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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홍해의 기적 (출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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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위기에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광야에서 연단하셨다. 하나님의 인도와 연단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원리와 방법으로 적용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하나님이 갈라 놓으신 바닷길을 건너갔다. 그 길은 애굽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하며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는 홍해의 체험을 세례와 같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세례를 받는다.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자기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만인 앞에 선포하는 행위이다. 다시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며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홍해의 사건은 신자의 세례와 의미가 상통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한 후에 체험한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한없이 기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다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홍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옛 사람은 장사되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놀라운 기쁨이 있다. 신자들은 누구에게나 이런 체험이 필요하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 홍해를 건넌 환희를 맛보지 멋한 경우가 있을까

첫째,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약간의 불신앙이 그 마음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라고 했지만 중간에 가다가 물이 덮이면 어떻게 할까 하여 불안에 떨던 사람이 있었다면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건넌 사람들의 기쁨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불신앙의 착고에 묶여 있는 신자의 마음에는 구원의 기쁨이 찾아오지 못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잘 깨닫지 못한다.

셋째, 순종치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신자가 아니다. 우리에게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 있는지 점검해 보고 심각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다.

광야의 연단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생활한 이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하라 사막과 같은 모래밭이 아니었다. 목축이 약간 가능하면서도 황량한 벌판이었다.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는 곳으로 낮에는 더위가 심하고, 밤에는 온도가 급강하여 추위가 닥치므로 견디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래도 첫 날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기쁨에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은 아무리 걸어도 물 한 방울 없는 광야길이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점점 불안에 쌓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까지 오고 말았다.

구원의 환희에 찬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일생을 인도하실 경우에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부분이 있었다. 모세는 그의 일생의 절정기인 40세부터 40년간을 광야에서 보낸 것이다. 그러나 40년 후에 그 광야의 40년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예수님도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시려는 찰라 광야에서 40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준비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내일을 내다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지 광야로 인도하시어 시련 뒤에 오는 더 큰 축복을 받도록 준비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광야의 시련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무가치 한가를 발견하게 해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광야와 같은 시련이 없이는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기 어렵다.

누구나 홍해를 건너오면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를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가장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요, 가장 지혜로우신 선생님이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한 여인의 체험담이다. 번데기에서 큰 몸집의 나방이 기어나오려고 오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도와 주려는 충동에 안달이 나서 견디지 못하고 급하게 가위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 구멍을 옆으로 조금 따 주었다. 그랬더니 그 나방은 쉽게 고치를 빠져 나왔다. 그녀 역시 만적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자기가 나방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온 나방은 날개를 질질 끌고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달싹둥이가 되고 만 것이다. 작은 구멍을 빠져 나오는 긴 몸부림, 이것은 나방이 꽃은 찾아 날아다닐 행복한 나비로 만드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과정이었다.

기독교는 행복을 위한 도피처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난을 피하는 샛길 정도로 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기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이 약하므로 그럴 수 있겠지만 신앙 연조가 깊은데도 그런 순진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하여 산산히 부서뜨리시고 다시 만드신다. 그런 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축복을 받도록 하신다. 당신의 욕심이 깨어지기 전에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광야에서 얻은 영적 유익

그러면 우리가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영적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하게 만든다. 모세와 백성들이 부르짓었다. 고난 앞에서 신자는 기도하게 된다.

둘째, 영의 눈을 뜨게 만든다. 모세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다. 광야에서 시련은 마음의 때를 벗겨준다.

셋째, 십자가를 발견하게 한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눈이 열렸을 때 그는 나무를 발견했다. 그 나무를 꺾어 마라의 쓴 물에 던지니 물이 달라졌다.

넷째,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문제 해결의 체험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쓴맛을 주던 문제들이 단맛을 내는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이나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고난 중에 함께 하시며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적 무지이다. 이제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시련의 연속인 광야 생활이지만 하나님은 당신과 늘 동행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다. 불같은 시련 뒤에는 아름다운 축복과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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