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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생명 (요 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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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어떤 청년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습니다.왜 자살하려고 했느냐 하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공부하던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가서 그는 좌절에 빠졌습니다.돈벌이를 해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그는 모든 인간과 가족에게서 배신당한 것 같고 버림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설상가상으로 그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여인도 그를 떠나 갔습니다.그래서 그는 독약을 먹었습니다.아무리 해도 잃어 버린 삶의 의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그의 친구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살려냈습니다.그는 친구를 원망하면서 나는 티끌만큼도 삶의 의욕이 없다.그러니까 제발 내게 죽음이라는 안식을 허락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그에게는 삶의 의욕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혼탁한 죽음 속을 그대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그러자 그 친구는 '인간의 말과 힘으로는 이렇게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을 살려 낼 길이 없다.오직 생명의 주이신 창조주의 손길이 이 생명을 터치(touch)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그에게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말했습니다.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고,기쁨이 없었던 사람에게 기쁨을 주시고,죽음에 처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처음에는 희미하게 거부를 했지만 자꾸만 그 친구가 주장하자 마지 못해서 기도하기로 했습니다.그리하여 두 사람은 기도했습니다.기도하고 있는 동안 그 청년의 마음 속에서는 그 동안 멈추었던 거문고의 모든 줄이 울리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꺼져 버렸던 등불이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모든 것이 생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그는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되었습니다.기도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창조주의 손이 그를 터치(touch)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입니다.어둠에 빛이 비추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20장 30,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
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 복음서(마태 복음,마가 복음,누가 복음)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반면,요한 복음의 경우는 '영생'(Eternal Life) 즉,사람들로 하여금 빛과 생명이신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이 보좌 주위에서 보았던 네 가지 생물은 각
기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 복음)의 특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
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마가 복음은 소의 특징과 비슷하다 하여 소의 복음이라고 합니다.소는 인간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동물로서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그의 가죽과 뼈와 살은 인간들에게 바쳐지는 최고의 희생적인 동물입니다.이처럼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특성도 생명까지 희생하며 봉사하시는 주님으로 부각되어,말씀보다는 행동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누가는 의사였기에 그의 시각으로는 예수님께서 소외된 자들,특히 많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신 점에 감명을 받아 사랑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사자로서 비유되는데,사자는 동물들의 왕으로서 권세를 가진 동물입니다.그래서 이 복음에서 부각된 예수님은 율법을 권위있게 해석하고 귀신을 내어쫓는 높은 권세를 가진 왕으로서,메시야로서의 주님을 강조했습니다. 독수리는 요한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오직 독수리 만이 태양을 직시할 수 있으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으며, 요한이 모든 신약 성서의 저자들 중에서 영원한 신비와 영원한 진리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바로 그것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책에서보다도 요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더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빛과 생명이신 하나님을 직시할 수 있는 복음이 바로 요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 요한 복음서를 통해서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신령한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인 20장30,31절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서 그 중요성을 인식합시다.20장30,31절에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표적'(sign)과 '믿음'(believe),그리고 '생명'(life) 등입니다.
첫째, 표적(sign)이란 단어는 요한이 개성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예수의 권능과 인격을 변증하는 단어입니다.
요한 복음 안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개의 표적이 있습니다.
(1).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표적(2:1-11)
이는 예수님의 첫번째 표적으로, 물이 즉각적으로 기쁨의 상징인 포도
주로 변화된 질(質)의 변화이며,예수님이 질(質)의 주(主)(the master of quality)이심을 나타냅니다.예수님은 무(無)맛의 물같은 인생을 포도주 맛 같은 '기쁨'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권능,삶의 질(質)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예수님을 믿어 여러분의 삶이 참된 기쁨의 삶으로 변화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표적(4:46-54)
가나에서 20마일 이상 떨어진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을 고치신 표적입니다.이는 예수님이 거리(距離)와 공간(空間)의 주(主)(the master of distance,or space)이심을 나타냅니다.

(3).38년간이나 반신불수였던 난치병자의 치유 표적(5:1-9)
38년간이나 짊어진 난치의 고통을 치유하심으로 예수님은 시간의 주
(the master of time)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서'(here and now)그의 권능과 능력을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시고 있습니다.'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믿어 그의 능력과 권능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5천명을 먹이신 떡의 표적(6:1-14)
한 소년의 점심에 불과했던 양(量)으로 부녀자나 어린이들을 제외한 장정만 5천명을 충족시켰고,그러고도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이 표적은 예수님이 양(量)의 주(the master of quantity)이심을 말합니다.예수님을 믿어 부족함이 없이 모든 면에서 충족되시는 참 만족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물위로 걸어가신 표적(6:16-21)

이 표적은 예수님이 자연법(自然法)의 주(the master over natural law)되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6).태어날 때부터의 소경이 치유된 표적(9:1-12)-
이 표적은 불가능의 치유라고 하는 측면만이 아니라, 그의 불행이 누구
의 죄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운명(運命)의
주(the master of misfortune)되심을 보여 줍니다.
불행과 저주의 인생은 예수님을 믿어 행복과 축복의 인생으로 그 운명을 변화받으시기를 바랍니다.

(7).죽은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46)
이는 예수님이 사망(死亡)의 주(the master of death)이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망아,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아,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고 외치고 있습니다. '사망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어 생사(生死)를 초월한 당당한 삶을 영위(營爲)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의 표적은 인간이 도시 어떻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정황(限界情況)이면서 인간사항(人間事況,the factors of life)에 개입하는 예수님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요소들입니다.예수님은 이러한 불가능의 범주(範疇) 하나 하나를 극복하셨습니다.예수님을 '믿어' 여러분의 삶의 정황(情況,Sitz im Leben)에 빛과 생명의 역사(役事)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믿음'(that you may believe)이란 단어입니다.위와 같은 여러가지
표적들을 보이신 것은 바로 인류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함'(that you may believe)입니다.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즉 수용이 아니면 거부입니다.수용 여부(受容 與否)에 따라 삶의 중대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하는 것은 삶의 빛과 어두움,생명과 죽음,행복과 불행,축복과 저주 등을 가늠하는 중대하고 완전한 생애의 결단(a complete personal commitment)입니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인 일곱 가지의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전적(全的)으로 믿는 결단을 내리도록 하려는 목적인 것입니다.
셋째,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that you have life)는 말입니다.성서는 언제나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제시(提示)하지 않고는 결단(決斷)을 요구하지 않습니다.예수님의 표적을 제시함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믿어야 할 인격자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히 '빛과 생명'인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인간의 모든 불가능의 한계정황(限界情況)이 극복되어 나타난 예수님의 표적은 인간의 구원과 생명을 실현하고 충족시키는 예수님을 보여주기에 족한 것입니다.
'표적'으로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나타나고,'신앙'은 초대(招待)에 대한 반응이며,'생명'은 믿음의 결과입니다.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도록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진정한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두 주인(two master)은 바로 '빛과 어두움'을 말합니다.세상에는 '빛의 자식(子息)들'(the children of light)이 있는가 하면,다른 한편에는 '어두움의 자식들'(the children of darkness)이 있습니다(라인홀드 니이버).
빛은 절대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어두움은 상대적 개념으로 죄로 말미암아 절망과 죽음 상태에 처해 있는 인간 세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천지 창조시에 제일 먼저 창조된 것은 빛입니다.빛이 있으라하는 말씀의 역사가 먼저 있었고,다음 그 빛으로부터 이어져서 모든 식물,동물 등 생물들이 창조되었습니다.즉 모든 생물들이 빛에 의존하게끔 만들어졌습니다.빛을 떠나서는 어떤 생물도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처럼 빛되신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도 생명이 없습니다.그리스도없는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예수 믿지않는 사람은 마음이 어둡고 혼돈 상태에 있게 됩니다.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마음 속에 밝은 빛을 지니며 자신도 모르게 많은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빛이며 우리는 이미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이게 합니다(창1:1-3).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
(秩序,cosmos)를 가지게 되었습니다.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아니함으로(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음)빛의 아들로서 빛의 능력을 되찾을 수 없는 파멸과 어둠의 자식이 되었습니다.이것이 인류 최초의,인류 모두의 타락이었습니다.둘째 아담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똑 같은 유혹을 받으셨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며 말씀을 순종하심으로 어둠을 물리치셨습니다.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빛과 생명을 주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에 빛과 생명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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