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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를 기다리는 자 (눅 0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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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데일 카아네기의 사무실에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커다란 거룻배의 그림 한 점이 걸 려있었다고 합니다. 노는 모래 위에 놓여있고, 배는 무척이나 낡은 것 같은 그러한 배의 모 습을 하고있습니다. 썰물에 모래 위 언덕에 이렇게 걸려있는 배를 그린 그런 그림입니다.

마치 모래언덕에 버려진 것 같은 그림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그림은 처량하게 아주 쓸모 없이 내버려진 것 같은 그림, 그 배 한 척이 그려있는 그림이지만은, 문제는 그 그림 밑에 한 줄의 글이 쓰여져 있는데, 그 글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씌여 있었답니다. 반 드시 밀물 때가 온다. 지금은 썰물이 돼서 물이 다 빠져나가서 이 배가 이렇게 모래 언덕 에 걸쳐있지만은 반드시 밀물 때가 와서 이 배를 물위에 띄워 놓을 것이다. 그리할 때에 이 낡은 배도 쓸모 있게 쓰여질 때가 올 것이다. 반드시 썰물이 있는가하면, 또 밀물 때가 있 다. 그래서 밀물 때를 기다리는 이 낡은 배 한 척, 이 거룩의 모습을 그 사무실에 늘 걸어 놓고 그는 그 그림을 보면서 무엇인가 깊은 생각을 했더랍니다.

 윌리암 말스톤(Dr.William Marston)이라고 하는 심리학 박사님께서는 삼천 명을 상대로 해 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에 94%가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다는 겁 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 그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었다는 겁니 다.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소식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회를 기다리고, 좀더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좀더 좋은 세월을 기다리고, 좀더 발전되기를 기다리고……. 무엇인 가 무던히 기다리는데 그 많은 세월들을 또 그 마음을 쓰고 있었다고, 그렇게 평가하고 있 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게 뭡니까 현대인은 언제나 현재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미래를 향해서 기다립니다. 기다리기는 하는데 기다림에 합당한 행동은 또 없습니다. 또 그 기다림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사색도 비판도 연구도 없이 막연하게 기다립니다. 프랭클 박사 님은 자기에게 많은 고민을 가지고 찾아오는 정신병 환자들에게 아주 강한 충격적 질문을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정신의 그 약한 점을 치료하도록 조치했다고 합니다. 지금 뭐 고 민이 많아서 뭘 어쩌구 어떻구, 이래서 못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을, 다 듣고 나서는 한 마디 딱 찌르는데, 그러면 왜 아직도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보니까 꼭 죽을 지 경인데 왜 안 죽었냐 그 말이오. 그러면 그때 가서야 아, 그 이유가 있지요. 이래서, 혹 은 자녀들 때문에, 혹은 명예 때문에, 혹은 가정, 가문의 명예다, 혹은 한 가닥 믿는 내 신 앙 때문에……, 뭐 뭔가 이유를 들기 시작한대요. 바로 거기서부터 생각을 다시 하라. 그래 서 그 생의 궤도를 수정했다 하는 얘깁니다.

 어떤 글에 보니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목표가 있고, 사랑이 있고, 꿈이 있으 면 살만하다. 돈은 없어도 됩니다. 때로는 건강이 없어도 됩니다. 목표가 있고 사랑이 있고 꿈이 있으면 충분히 살만하다. 왜요 목표가 있으면 길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친구가 있습니다. 꿈이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살만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 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라고 하는, 이것이 두 가지로 설명이 됩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방 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희망사항'이라고 하는 기다림입니다. 막연한 바램입니다. 좀 나아 지겠지, 행여 좀 나아지겠지. 하는 겁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로부터 미래로 생각하 는 막연한, 아무 내용도 없는, 아무 보장도 없는, 그러한 바램이 있습니다. 이것을 '희망사 항'이라고 합니다. 전 그래서 '희망'이라는 말을 좋아 안합니다. '소망'이라는 말이 좋아 요. 왜냐하면 소망이라는 기다림은 약속이 있는 겁니다. 객관적 약속이 있고, 내용이 있고, 그 미래로부터 현재로 생각게 하는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있는 바람, 약속을 받은 그러한 바램이 바로 소망입니다. 결정적 미래로부터 약속된 미래로부터 주워지 는 바람, 그것이 소망이기 때문에 저는 소망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기다림이, 그 내용이 내 현재의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과거가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거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가진 꿈이요. 내가 가진 소망, 그것에 의 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이올시다. 미래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올시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성은 그가 생각하는 그 사람과 닮은 아이를 낳는다.' 누구 미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 닮은 아이를 낳을 거예요. 열심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면 그 사람 닮는 아이를 낳는 답니다. 유명한 소설가 토마스 하디의 소설 중에 그런 '환상의 여인 '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바로 이것을 주제로 합니다. 어떤 여인이 시를 읽었는 데, 그 시인을, 그 시를 쓴 시인을 사모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속으로. 그러나 한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뭐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러나 마음속으로 그 시를 또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시인을 마음속에 그리워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보니깐 그 시인 닮은 아 이를 낳아 놓았어요. 남편으로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이것이 진행되는 스토리의 내용입니 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누구를 열렬히 기다리고 있습니 까 바로 그 사람을 내가 닮게 될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나라는 존재가 그 미래적 이미지 로 화해가고 있다는 것이올시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하는 것도 생각이고, 미워하는 것도 생 각입니다. 그런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하는 만큼에 존재가 되어진다는 걸 잊지 말아야합니 다.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야하겠습니까 그 꿈이, 그 소망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오. 무엇 을 기다리며, 얼마나 기다리며, 그리고 어떻게 기다려 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한 신앙입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은 그는 물질적인 어떤 풍요로움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인 것을 기다렸고, 그는 자기 자신만의 영달이나 안위를, 또는 좋은 일이 있어지기를, 자기를 위해 기다린 것이 아니에요. 만 백성,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만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는 우주적 구원에 그런 미래를 생 각하며 기다렸습니다. 또는 내 방법대로 기다린 게 아니오. 내가 생각하는 시나리오대로 미 래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길! 그 의 방법대로, 그의 계시하신 말씀을 따라서 그를 기다리고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조금 어려 운 신학적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마는, 이런 기다림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정리합니다.

'The Messiahnic Age'를 기다린 것이 아니고, 'The Messiah'를 기다린 것이다. '메시아의 세대'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다. 이렇게 정리됩니다. 이 무슨 말씀이고 하니, 일반적으로 메시아의 시대라 함은 전쟁도 없고, 평화롭고, 빼앗기고 빼앗는 것도 없고, 평등하고, 번영하고, 자유롭고, 모두가 평안하게 사는 어떤 그런 유토피아적인, 바로 그런 세대, 그런 세상 오기를 기다리는 거요. 이게 바로 '메시아의 세대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 많은 철학들이 전부 엄격하 게 말하면 '메시아니즘'입니다, '메시아니즘'. 그 좋은 세상을 기다리고, 좋은 세상을 만들 어 보겠다고 저마다 외쳐봤지요. 노력 해봤지, 혁명도 해봤지, 싸워도 봤지……. 그러나 그 세대는 오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기만 합니다. 여러분, 메시아의 세대, 좋은 세상, 그것을 기 다리는 믿음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그 메시아를 기다리는, 오로지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신학적으로 정리하면은 'A Christ'냐, 'The Christ'냐 하는 말을 합니다. '한 그리스도'냐, '그 그리스도'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말씀은 '그 그리 스도', '그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죠.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 람들의 '메시아 사상'은 대단합니다. '메시아 대망사상' 대단합니다.

 예수께서 오심도 바로 그 '메시아 대망사상'의 맥락에서 설명이 되고, 또 예수께서 십자가 를 지시게 되는 사건도,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도 알고 보면, 바로 이 '메시아 사상'의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무한히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그런 '추상적 메시아니즘'이 있습니다. 그 저 좋은 세상 올 거다. 막연하게 무한히 미래적, 그러한 대망 관련이 있단 말이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문젭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아무 약속도 없는데 그냥 기다리고, 좋은 때가 올 거다. 그저 기다려봐. 이것처럼 무서운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마치 무지개를 쳐다보는 것처럼 무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 었으면 성취를 믿어야한다는 거죠. 약속과 성취가 함께 있어서, 비로소 바른 대망신앙이 되 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우리의 이 소망의 지계표를 자꾸 옮겨서는 안됩니다. 제가 아는 장 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연세가 높으세요. 한 칠십 훨씬 넘은 그런 분이, 늘 날 보고하는 말 이 나는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내 딸이 하나 있는데, 큰 딸이 있는 데 이미 사십이 넘었는데 아직 시집을 못 갔어요. 뭐 본인은 뭐 생각 없이 자기 나름대로 생을 즐기고 살아가고 있지만은 부모의 마음을 그렇지 않아요. 저게 빨리 시집을 가야겠는 데……, 싶어요. 그래서는 저 딸이 시집가는 걸 보고 죽으면은 한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늘 그러시더라구요. 저거 딸을 시집가는 것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고 그런데 고맙게 도 옛날에 대학 다닐 때 연애하던 총각인데, 또 장가 안 가고 늙어 가는 게 하나 있더라구 요. 그래서 서로 어떻게 오랜만에 만나고, 만나고 해서 우리 다 때늦었는데, 우리끼리 삽 시다. 뭐 이렇게 된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많이 가까웠던 것 같지는 않은데 결혼이 됐어 요. 제가 결혼 주례를 했습니다.

 주례하고 같이 그 장로님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 장로님, 내가 하나 물어봅시다. 그 딸 시 집만 보내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는데, 이제 딸 시집갔으니 아무 소원도 없겠고만요 했더 니, 장로님 빙그레 웃으시면서 저게 뭘 하나 낳을 수 있을까 그래서 또 뭘 하나 나가지 고 아주 시집 장가까지 보내지 그래요 그냥 그러고 말았습니다마는, 보세요. 여러분 소원 이라는 어떻게 됩니까 어떤 때 우리 부모들 보면은 저 내 아들, 저거, 저 대학입학 하는 거 보고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대학입학하고 나니까 또, 이젠 또 졸업하는 것보 고……. 졸업하고 나니깐 취직하는 것보고……. 장례식까지 보고 그래요. 우리 인간들 이 소원이라는 게 자꾸만 옮겨가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있는데, 옳지, 하나 님이 이것을 내게 주셨다. 나는 다 이루었다. 나는 아무 소원도 없다. 좀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신바람 나겠는데……, 뭐 그렇게 욕심이 많은지. 저도 모르는 욕심을 그냥 따라가 고 있는 거예요. 약속을 믿는 자는 성취를 믿어야 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이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이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자,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준비를 해야지요. 경건한 생활로 거룩함으로, 내일을 기 다리는 자의 마땅한 준비가 있어야지요. 좋은 날은 기다리면서 아무 준비가 없다면, 이 얼 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하신 말씀을 보세요. 아시는 대로 열 처녀 비유를 보니깐 신랑을 기다린다. 신랑을 기다리면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준비는 없이 기다리는, 이게 바로 어리석은 처녀죠. 안 그렇습니까 아 시집 갈 날을 기다린다면, 그 신랑과 살 그때를 생각하며 차곡차곡 준비해야 될 것 아닙니까 자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서 여러분, 죽음을 준비하셨습니까 주님 만날 준비를 하셨습니까 영 원한 하늘나라에서의 그 영광을 누릴 준비를 했습니까 어차피 이 세상은 떠나야 돼요. 이 건 어차피 멀어질 것이고, 나와 상관없는 거예요. 다가오는 미래를 약속의 땅, 약속의 시간 을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또한,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 날을 준비하느 라고, 그 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오늘의 어떤 고난도 개의치 않고, 순교의 죽음도 아주 넉 넉하게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이 성취 문제에 대하여 이것을 현실화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서 주님을 기다렸으면, 이제는 만나야지요. 만났으면 영접해야지요. 나는 이 성경, 예수님 나심을 중심해서 되어지는 사건 속에 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동방박사가 예물을 준비 해 가지고 와서, 아 헤롯 궁전을 찾아와서 말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나라에 오신 메시아 가 어디서 나셨느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구요. 온 소동을 했어요. 이 때문에 소동은 해놓 고, 베들레헴에서 낳았을 겁니다. 하고 지시하고는 박사들은 그리로 갔는데, 예루살렘 사 람들이 그리로 갔다는 얘기가 없어요. 떠들기만 하고, 소란만 하고, 자기들은 안 갔어요.

이게 문제란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 교인, 서기관, 제사장……. 당 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도 간절하게 메시아를 기다렸고, 가르쳤지만 진작 예수님께서 오실 때는 영접하지 않았어요.

 성경에 아주 시적이면서 우리 맘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 뭡니까 나실 곳이 없어서, 사관에 용납할 곳이 없어 말구유에 나셨다는 얘깁니다. 주님이 오실 곳이 없어요. 아무도 영접할 수가 없어서 말구유, 외양간에서 나셔야 했다는 그 사정. 그때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헤롯은 예수님의 나심을 아는 순간 벌써 죽이려고 듭니다. 가야바도 그를 죽 입니다. 왜 자기의 보좌를 양보하기가 싫어서. 자기 부정이 어려워서 익숙한 곳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자기 왕좌를 예수님께 드리지 못했어요.

그런고로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이 얼마나 마 음 아픈 얘기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믿음을 구체화 해야됩니 다. 약속 안에서 오늘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취된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시므온 보세요.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 에 그에게 주어진 게 뭡니까 나이 많은 노인입니다. 빵이 주워집니까, 옷이 주워집니까 그러나 그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기다리다가 만나고, 그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겠습니다. 그런 내 용입니다. 만족함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한 그것으로 충만합니다. 더 바랄 것 이 없습니다. 앞에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이미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메시아를 영접한 그 감격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왜 오늘 내가 사는 모든 현실과 생활, 그 자체가 약속의 성취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은혜 안에서 가장 뜻 있고, 가장 만족한 주님을 영접한 자의 충만함이 있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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