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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의의3 (욥 42:1-16)

첨부 1


세계적인 문호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생활에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절망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의 소원대로 되어질 때의 절망이다. 마음의 소원대로 되지 않는 때도 절망이지만, 마음의 소원대로 되어진 결과의 절망은, 그것이 또 시원하지 못한데서 오는 절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진실한 그의 고백입니다. 해 아래 사는 여기 세상에는 그 어느 곳이나 100%의 만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택자 구원 성취를 위한 구원사의 현장, 곧 선교의 무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구령운동의 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그 존재와 의미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큰 사람(부자, 왕) 욥에게 고난의 태풍을 더 했습니다. 비록 그 인격은 순전하고 정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지만, 그는 아직도 세상에 자리를 잡고 사는 세상에서의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고난(환난)이라고 하는 특별 학교에 입학 시켰습니다. 그 고난의 종목들은 욥의 전 인생을 죽이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이란 학교에서 진정한 고난의 의의를 전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난의 의의’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이 고난에서, 자신이 당한 고난이

Ⅰ.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의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Ⅱ. 성화적 신앙(성장하는 신앙)의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Ⅲ. 더 큰 축복의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욥이 고난의 학교에서 받은 축복은 대단했습니다. 그 축복을 대별(大別)하면 영, 육의 축복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집약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곤경을 돌이키다」(-)라는 말의 본래 뜻은 ‘외국에 잡혀갔던 포로가 해방을 받아 되돌아 옴’을 의미했습니다. ‘돌이키다’, ‘풀려나다’, ‘돌아오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이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듯이 느껴져, 마치 본국을 떠난 포로같이 느껴졌을 때가 있었습니다(욥19:11, 23:8, 9). 그 결과 아내와 친구들과 종들까지도 외인처럼 되어버린 때가 있었습니다(욥19:13, 15). 더욱이 자신은 몸에 악창이 나서 죽음에 이르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욥2:7-10).
이제 하나님은 그 모든 억압과 고통에서 욥을 도로 찾아 나오고, 본래로 되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말의 뜻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행사를 되새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곤경에서 욥을 돌이키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먼저 영적인 축복입니다(욥42:5-9)

그것은,
1) 영의 눈이 열린 축복입니다(욥42:5).
욥기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욥의 신앙이 관념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의 상태에서, 직접적이고,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신앙의 단계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신앙과 지식이 더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밝아지고, 중(重)하여졌음을 보여 줍니다. 열열한 확신 속에 들어간 상태를 가리킵니다.

2)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깨달은 축복입니다(욥42:6).
욥기 42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극한 환난 속에서 자기 스스로가 말을 하고, 헤아릴 수 없는 무지한 말로 하나님을 향하여 짜증내고 불평했던 일이 있었습니다(욥42:3).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행사에 항변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학대하고, 이웃과 친구들을 원망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 한」하고 하나님께 회개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존숭한다고 하였습니다.

3)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정당하다고 인정을 받은 축복입니다(욥42:7, 8).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에게 노하시고, 자기의 종 욥의 말이 너희들보다 정당하다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종 욥을 괴롭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친구들에게 노하시고, 저들 세 친구보다 욥이 의롭다고 변호해 주었습니다.

4) 제사장적 축복을 받았습니다(욥42:8-10).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욥에게 가서 회개의 번제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욥42:8). 그때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사죄와 축복의 기도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욥42:8). 욥의 친구들은 그대로 행했고, 또 욥은 벗들을 위하여 용서와 축복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욥42:9, 10). 그 결과 세 친구들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화평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남들을 위하여 기도함이 축복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누는 축복이고, 주는 축복입니다. 바로 복음의 제사장들이 받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받은 큰 사명이요, 축복입니다(롬15:16).

2. 육신적 축복입니다(욥42:10-16).
1) 그것은 욥의 건강 회복입니다.
바로 욥기 42장 10절 중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제 여호와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렀던 고통의 질병에서 완전히 건강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2) 물질적 축복이었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했습니다. 욥기 42장 12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 만 사천과 약대 육 천과 소 일 천 겨리와 암나귀 일 천을 두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위로의 축복입니다. 배(培)나 더하는 물질적 축복이 왔습니다.

3) 사회적 명예의 축복입니다.
욥기 42장 11절에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욥에게는 새로운 대인 관계, 대 사회와의 관계가 재개되었습니다. 저들이 욥에게 와서 예물을 표징으로 드리는 행위는 새로운 유대 관계의 형성을 입증하는 표식이었습니다. 과연 그는 다시 동방 우스 땅의 가장 큰 자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욥1:3).

4) 자녀의 축복입니다.
욥기 42장 13절에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자식은 배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배의 축복이 됩니다. 그것은 저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다시 부활의 몸으로 만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의 딸들은 전국에서 으뜸가는 아름다운 딸들이라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욥42:14, 15). 그 첫째 딸의 이름은 「여미마」인데 ‘비둘기’를 의미했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긋시아」인데 ‘향이 나는 계수나무’를 의미했습니다. 셋째 딸의 이름은 「게렌합북」인데 화장할 때 쓰는 ‘물감’을 의미했습니다.
성경이 욥의 다시 받은 딸들의 아름다움을 언급한 것은 당시 근동 사회에서 딸들의 아름다움은 그 집안의 자랑이자 큰 축복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영적인 의미는 딸들의 아름다움은 밝음을 의미합니다. 유쾌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욥의 가정에 새 희망이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욥42:15)고 하였습니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희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딸들에게 산업을 분배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5) 장수의 축복이었습니다.
욥기 42장 16절로 17절에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대 70인역(LXX)에는 욥이 70세 때 환난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210년을 산 셈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고, 다만 욥이 환난 후에 140년을 더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경우든, 그는 장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장수는 ① 육신의 장수였습니다. ② 영의 장수, 곧 신앙의 장수였습니다. ③ 부의 장수였습니다. ④ 명예의 장수였습니다. ⑤ 자녀의 장수, 곧 계대적인 축복이었습니다.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3주간 동안 욥이 당한 ‘고난의 의의’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동방 우스 땅의 큰 사람, 곧 큰 경건, 큰 물질, 큰 인품의 사람 욥을 ‘고난이라는 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욥이 고난이라는 학교에서 얼마나 공부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욥기 7장 3절에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하는 말을 볼뿐입니다. 여기 ‘여러 달’이라고 하는 시간이 얼마간의 어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긴 시간’임을 시사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이 고난이라고 하는 학교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화’라고 하는 과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이라고 하는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고난 가운데서 이런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하였습니다.
여기 ‘단련’은 순금을 빼어내는 재련소와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뜨거운 불에 모든 불순물이 다 타버리고 순수한 순금만을 뽑아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우리가 아는 알프레드 웰레스(Alfred Wallace, 1823-1913)는 영국이 낳은 20세기의 위대한 자연주의 학자입니다. 하루는 그가 산누에 나비의 일종인 천잠나방의 새끼가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웰레스는 고치를 잘 찢어주어 나방이 힘들지 않고 쉽게 나오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쉽게 나온 나방은 힘들이고 나온 다른 나방과는 달리 날개만 파닥거릴 뿐 날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나방이 좁은 구멍으로 빠져 나오려고 애쓸 때 날개의 어깨 부분에 몰려 있는 영양분이 날개 전체에 퍼져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힘으로 날 수 있는 것인데, 쉽게 고치에서 빠져 나온 나방은 날개와 어깨에만 힘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해서 날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웰레스는 새끼 나방이 반드시 그 고통의 과정을 거쳤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돌과 섞인 금 덩어리가 순금이 되기 위하여는 불에 녹여 불순물을 없애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온다」는 고난의 참 맛을 배웠습니다.
참 성도는 시련을 받은 후에야 광채를 발하는 빛의 인격이 되어집니다. 강한 바람에 많이 흔들린 나무의 뿌리는 더 튼튼하고, 그 나무의 무늬는 아름다운 목재로써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평안 중에서만 살고, 또 고난을 받을 때 즉시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도와주신다면, 연단 받을 기회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나무에서 핀 장미꽃은 더 진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바다 속에 진주는 더 고귀하게 보입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더 진한 향기를 토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통과하는 고난의 동체(胴體)는 예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십자가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닌가 십자가의 학교에서만이 진정한 고난의 의의를 배우게 되고, 알게되고, 찾게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학교에서야말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공의의 심판과 용서하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난의 여정 속에서만이 믿음이 성장하는 성화의 진보를 맛봅니다. 십자가의 학교에서만이 부활과 영생의 축복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예수 때문에 욕을 먹고, 죽음에 이르는 환난을 받을 때, 오히려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역설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마5:10-12).
욥은 고난의 학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배웠습니다. 성화의 은총을 배웠습니다. 마침내 축복의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필수과목이 아닌가 그리고 확실하게 약속된 미래 보장의 보증이 아닌가
할렐루야!
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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