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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사모할 말씀의 부흥 (느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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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전도자 요한 웨슬리의 집에 청년 강도가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자기 지갑에 있었던 돈 모두를 끄집어내어 그에게 주면서 형제여, 이렇게 합시다. 이것을 당신이 강제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합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차이란 말이요대꾸하며 돈을 받아들고 돌아서서 집을 나가는 강도를 요한 웨슬리는 다시 불렀습니다. 잠간만 내가 당신에게 줄 선물이 하나 더 있오. 이 책을 가져가시오. 강도는 황급하게 그 책을 나꿔채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책은 웨슬리가 귀한 손님들에게 전달할 용도로 준비된 잘 포장된 성경이었습니다. 수년후 어느 집회에서 웨슬리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웨슬리에게 이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해 전 목사님의 집을 방문해서 선물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 때 돈과 함께 선물로 주신 성경을 읽고 저는 회개하고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저도 오늘 목사님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때 받았던 돈의 갑절입니다. 이 돈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써 주시고 저를 목사님의 동역자로 받아 주십시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로 한 가정의 운명이 때로는 한 민족의 운명이 바뀔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런 힘을 가진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어떠할까요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으로 만물이 보존되고 지탱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거듭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재건된후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에스라(학사:서기관)라는 영적 지도자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재건하는 일을 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의 재건은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마음의 재건없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로운 내일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런 마음의 재건을 가르쳐 부흥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수문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부흥은 바로 말씀으로 말미암은 부흥이었습니다. 이 시대 이땅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이런 말씀의 부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부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건강을 위해 우리의 소망과 승리의 삶을 위해 이 책을 주셨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이, 이 성경이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책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예루살렘 성의 건축에 바빴던 이 백성들은 이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성의 건축만으로 그들의 내일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책(토라, 모세 5경)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합니다. 1절을 읽어보십시오. 당시에는 성경 사본이 희귀했기 때문에 개인 소장은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적으로 모여 말씀을 읽고 들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5절에는 이 성경이 읽혀지기 시작할 때 온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말씀의 권위앞에 존경을 표현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이 말씀의 한절 한 절이 읽혀 질 때마다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볼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그들이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는 그들이 성경을 읽는 일에 어떻게 몰두했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3절에 의하면 그들이 성경을 혹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 봉독을 얼마동안 했습니까 새벽부터 오정까지-적어도 6시간 이상을 한 것입니다. 지금 주일 아침에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 도망가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하루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 8장 마지막 구절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초막절 절기가 계속되는 한주간 이상 날마다 그렇게 말씀을 읽고 듣는 일에 몰두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씀의 부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휴가철에 조용한 곳에 가서 가족들이 돌아가며 하루에 4시간이상(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성경읽기를 하는 이런 휴가도 계획할수 있기를 제안해 보고 싶습니다. 가정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읽기는 모든 축복의 시작입니다. 모든 바람직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계1:3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본문에는 깨달음의 중요성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 무려 6번이나 이 깨달음이라는 의미, 영어로는 understanding'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선2-3절에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알아들을만한 이들에게 읽혀져야 한다고 기록됩니다. 7-8절에 보면 여러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는일에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12-13절에 보면 밝히 알게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자, 이런 목적으로 그들은 수문앞 광장에 온 백성이 모여 에스라가 읽는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목적으로 집중하여 듣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의 영적 지도자들의 중요한 소명은 이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변함없이 설교자의 소명이 바로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설교의 여러 가지 스타일 중에 강해설교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강해설교는 제목설교와 달리 본문을 성실하게 해석하여 그 뜻을 깨우치는 것을 생명으로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바로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왜 깨달음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깨달은 만큼만 실천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QT의 생명도 본문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깨달은 그 만큼만 그 말씀을 붙잡고 살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말씀을 많이 읽어도 깨달음이 없이는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의 장에 성육신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무리 음식을 많이 먹어도 우리가 그 음식을 소화하지 못한다면 그 음식은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많이 먹고 소화하지 못하고 다 토해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많이 읽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적절한 분량을 읽고 성령님의 깨우치심을 기도하며 묵상하십시오.

3.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읽고 깨달은 말씀이 육화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그 말씀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반응을 다시 두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정서적 반응과 의지적 반응이었습니다. 어떤 정서적 반응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무엇보다 눈물과 기쁨으로 반응했습니다. 9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왜 울었을까요 말씀에 감동된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전체의 문맥을 읽어보면 이 눈물은 그들의 죄에 대한 말씀의 지적앞에 흘린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깨달은 말씀을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12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때에-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고 선포합니다. 성도 여러분! 최근에 눈물과 기쁨으로 말씀을 읽고 받으신 때가 언제 였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필요한 때라고 느끼지 않으시는지요 본문에서 이런 진지한 정서적 반응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보다 중요한 의지적 반응을 준비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의지적 반응은 다시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이 말씀을 통해 받은 축복을 이웃들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고-그것이 바로 성령을 경험한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동일한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느헤미야 9장이하를 읽어보면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이 듣고 깨달은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보여준 궁극적인 반응은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돌아온 에스라의 비전이 아니었습니까 에스라7:10을 읽어보십시오.에스라가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느헤미야의 비전이 성벽재건(하드 웨어)이었다면 에스라의 비전은 마음의 재건(소프트 웨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먼저 이 말씀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안에서 일어나는 말씀의 부흥은 새 시대를 가져오는 부흥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이런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말씀의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수년전 공산주의가 무너지기전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극장에서는 턱시도를 입은 예수라는 제목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반신적인 연극이 상영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주인공 예수 역으로 출연한 사람이 알렉산더 로스톱제브(Alexander Rostovzev)라는 미남배우 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교회 나가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그가 주인공으로 결정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연극의 절정에서 그는 예수의 산상수훈 두 구절을 낭독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5:3-4) 이 말씀을 읽던 그는 두차례 더 반복하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연극을 지휘하는 스탭들은 다음을 진행하라고 무대뒤에서 싸인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무대에 무릎을 꿇습니다. 무대의 막은 내려졌고 연극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날 그는 예수를 모독하는 역할대신 예수앞에 돌아와 예수를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말씀이 가져온 승리요 부흥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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