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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을이 주는 교훈1 (벧전 01: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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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가을’이란 온대 지방의 4계절을 표현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세 번째 계절이 됩니다. 하나님은 방주에서 구원받은 노아에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본래 허락하신 창조 질서를 회복하심으로 홍수 후의 노아의 후손들에게 정상적인 생활 환경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무르익은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성군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는 일반 자연계시가 창조주 하나님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을 알려 주는 그 피조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해마다 우리에게 계절을 주시고 또 회수해 가시고, 또 다른 계절을 보내 주심으로 자연 은총의 노다지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자연적 섭리 앞에서도,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 함께 ‘가을이 주는 교훈’이란 제목의 메시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가을은,

Ⅰ. 낙엽을 보여 주는 계절입니다.

신록을 자랑하며 푸르르게 무성했던 온갖 류의 잎새들이 싸늘한 바람 속에 누렇게 물들고 말라서 떨어져 버리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슬프다고들 합니다. 추풍낙엽이 우리에게 무언가 비애의 감정을 일으켜 주고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것은 푸른 색소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 그 잎새가 하룻밤 찬서리에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버린다는 것 그리고 바람결에 날려 그 모습마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 사람들을 그렇게도 슬프게 해 버리는 것인지 모릅니다.
가을날 울타리의 황국(黃菊)을 보는 자라면, 골짜기의 단풍을 보는 자라면, 차가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있는 낙엽들을 보는 자라면 그리고 시들어 버린 잡초 속에서 울어 에는 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자라면 슬퍼할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비석 씨는 그의 글 ‘들국화’에서,
“가을은 슬픈 계절이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 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워 있을 때 창문에 고요히 흘러 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은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만,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이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옛 글 가운데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코스모스 무참(無慘)’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가을을 불에 타서 없어져 버린 자리를 뜻하는 ‘초토(焦土)’라고도 하였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라는 그의 글에서,
“가을은 전쟁을 치른 폐허이다. 그리고 가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몰한다. 하나의 모반(謀反), 하나의 폭동, 들판의 꽃들과 잎과 열매와 모든 생명의 푸른 색채가 쫓긴다. 쫓겨서 어디론가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그 자리에서 침몰하고 만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낙엽이라는 그 진실 때문입니다. 색깔이 변하고, 붙어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버리고, 그 모습이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 그 진실의 법칙 때문에 가을은 우리들을 슬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을의 낙엽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남겨 놓고 떠납니다. 경색(景色)의 황홀을 남겨 두고 떠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단풍이 떠나기 전에 좇아가서 이별을 서러워들 합니다. 좋게 말해서 단풍놀이지만, 알고 보면 그 이름 낙엽과 나뉘어져 분리되는 슬픔을 달래러 가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한 잎의 낙엽에 불과할지라도, 낙엽은 바람결에 떨어져 사라져 버리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법칙의 진실을 남겨 두고 갑니다.

Ⅱ. 인생의 가을을 보여 줍니다.

영감의 사람 사도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벧전 1:24)라고 하였습니다. ‘풀이 마른다’고 하였습니다. ‘꽃이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미 구약의 대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사 40:6-7)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의 이러한 영감의 표현은 인생의 가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인간 육신의 유한함과 연약함과 무상(無常)함을 지적한 말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운이 그 위에 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운을 받은 산천초목이 낙엽이 되고, 하나님의 기운을 받은 인생의 육체와 영광들이 마르고 시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시의 가을은 인간의 가을을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 광야 교회의 지도자 모세도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0-12)라고 하면서 유한의 인생을 고백하였습니다. 지나가는 인생, 머무름이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부(富), 귀(貴), 공(功), 명(名)이 낙엽처럼 떨어지는 인생의 가을을 알려 줍니다. 건강과 지식들과 업적들과 포부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버리고 마는 인생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들이,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어디론가 가 버리고 마는 인생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리를 굴러가는 낙엽을 밟으면서 구르몽은 ‘낙엽’이란 시를 우리에게 이렇게 남겼습니다.

시몽 나뭇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쓸쓸하다
낙엽은 덧없이 버림받아 땅 위에 있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석양의 낙엽 모습도 쓸쓸하다
바람에 불리울 적마다 낙엽은 상냥스러이 외친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바람이 몸에 스민다.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그는 가을의 낙엽과 인생의 가을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릴케는 ‘가을’이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아스라한 곳에서 내려오는 양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양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무거운 대지가 온 별들로부터
정적 속에 떨어집니다.
우리도 모두 떨어집니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집니다.
그대여 보시라 다른 것들을
만상이 떨어지는 것을
하지만 그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낙하(落下)를 무한히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 십니다.
그도 역시 떨어지는 낙엽과 인생의 가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역사상의 영웅이 떨어집니다. 가인(佳人)도 떨어집니다. 호걸도 떨어지고 걸사(傑士)들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진시 황제가 ‘불사초’를 구해 오기를 기다리다가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복의 대왕 알렉산더는 세계의 땅을 다 밟았는 데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가 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떠나 버렸습니다. 시저의 영광이 피로 물들어 버렸습니다. 세계적인 육체라고 그 아름다움을 예찬 받던 마리린 몬로도 가 버렸습니다(자살). 세계적 정신이라고 칭송 받던 헤세도 가 버렸습니다(자살).
제가 숨쉬고 사는 64년 평생 중에도 이 우주 공간 속에 소리치고 달리던 역사의 거인들이 가버리고마는 모습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 육체의 풀은 마르고, 인생 영광이란 꽃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을의 낙엽에서 인생의 가을을 보게 됩니다. 인생의 황혼을 보게 됩니다. 인생의 저녁 노을을 보게 됩니다.

Ⅲ. 역사의 가을을 보여 줍니다.

저 에덴 동산 문밖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돌리고 계시는 지구의 공간에서 세기적인 기록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는 결코 영원이 아니고 유한입니다. 성경은 그 역사의 끝날을 이미 예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저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역사적 시점을 ‘마지막’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초림부터 역사의 가을철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복음 운동의 시기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복음 운동의 시기를 추수기, 곧 역사의 가을 계절이라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00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호흡하고 살고 있는 이 역사의 시점이 마지막 추수기임을 성경만이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① 자연계의 대변동 ② 적기독국가의 출현, 곧 일곱 번째 짐승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하나의 세계 정부의 징조 ③ 그리고 땅 끝에 전파되는 우주적 복음운동의 징조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가을 타작 마당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마 24:).

결코 존재하는 세계와 세계 역사는 영원하지 않고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의 현장에서 국부적인 타작(심판)을 하고 계심을 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뚜렷하게 갈라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밭에 뿌려진 알곡과 가라지는 둘 다 추수 때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타작(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그 본질적 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맙니다(마 13:24-30). 사도 요한은 이 역사의 가을 타작 마당을 익은 곡식과 익은 포도송이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익은 곡식은 하나님의 백성(구원인)들이요, 익은 포도송이는 심판 받을 백성(멸망인)이라고 하였습니다(계 14:14-20).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가을 추수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무종교 사상이 무르익는 때입니다. 우상숭배 사상, 유물론 사상, 진화론 사상, 자연신론 사상, 불가천국론(不可天國論) 사상 그리고 과학지상주의 사상, 자유주의신학 사상, 저급한 온갖 류의 신비주의 사상, 온갖 류의 이단주의 사상이 그 본질적 특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때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여전히 불의를 행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여전히 의를 행하며 자기 길을 걷는 시대가 완연합니다.

참으로 완연한 역사의 가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의 가을 징조를 깨달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 왔다고 하였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막 1:15).
이 세상은 큰 농원과 같습니다. 복음의 씨가 떨어지는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큰 농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큰 농원의 추수기, 곧 역사의 가을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구속 역사의 현장입니다. 추수가 끝나는 대로 타작마당은 정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세계가 도래된다고 하였습니다(계 2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을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을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창조한 계절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낙엽을 보여주는 계절이었습니다. 찬 서리, 찬 바람에 색이 변하고 붙어 있던 가지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가 버리는 낙엽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운을 받아 진실하게 가 버린 자연계의 낙엽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가을을 교훈하고 떠났습니다. 인간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이라고 하였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는 인생의 가을이 있다고 교훈하였습니다. 결코 인생은 이 세상에서 영주할 수 없는 나그네요, 거류자요, 행인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나마도 약하고 무상한 존재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니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인류 역사의 가을을 교훈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물론 소극적 입장에서 본 경우들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일에 다시 한 번 적극적 입장에서 가을이 주는 교훈을 생각할 것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엔 정말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어 주십시오.
들에다 맑은 바람을 모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하시고,
남국의 햇볕을 이틀만 더 주시어,
그것들을 성숙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해 주십시오.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는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기나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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