地)와 기복이 있는 가파른 언덕을 일궈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밭에는 석회석, 대리석, 현무암, 화강암 등과 같은 돌들이 상당히 많이 널려 있었고 때때로 이 밭 한가운데 에는 커다란 가시덤불이 불쑥 솟아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입지 조건하에서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끈기있게 수확의 때를 기다려야 했다.

2. 여러 종류의 밭
본문에는 네 종류의 밭에 씨가 뿌려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 결실하지 못하는 세 종류일 밭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ㄱ. 길가(5절)
농부가 손으로 씨를 뿌리다 보면 씨들이 바람에 날려 밭 가운데 나 있는 길가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길은 씨를 뿌린 후 쟁기로 갈지 않는다. 따라서 길 위에 뿌려진 씨는 짓밟힘을 당하거나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ㄴ. 돌밭(6절)
밭의 밑에 바위나 돌들이 깔려 있으면 위에 있는 흙의 층은 두텁지 않다. 흙이 얇고, 그 밑에 바위가 있으면 태양열을 잘 흡수해서 돌밭에 뿌려진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을 내고 빨리 자라지만, 충분한 흙이 없기 때문에 뿌리는 많이 자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토양층이 얇기 때문에 습기는 쉽게 증발된다.
따라서 이러한 밭에 뿌려진 씨는 재빨리 싹을 틔우지만 조금 자라다가 곧 말라 죽게 되는 것이다.
ㄷ. 가시밭(7절)
씨 뿌리는 자는 씨앗을 뿌리기 전에 지난 해에 자랐던 잔재물들을 깨끗하게 치웠기 때문에 흙속에 가시떨기의 뿌리가 남아 있어도 잘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밭에 뿌려진 씨는 가시와 함께 자라게 된다.
처음에 이 씨는 싹을 틔우고 얼마 동안 자라지만 후에는 가시떨기가 더 크게 자라서 결국 이 식물은 가시떨기 사이에 있게 된다. 그러다가 가시떨기는 점점 자란 식물을 휘감아 식물의 지속적인 성장을 정체시키거나 아예 식물을 말라 죽게 하는 것이다.

3. 비유의 교훈
이상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ㄱ. 씨를 뿌리는 자
이는 일차적으로 예수를 가리키며 이차적으로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에 의해 처음 뿌려진 복음의 씨는 다시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뿌려져야 할 하나님의 명령의 씨이다(행1:8),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의 씨를 받아 뿌리는 전도자는 밭의 상태에 관계없이 뿌리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시126:5, 6).
ㄴ. 결실의 문제
세상의 농사에서는 좋은 씨도 있고 나쁜 씨도 있다. 따라서 종자의 상태에 따라 수확량에 큰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뿌린 씨는 네 가지 경우 모두 동일한 말씀의 씨였다. 따라서 수확량에 큰 차이가 난 것은 씨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밭의 문제, 즉 인간의 마음 밭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ㄷ. 결실의 차이
좋은 밭도 그 상황에 따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각각 그 결실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도들이 모두 구원은 받지만, 그 신앙 생활의 열매는 각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12:48). 따라서, 모든 성도는 각자 각자 최선을 다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막12:30).

야이로의 믿음
(본문/눅8:40-56)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보여 주신 이적과 권능들은 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죽은 이를 소생시키는 이적은 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건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뚜렷히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의 역사는 복음서에 세 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신 일(7:11-17)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요11:40-44)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이 그것입니다.
이 세 차례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11:25-26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말씀으로 우주와 온 천하를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셨다.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주님께는 살리실 권세도 있고, 죽이실 권세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 뿐만아니라, 영혼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게 된 것은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능력으로 일어났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야이로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는 어떤 믿음을 가졌을까....

1. 무릎을 꿇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의 한 마을을 지나실 때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바로 이때, 회당장의 제복을 입은 어떤 한 사람이 무리들 사이를 비집고서 재빨리 나오더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초라한 차림새의 나사렛 사람앞에... 그것도 수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보통사람같으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초라한 옷을 걸친 예수님이 회당장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꿇어 엎드린 자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입니다. 그에게는 단 하나 뿐인 12살 난 딸이 있었는데 느닷없이 앓아 눕더니 급기야 숨이 넘어가는 지경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딸의 목숨을 어떻게 하든지 구해 보려는 절박감에서 였겠지만... 예수님의 신성한 위엄 앞에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는 겸손한 믿음이 그의 심령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야이로와 같이 은혜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간청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서 그분께 즉시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물론 죽어가는 딸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라도 간절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 앞에 화려한 회당장의 제복을 입은 사람으로서 꿇어 엎드려 간청하는 일은 쉽게 나을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 유대교 지도층은 거의가 예수님을 구주로서 믿지 않고 외면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멸시하고 박해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이로는 그런 일에 전혀 관계치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믿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인간의 죄악이나, 자존심, 허영... 등을 다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할 것을....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로써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즉, ‘한 방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와(11's-8) ‘불의한 재판관' 비유(18 . 1-8)가 바로 그것입니다.

3. 인내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딸을 살려 달라는 간청을 듣고 야이로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만 도
중에서 엉뚱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는 일로 잠시 지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발을 동동 구르도록 만들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서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마치 내 집에 불이난 것처럼 화급한 일을 수없이 만나게 되고, 어떤 때는 그것이 사람의 생사문제를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세심히 돌보고 계심을 확신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분의 넓으신 가슴에 전폭적으로 맡길 수 있다면..., 우리는 끝까지 낙망(落望)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32:9-10절 말씀에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했다.

본문에서 결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 그 소녀는 당장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써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①무엇보다도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하고, ②어쩌다 절망작인 사태를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로 그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말고 간청할 것이며, ③그리고 한번 주님께 맡긴 일은 끈기있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제자가 되는 길
(눅9:18-27)/박기완 목사

구원은 누구에게나 동등하지만 구원 얻은자의 신앙에는 그 단계가 분명히 있다.
신앙의 단계를 셋으로 구분한다면,
①먼저 예수를 인간으로 아는 단계이다(눅9:18-19).
이 단계는 신앙을 갖기 전의 단계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옛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다.
②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단계이다(20-21절).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시니 그중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정확히 대답했다(20절).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경험이나 지식으로 대답해서는 안된다. 베드로 처럼 신앙으로 고백되어 져야 한다.
③세 번째 단계는, 십자갈ㄹ 지고 좇는 단계이다(22-27절).
예수님은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단계는 아는 단계와 고백하는 단계,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이제 이 문제에 대하여 좀더 깊이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르켜 흔히 ‘그리스도인’ 혹은 ‘성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말하는데, 이는 초대교회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를 믿는 무리들을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흔히 제자라고 하면 예수님의 12제자를 말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제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그냥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이다.
이들은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나온 사람들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빵을 구하기 위하여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빵을 구하기위해서 나온 사람들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둘째는, 제자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먼저 부른 사람이다. 즉,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 것이다. 자기가 먼저 나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나중에 알고 보면 주님이 먼저 부르셨고 택하셨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요15:16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부른 자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
자기의 요구가 있고, 야망이 있고, 원하는 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는 제자가 아니라 그냥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한다.

그러면,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오늘 본문 눅9:23절 말씀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버리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명예를 버리고, 권세를 버리고, 정욕을 버리고, 세상 욕심을 버리고...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그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게 된다.

두 번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 때문에 지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한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시시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나를 따르라고 하지않으셨다. 그래서 제자의 길은 천사도 흠모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주는 복은 다르다.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온유한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 등이다.
소위 말하는 팔복의 복을 받는다. 이러한 것은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고난과 핍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잘 감당하면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위로를 받게 되고, 땅을 기업으로 받으며...., 배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라” 고 했다.
마5:11-12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했다.

제자는 학생과는 다르다. 학생은 선생님께 지식을 배우고 졸업을 하지만, 제자는 지식을 배우기 보다는 인격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제자는 졸업이 없고,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의 길은 지루하고 험난하다. 인내가 필요하다. 고난이 있고, 십자가의 죽음이 있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 길은 기쁨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며, 상급의 길인 것이다.

마11:28-29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주님께 나아와 쉬고, 주님께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부르신 제자들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다운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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