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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류의 필요 (창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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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재난이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킨 후에, 이 세계는 어떤 세계가 되었을까에 대해 많은 저술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끊임없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세계 속에 등장한 최초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러한 의문의 답을 알았던 사람들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왜냐하면, 홍수 후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은,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영적으로 볼 때, 홍수는 두 가지 측면 모두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노아는 영적 중생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주 속에서 보호를 받으며, 심판의 물을 통과해 나왔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치 기독교인이 죽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으로 옮겨진 것과 같다.
창세기 12-50장은 이 새 생명에 속하는 세 가지 위대한 진리를 추적하고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라는 4명의 사람들의 삶속에서 창세기는 인간이 항상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옳은 것에 대한 감각인 정의-인간은 죄의 감정이나 불의를 미워하고, 항상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받아 들여지기를 원한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적 행복에 대한 감각인 평화-인간은 평온과 평화라고 밖에는 표현될 수 없는 내적 확신을 지금까지 추구해 오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에 대한 비밀이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 속에 담겨있다. 이 두 사람은 부자 관계와 하나님께 바쳐짐을 묘사해 준다.
인생에 대한 행복과 즐거움의 감정인 기쁨-이것은 인생 그 자체외에 다른 어떤 증거자료가 필요 없을 만큼 분명하다. 요셉은 영광의 기쁨에 대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준다.
이 세 가지 덕목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고 거의 깨닫지 못하는 인생의 목적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들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로마서14;17에서는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이러한 것들을 주실 수 있다. 이것이 창세기 나머지 부분의 이야기이다.

1. 인간은 정의를 찾는다 (창12-25)

아브라함은 그의 전 인생은 믿음에 의해 정의를 이루어 가는 과정, 또는 신약에서말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을 예시해 준다. 그는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음으로써 성경에 비로서 등장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르에서 그를 부르심을 시작으로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아브라함은 믿음에 대한 8가지 교훈을 배운다. 이와 동일한 것들이 오늘날 모든 신자들의 삶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있고,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려진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은 친밀한 교제를 갖기 원하신다는 것을 그는 나타내 주고 있다.
첫번째 배워야 할 믿음의 교훈은 순종이다. 그것은 단순히 “ 나는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거기에 “ 나는 순종합니다”라는 말을 더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의 처음 만남에서, 아브라함은 지도 한장 없이 알지 못하는 목적지를 향해 보내 진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에게 길을 알려 주시겠다는 약속 하나 뿐이었다. 그 약속에는 7가지 내용이 포함된다.1) 나는 너를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2) 나는 너를 축복하겠다. 3) 나는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겠다. 4)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5) 나는 너를 축복하는 사람들을 축복할 것이다. 6) 나는 너를 저주하는 그들을 저주할 것 이다. 7)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 부르심이 아브라함에게 임했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종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우르를 떠나, 그의 아버지 데라가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갔다. 영적으로 이와 똑같은 것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발견된다. 즉 가족과 친지들의 자연인으로서의 요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의지가 신자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번째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지금은 비록 가나안 부족들이 점령하고 있는 땅이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 땅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은 장막과 제단이라는 두 개의 의미있는 상징들로 특징지워진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진행할 때마다 이 두 개의 상징들은 항상 존재했다. 장막은 그가 나그네임을 상징해 준다. 그는 결코 자신의 땅을 소유할 수 없었고, 그 땅 안에서 ‘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11;10)’을 찾는 체류자이어야 했다. 제단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적인 교류를 상징한다. 바로 그것이 적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에서 견디어 낼 수 있는 능력의 비밀이다. 모든 신자들은 적대적인 세상을 견디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제단을 갖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만의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야 한다.
믿음의 삶에서 아브라함이 배운 두번째 교훈은, 믿음은 인간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땅에서의 기근에 의해 시험을 받았다. 그는 하란 땅으로 다시 되돌아 가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러나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시도한다. 그가 애굽에 있는 동안에는, 장막이나 제단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의 약한 믿음은 아브라함을 그의 아내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하고, 애굽왕의 비난을 받게 한다. 그러므로, 실패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필요한 진리를 배운다. 즉, 어떠한 위협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초라해진 모습으로 후회하며, 아브라함은 그 땅으로 돌아 오고 다시 한번 장막과 제단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배운 믿음에 대한 세번째 교훈은 겸손이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기독교인 생활의 또 다른 원칙들을 보여준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르고 있엇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신자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었다. 땅의 사용을 놓고 아브라함과 롯이 거느리는 목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비록 늙고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믿음의 겸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 롯은 인간적인 지혜로 측정하여 소돔까지를 포함해서 그의 땅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땅을 얻었지만, 그 땅을 진정으로 소유하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롯이 선택한 땅을 포함해, 그 모든 땅을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교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이 비록 자신의 권리들을 완전히 포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실 것을 믿으면서 어느 경우에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네번째 교훈은 믿음의 담대함이다. 14장에는 동쪽에서 다섯 왕들이 연합하여 사해 계곡을 공격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나온다. 롯은 그들에게 사로 잡혔고, 이것을 통해 아브라함은 네번째 교훈을 배웠다. 수 적으로 열세였지만, 아브라함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시킨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들과 싸워 이겼다.
그가 승리해 돌아 오는 길에 왕곡에서 멜기세덱을 만났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의 과정 중에서 가장 그 정체가 희미한 만남이었다. 즉 그는 아브라함을 부요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소돔 왕의 제안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멜기세덱이 그에게 가지고 온 빵과 포도주로 허기진 배를 채운 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요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을 제외하고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믿음은 모든 자연적인 것들로부터 독립해 있다. 15장에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가 네번째로 직접 나타나신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이제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해 지나왔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자신은 피난처이시고, 보상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의 유혹까지도 함께 나눌 수 있을 만큼 커졌다. 하나님의 반응은 하늘의 별들과 같은 무수한 자손들을 그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믿었다. 그리고 성경에서 처음으로 다음의 위대한 구절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아브라함은 그가 가진 어떤 장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믿음에 의해서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상속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하셨고, 하나의 표시로 그것을 확신 시키셨다. 그 표시는 연기나는 난로와 고통의 난로를 비추는 한 등불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땅이 그들에게 허락되기 전까지는 애굽에서 고난받으며 살 것이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섯번째 교훈을 깨닫기 시작한다.
믿음은 견디고 인내한다. 16장은 아브라함이 두번째로 믿음에서 빗나간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지 12년이 지난 후 , 사라와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방편에 의지했다. 사라의 하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아내로 주었고, 그녀로부터 이스마엘이 나왔다. 이 장에서는 장막도 제단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갈의 끊임 없는 다툼을 통해 그의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루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갈을 집에서 내쫓고 말았다. 그러므로 15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은 16장의 육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먼 결과로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랍(이스마엘)과 이스라엘(이삭)사이의 분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를 그녀의 여주인에게로 돌려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다섯번째 나타나신다. 그리고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 주심으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 이것은 신약에서 ‘새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믿는 자들의 매일의 행동을 위한 방패가 되겠다고 기꺼이 응락하신다. 이것은 ‘엘쉐다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이름을 계시하심으로써 확실해 진다. 그 이름의 의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 새로운 언약의 표시는 할례이다. 그것은 살가죽을 베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내적인 진리를 밖으로 드러내 주는 표시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전에 이스마엘을 낳은 데서 약간 비틀 거린다. 그러나 여호와는, 이삭과는 달리 이스마엘은 믿음으로 난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약속한 상속자가 될 수 없음을 고통스럽게 설명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 차이에 대해 갈3;15-18에서 논쟁하고 있다 )
다음 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섯번째 나타나신 기록이 있다. 하나님은 약속한 아들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려는 그의 계획을 밝히신다. 아브라함이 장막 문가에 앉아 있을 때 나타난 세명의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한다.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것이 두 천사를 거느리고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서서히 깨달았다.
장막 문 뒤에서 엿듣고 있던 사라는 그녀가 일년 내에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듣고 웃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그녀를 만나 주신다. 그는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창18;14)’ 라고 물으셨다. 사라는 그녀의 아들이 태어남으로써, 비로서 믿음이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과 같이 강해졌다.
그리고 나서 여호와는 그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그를 오게 한 두번째 목적, 즉 불신과 악함이 극에 달한 도시를 즉시 파괴시키시겠다는 생갹을 알려 주셨다. 여기에서는 믿음의 권위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롯과 그의 가족과 소돔의 거주민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브라함은 경건한 마음으로 멸망할 운명의 도시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탄원했다. ‘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25절)’ 하나님의 성품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기초해서 그는 하나님께 이러한 탄원을 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자비를 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신자들 속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제한시키고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표현된 것과 같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한 것 이상을 들어 주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열명의 의로운 사람들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두 명이나 세명만이라도 있다면 구원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방문한 두명의 천사들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롯 자신은 의인이다. 그러나 그의 의로움은 많은 소돔의 풍습에 동화되고 타협하여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 도시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으며, 그의 가족들 속에서 조차도 그의 의로움은 아무런 힘을 행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소돔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동성연애는 가나안에게 가해졌던 저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롯과 그의 두 딸들이 저질렀던 근친상간에 대한 추한 이야기는 의의 형식만을 갖춘 사람들을 그러한 환경들이 얼마나 쉽게 타락시킬 수 있는지 그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세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짐을 볼 수 있다(20장) 그랄 사람들에게 잡혔을 때, 아브라함은 다시 그의 아내 사라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다시 한번 믿음의 사람은 이방인의 왕 아비멜렉에게 책망을 듣는다. 그는 아브라함이 정직하지 않았다고 책망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일들에서는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믿음이 실패한 것은 작고 사소한 일들에서였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행동할 때, 위협을 느끼지 않는 문제들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들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불신에서 나왔던 사라의 웃음은 마침내 깨달음의 웃음으로 변했다.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자라감에 따라 노예의 아들인 이스마엘과의 갈등이 심해져 갔다. 결국 아브라함은 두 아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단순하게 순종하여 그 아이와 하갈을 보내고,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약속에 의지했다.
22장에는 믿음의 마지막 위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믿음의 친밀함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일곱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나신 여호와를 발견한다. 21장에서 22장사이에는 21년의 간격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삭은 젊은이로 자랐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랑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에게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는지 물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가장 큰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매우 어렵고 힘든 시험이었다. 그러나 믿음은 그로하여금 승리하게 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믿었기 때문이었으며, 하나님은 죽음에서도 그의 아들을 살아나게 하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17-19 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죽음에서 그의 아들을 다시 얻었다. 이삭이 제물로 드려진 산은, 후에 그곳에 성전이 세워졌으며, 예수님 자신이 그 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어린 희생양으로 드려진 바로 그 산과 같다고 성경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이 마지막 경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으로 끝났다. 그는 믿음의 교훈들을 배웠다. 그리고 더 이상 믿음에 실피하지 않았다. 시험 뒤에 하나님은 반복하여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셨다. 즉 약속의 자손을 주겠으며, 바다의 모래만큼 많은 자손들이 그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22;17) 이것으로부터 아브라함은 두 가지 혈통의 자손들을 갖게된다. 하나는 하늘의 별들로 상징되는 하늘의 자손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의 모래로 상징되는 땅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후에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과 아래에 있는 땅의 예루살렘을 말한 것은 이것을 반영한 것이다. 믿음에 의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늘의 자손이다. 땅의 예루살렘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자손들이다. 즉 오늘날 셈족의 나라들이다 (로마서4;9-16을 보라)
23장에서 25장을 통해 사라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아브라함의 슬픔이 기록되어 있다. 그녀를 장사 지내기 위해 아브라함은 헷족속에게 막벨라 동굴을 산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땅은 무덤이다.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아브라함의 하인 엘리셀을 보낸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신부를 찾아 성령을 교회에 보내심을 묘사하는 그림이다. 여기에서 진행되는 설명 전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의 주제이다. 이것 만이 리브가가 기꺼이 그녀의 집과 가족을 떠나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에게로, 그리고 그녀가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낯선 땅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녀는 저녁때 들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이삭을 발견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비록 그와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데 동참하고 있는, 그와 같은 동족의 여인과 아들이 결합하는 것을 봄으로써 보상을 받는다.
아브하함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25장에서 그두라라는 후처를 맞이한 것의 뒤를 이어 나타난다. 이 결합을 통해 6명 이상의 아들들이 태어난다. 그들은 후에 이스라엘의 기록에 나타난 부족들의 조상이다. 그들은 이삭에게 했던 약속의 상속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머무는 곳들 축복해 주셨고, 그들의 민족들을 번성케 해 주셨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175세에 죽었고,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에 의해 멕베스 무덤속 그가 사랑했던 아내 사라의 곁에 묻혀졌다. 성경의 나머지 전체를 통해 아브라함의 모습은 믿음의 사람으로 그려진다. 비록 그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과의 경험에 의해 그는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는 의로움의 요소를 배웠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믿음의 순종, 믿음의 충분성, 믿음의 겸손함, 믿음의 담대함, 믿음의 독립성, 믿음의 권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삭의 희새이에서 보여졌던 믿음의 친밀함이다.

2. 인간은 평화를 찾는다.

이삭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상태를 상징한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땅에서 산다. 그리고 그가 어느 곳에서 우물을 파든 그 우물에서는 끊임없이 신선한 물이 나온다. 이것은 진정으로 평화를 발견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에게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부자관계의 원칙이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 이삭은 그의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고,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삭의 부자관계는 또한 거의 아버지의 약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랄 땅에 있는 동안 그는 그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반복한다. 그는 그의 아내 리브가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아비멜렉은 이삭을 책망했던 세상 사람이었다.
약속의 상속자로서 이삭은 그의 자손들에게 축복해 줄 수 있는 특권을 받는다. 그가 늙어서 그의 인생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축복해 주기 위해 그의 아들들을 불렀다. 그의 쌍둥이 두 아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형이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이삭은 이 예언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나타났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바꾸려고 하였다. 그는 장자인 에서에게 더 큰 축복을 주려고 했다.
리브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야곱은 속임수를 통해, 에서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눈먼 아버지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이삭이 그가 속았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축복을 감히 바꿀 수 없었다. 그대신 그는 에서에게 그의 아우를 섬겨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그러나 아우의 멍에를 전복시키고 반역하는 역할을 그에게 부여해 주었다.
이삭이 죽자 이야기는 야곱에게로 집중된다. 에서는 평화의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와의 가까운 관계를 즐겼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스스로 경험하는 것을 만족해 했다. 그는 어떻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지를 배웠다. 그의 인생에 대한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아들이 되는 것의 비밀과, 크고 위대한 아버지의 상속을 누리는 것의 비밀을 배울 수 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생생하게 믿음의 정의에 포함된 것을 보여주고, 그의 아들 이삭의 인생은 부자관계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곱의 인생은 믿음에 의한 정화를 우리에게 비추어 준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의 내부에 있는 두 가지 본성들의 투쟁에 대한 것이다. 그의 자연적인 성질은 교활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영리하다. 그는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 뒤꿈치를 움켜 잡고 배속에서나왔다. 그래서 ‘밀어낸 자’ 또는 ‘발꿈치를 잡은 자’ 라는 의미로 야곱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러나 야곱의 내부에는 그의 형 에서에게는 없는 또 다른 성향이 있었다. 즉 야곱은 영적인 관계에 갈급해 있었다. 그는 그의 형이 가졌던 장자권의 가치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속임수를 통해 형에게서 그것을 빼앗았다. 그는 강한 개인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고,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와 같이 격정적인 사람을 어떻게 다루셔서 그의 저급한 천성을 승화시켜, 하나님의 사람, 그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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