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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을이 주는 교훈2 (벧전 0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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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조월석(花朝月夕)이란 말이 있습니다. 꽃핀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이란 뜻으로 ‘봄’과 ‘가을’의 두 계절을 두고 한 말입니다.
E. 윌리 씨는 그의 글 ‘야생의 복숭아’에서 ‘봄은 사과 꽃의 입김보다 짧고, 여름은 너무 아름다워 지체할 수 없고, 낙엽의 화톳불처럼 빠른 가을, 죽음의 잠처럼 즐거운 겨울’이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16세기 어느 영시(英詩) 가운데는 이렇게 4계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4월은 내 사랑하는 그대의 얼굴 위에 있고
7월은 그녀의 눈 속에 깃들여 있네
그녀의 가슴 속에 9월이
그녀의 가슴 속엔 냉랭한 12월이 있네

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변화하는 계절에다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한 번 더 ‘가을이 주는 교훈’이란 메시지를 적극적인 의미에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Ⅰ. 가을은 풍요한 추수의 열매를 보여 줍니다.

한국 속담에 ‘가을 밭에 가는 것이 가난한 친정에 가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한국 속담 중에 ‘가을 마당에 빗자루 몽둥이를 들고 춤을 추어도 농사 밑이 어둑하다.’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모두 풍성한 가을을 나타내는 속담입니다.

이병기(李秉岐) 씨는 그의 글 ‘가람 문선(文選)’에서 가을의 풍요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 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 두고
젖먹이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머니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 바쁜 줄을 모르네

그렇다면 가을은 낙엽만을 보는 계절은 아닙니다. 떨어지고 가 버리는 낙엽만을 쳐다보고 슬퍼하는 계절은 아닙니다. 가을은 풍성한 추수의 열매를 보는 수확의 계절임을 보여 줍니다. 오곡이 익고 백과가 여물어서 추수의 즐거움을 얻는 웃음의 계절입니다. 성숙의 가을, 완성의 가을임도 보여 줍니다. 허무가 아니라 실상을 알려 주는 가을입니다.
봄 밭에 희망으로 파종을 하고, 여름 밭에 더위 중에도 김을 매는 인내는 가을 밭의 소망을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봄 계집, 가을 사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작가는 ‘낙엽 연기엔 진한 커피의 향기가 있다.’고 가을의 향기를 찬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낙엽은 낙엽만을 위하여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것은 마른 풀 끝에, 떨어진 꽃송이 후에 열매를 보여 주기 위함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고 하였습니다.

Ⅱ. 인생 가을은 속사람의 새로움을 보여 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모든 육체는 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인생의 한가운데 주의 말씀이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24).
사람의 마음 속에 세세토록 살아 있는 그 말씀이 무엇인가 우리가 받은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25). 그 복음은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 1:23)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씨’와 ‘말씀’과 ‘복음’은 같은 맥락에서 표현된 내용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영생’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 생명입니다. 그 거듭난 생명의 종자는 바로 ‘씨’와 같은 ‘말씀’인데 그 말씀의 내용은 ‘복음’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쁜 소식’의 내용은 ‘구원’입니다. 구원의 실체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있고 살아 있는 ‘예수 생명 자체’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풀이요 꽃과 같은 인간의 육체 속에는 마르거나 시들거나 떨어질 줄을 모르는 ‘생명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는 ‘영생의 씨’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사의 힘’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겉사람의 후패’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겉사람의 후패’란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한 고난이나 노쇠함에서 오는 약함을 가리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날로 새로워 오는 속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6). 여기 ‘속사람’은 ‘거듭난 생명’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피조물’(고후 5:17)을 뜻합니다.
‘겉사람’은 ① 후패하는 성질의 것이요(고후 4:16) ② 가벼운 것이요(고후 4:17) ③ 보이는 것이요(고후 4:18) ④ 잠깐 동안의 것이요(고후 4:18) ⑤ 땅에 있는 것이요(고후 5:1) ⑥ 무너질 장막과 같은 것이요(고후 5:1) ⑦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과 같은 것이요(고후 5:1) ⑧ 여기 있는 것이요(고후 5:2) ⑨ 탄식하는 것이요(고후 5:2) ⑩ 벗겨지고 말 성질의 것들(고후 5:3-4)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사람’ 곧 영생의 씨를 받은 사람은 ①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요(고후 4:16) ② 영광의 것 곧 무거운 것(重)이요(고후 4:17) ③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요(고후 4:18) ④ 또 영원한 것이요(고후 4:18) ⑤ 하나님께서 지은 집이요(고후 5:1) ⑥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곧 신령한 몸이요(고후 5:1) ⑦간절히 사모되어지는 것이요(고후 5:2) ⑧ 덧입게 되는 성질의 것이요(고후 5:4) ⑨ 성령의 보증을 받은 것이요(고후 5:5) ⑩ 믿음으로 행하는 성질의 것(고후 5:7)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인생의 가을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정(天定)의 법칙입니다. 말하자면 겉사람의 후패가 있다는 것입니다. 낙엽 인생의 과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낙심하고, 괴로워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겉사람의 후패, 곧 낙엽 인생 때문에 낙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말하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삼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7-10).

그래서 인생 가을을 맞은 성군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라고 했습니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71:9). 그 큰 이유는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시 71:18). 그는 그가 맞는 인생의 가을을 내다보고도,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후대에 전하고 싶은 인생의 충동으로 충만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부산 대신동교회에는 금년에 80세가 되는 황영수 장로님과 74세가 되는 그의 부인 박두례 권사가 있습니다. 이 할머니는 경남 진주 반성에서 처녀 시절에 예수를 믿고, 오랫동안 공직에 몸담았던 황영수 씨와 결혼하신 분입니다. 나중에 이 부부는 부산으로 가게 되어 지금 대신동교회 설립 멤버가 되고, 장로와 권사로 한평생 그 교회를 섬기다가 두 분 다 은퇴하셨습니다.
이 두 분이 교회를 사랑하여 봉사하고 종들을 섬기는 일은 모든 교우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노쇠하여 교회 봉사직을 은퇴한 후에도 교역자님들은 물론이고, 여러 교우들이 저들을 부모님처럼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노부부가 새벽 3시만 되면 교회를 찾아 새벽 기도회를 시작하여 여러 가지 내용을 담은 제목들을 가지고 빠짐없이 오랫동안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두 부부가 전도의 사명에 불타던 중, 할머니 권사님은 전철을 타고 왕래하면서 전도하고, 또 여러 경우에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도를 할 뿐만 아니라 그 전도에 열매가 있어서 이 분들로 말미암아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인도가 되어, 주일예배시 그 두 노인 부부를 중심하고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내년 1998년이 그 교회 50주년이 되는 희년의 해인데, 그 때까지 50명을 목표하고 전도를 계속 중이라고 합니다. 그 분들은 바로 우리 교회 황철호 장로님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분은 육신적으로 외동 아들을 두었지만 얼마나 많은 영의 자녀들을 한 평생 동안 해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 과연 낙엽만의 인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 가을의 낙엽을 지나가면서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의 힘으로 독수리 같은 영의 청춘을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찬송가 228장에는,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되도다

이 곳과 저 곳 멀잖다 주 예수 건너 오셔서
내 손을 잡고 가는 것 내 평생 소원이로다

저 묘한 화초 향기는 바람에 불려 오는데
생명수 강변 화초는 늘 사시청청하도다

청아한 음악 소리는 내 귀에 들려 오는데
흰옷을 입은 무리들 천사와 노래하도다

(후렴)
영화롭다 낙원이여 그 산위에서 보오니
먼바다 건너 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이 찬송은 에드거 페이지 스타이티스(E. P. Stites, 1836-1921)가 작시하고, 존 스웨니(J. R. Sweney, 1837-1899)가 작곡했습니다. 이 찬송의 시와 곡은 속사람의 새로움이 바람을 받은 독수리의 날개처럼 되어, 창공을 치솟는 소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맞는 인생 가을의 계절!
그것은 결코 낙엽만은 아닙니다. 아니 낙엽 인생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향하여 움직이는 새로운 속사람의 요동이 아닌가!

Ⅲ. 낙천적 역사의 종말을 보여줍니다.

창조 세계의 시작은 하나님의 낙천적 선언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결과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연발하고 있습니다(창 1:4, 1:10, 12, 18, 21, 25).
첫째 날의 빛의 창조, 둘째 날 궁창의 창조, 셋째 날 바다와 땅과 식물의 창조,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의 창조, 다섯째 날 조류와 어류의 창조, 여섯째 날 동물과 사람의 창조가 모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에 모든 창조 역사를 다시 결론짓기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낙천적인 선언을 연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범죄를 인하여 낙천이 변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이루었으나,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인류 속죄 성취의 개가를 부르심으로 다시 낙천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거룩한 영감을 통하여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고 선언함으로, 인류역사의 가을 타작마당은 낙천으로 끝나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사망과(계 21:4) 애통과 곡하는 것(계 21:4)과 아픈 것과(계 21:4), 해와 달(계 21:23)과 밤의(계 21:25) 저주(계 22:3)가 다시없는 인류 역사의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증유의 새 시대, 새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녀들(그리스도인)이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사의 몸, 영화의 몸, 거룩한 몸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역사의 가을 타작마당 이후에 일어날 낙천 세계의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류의 역사는 낙천에서 시작되고(창 1:), 낙천으로 진행되다가(요 3:16, 19:30) 낙천으로 끝맺을 것이라고(계 21:1)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1:36). 그러므로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께 돌아갈 뿐입니다. 결코 역사의 마지막은 절망과 비극이 아니라 희망이요, 낙천입니다. 실체요, 실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저 프랑스의 시인 구르몽의 ‘낙엽’ 정서를 새롭게 정돈해야 합니다.
…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 /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도다 / 바람이 몸에 스민다….
결코 인생은 가련한 낙엽만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낙엽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낙엽은 결코 없어지거나, 죽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또 다른 새 봄을 잉태하기 위하여 사라질 뿐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을 세세토록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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