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의 유혹 (잠 23:27-32)

첨부 1


1.유혹에 약한 인간
유혹 앞에 서면 남자가 약할까요 아니면 여자가 약할까요 대개의 여자들은 유혹의 근원이 남자라고 이야기합니다만 모든 남자들은 여자들 때문에 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누가 더 유혹에 약하다고 이야기합니까
미안하게도 인간은 모두 유혹에 약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유혹에 약하기에 인간은 죄에 빠져서 죄가 가져다줄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 하반기부터 터져나온 세금 도둑질 사건이 이제 한국 땅 전체에서 그 비리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마치 인천 상륙 작전 때처럼 인천 부평 그리고 안산을 거쳐 분당에 이르더니 급기야 남하하여 전국의 세무서가 비리가 없는 곳이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의 돈을 훔쳐먹는 곳이야 어디 비단 세무서뿐 이겠습니까 각종 인허가 사업에 걸려있는 이권 때문에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이 공무원 개인들의 치부수단이 되어 버린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까
정직과 명예를 최고로 여겨야 할 나라의 관리들이 너무나도 추한 모습으로 굴비짝 엮듯이 엮여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가족과 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던 그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토록 존경했던 아버지가 국민의 돈을 도둑질 해먹은 큰 도둑이라고 할 때 과연 그들의 자녀들이 바른 가치관을 가진 정상인으로 자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본인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짓과 죄악이 일어나고 그 영향이 자손들의 인격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국가 공동체에 얼마나 깊은 불신의 상처를 남겨 줍니까
그러면 왜 인간이 이토록 추잡한 모습으로 뻔뻔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까

①그것은 유혹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혹에 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유혹 앞에 굴절되고 굴복한 역사입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솔로몬도 시바여왕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만 정치는 뒤로하고 향락에 빠져 하나님께 대한 제사까지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다윗은 아직도 전쟁중 일 때 궁전의 옥상에서 배회하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유혹을 받아 그만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고, 급기야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우리야 마저 죽게 했습니다.
인간은 유혹을 받을 때 본질적으로 약하여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유혹은 영어로 Temptati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낚시 바늘에 꿰어 있는 미끼와 같은 것입니다. 유혹이 올 때 우리는 시험을 받는 다고 하는데 이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욕심에 끌려 미혹되어 유혹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의 원인은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내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사람은 욕심이 있어 어떤 물건이나 대상을 바라보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거나, 수단을 부리게 됩니다. 그것이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재 유혹을 받고 있습니까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 속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허전함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이 계시지 않고 소멸했기 때문입니다.
유혹과 욕심은 3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2장 15, 16절을 보십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요한은 유혹의 원인이 세 가지라고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첫째 유혹의 원인은 육신의 정욕입니다.
다시 말해 몸의 쾌락과 성적인 쾌락을 말합니다. 이것은 술이나 마약, 약물중독과 같은 향정신성 쾌락과 난잡한 성관계를 통하여 만족을 구하려는 우리의 부패한 의식구조입니다.
인간은 이 부분에 대하여 절제의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받았다 할지라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왜 범죄 했습니까 하와의 끈질긴 유혹이 없었더라면 결코 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와부터 넘어뜨린 것입니다. 그렇게하면 하와는 혼자 벌받는 두려움 때문에 아담도 넘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속의 대부분의 믿음의 사람들도 이 육신의 정욕 앞에서는 맥없이 넘어졌습니다. 이 문제는 정면 대결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피하고 하나님이 막아 주시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출장갈 때 꼭 가족 사진을 가져가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출장 중인 남편에게 온 가족이 전화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뿐만 아니라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유혹의 거리를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한 번 실수해서 넘어진 가정 그리고 그 자녀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회복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또한 젊어서 고생해 준 아내의 헌신과 사랑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둘째, 유혹의 근원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안목이란 가치관을 말합니다. 사람은 목표가 없이는 삶의 기쁨을 모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누구 때문이라는 정당한 목표가 있어야만 성공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이러한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 그리고 이웃 사람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기심으로만 가득할 때 인간 세상은 동물의 세계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공룡의 멸망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만 재미있는 한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소화불량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공룡은 덩치가 큰 만큼 소화 기관도 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화시켜서 장을 다 통과하기도 전에 먼저 배가 고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화도 되기 전에 먹고 또 먹고 결국은 소화를 못시키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공룡의 생김새가 머리는 작고 몸집은 거대한 것을 보면 이 말은 사실 같은 생각이 들고 한 편으로 우리 모두는 현대판 공룡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산업 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급속하게 바뀌면서 우리는 심각한 가치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선 모든 사상과 정보를 입력해 넣고 보자는 정보과식증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말씀 중심이라는 가치관은 심지어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오늘도 굶주린 이리떼 모양 소화시키지도 못한 지식과 가치관들을 잔뜩 안고서는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유혹의 원인은 이생의 자랑 즉 헛된 명예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심판했던 한 정치인을 봅니다. 그는 사람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할 자리에서 있는 사람으로서 죄의 적법성 여부를 물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군중들의 요구 그리고 자신의 대중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예수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 주고 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갔습니까
얼마나 많은 관리들이 세금을 도둑질한 돈으로 자신의 명예를 유지하여 왔습니까
순간의 유혹을 참지 못한 결과 그들의 이름은 더럽혀 졌고 그들의 명예는 순식간에 땅에 짓밟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섬기고 따라야 할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사람은 누구나 인도받는 대로 따라 삽니다. 육신의 쾌락에 이끌리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육신이요 자신의 배이며 안목의 혼돈에서 끌려 다니는 자의 사상가는 될 수 있을 지언정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명예를 쫓는 자도 썩어질 영광의 노예인 것입니다.

2. 유혹의 구원은 욕심입니다.
천사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며 욕심을 부린 결과 마귀가 되었습니다. 마귀가 에덴 동산에 내려와 하와를 유혹함으로써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유혹은 욕심을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것이라.”는 유혹에 넘어갈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겸손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따먹은 하와는 어떻게 아담을 유혹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와는 자신만이 수치를 당하기 싫어서 동반자살을 계획합니다. 하와가 밤새 아담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다 그러하듯 항상 밤이 문제입니다. 연산군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정변이 왜 일어 났습니까 그의 어머니가 성종 임금 때에 투기를 부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합왕이 왜 이스라엘의 신앙을 혼탁케 하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게 했습니까 이세벨이라는 이방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정죄하심을 받고 “나는 그런 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라고 자위하면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정죄함을 받고도 회개치 않는다면 그는 이방인인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엎드리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하나님의 자녀라 하겠습니까
왜 노아 시대에 멸망이 왔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모두 마음에 선한대로 첩을 거느렸기 때문이 아닙니까 누구는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두 여자를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첩을 두고 또 누구는 한 가족도 겨우 먹이기 때문에 첩을 둘 수 없다는 이유라면 그가 받은 축복이 어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이라 하겠습니까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약 1:13-15)“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 중의 근원은 물질의 욕심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는 것이 어디입니까 눈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눈을 따라 들어옵니다. 시날산 외투를 보는 순간 아간은 그것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눈에 선한 대로해도 된다면 이 세상은 이미 난장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합법적인 도적질이냐 물리적인 도적질이냐의 차이지 세상에서 과도하게 부하려고 하는 자는 죄를 짓게 됩니다.
야고보서 4장 13-17을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며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3. 결론입니다.
삼국유사에 꿈이라는 제목의 한편의 시가 나옵니다. 이 시는 인생의 덧없음과 욕심의 허망함을 노래하는데 배경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의 한 절에 있는 젊은 상좌승이 어느 날 고을 태수의 방문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태수는 맏 딸의 혼인을 앞두고 불공을 드리러 왔는데 젊은 상좌승이 그 딸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립니다. 자신이 중이라는 신분도 망각한 채 목매이게 사모하다가 단 한번만이라도 연분을 맺을 량으로 마을로 내려옵니다. 밤중 깊은 시간에 목욕하고 있던 달래라는 아리따운 여인을 겁탈하고 그를 데리고 도망합니다. 한 번만의 연분에서 그치지 못하고 도망하여 살림을 차리지만 기왕에 살림을 차렸으니 아이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붙어 있고 달래와 정혼했던 화랑의 추격도 받게 됩니다. 재물을 잃어버리고 도망하는 중에 자식도 잃게 되고 부인마저 사창가에서 일하게 되는데 어느날 부인은 문둥병에 걸린 것을 알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저것 다 빼앗긴 채 자신은 화랑에게 잡히고 맙니다. 칼이 내려치는 순간 깨고보니 꿈입니다.
다 허망할 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일 뿐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곳 없습니다. 다 쥐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죽음으로서 다 내어 주고 가 버립니다. 그저 이 세상은 있는 날 동안 세끼 먹고 헐벗지 않고 살면 됩니다. 주지 않고 꾸어 주면서 살 수 있으면 그뿐이지 과도하게 가지고자 하는 것은 곧 죄를 낳게 됩니다.
우리의 허무주의는 무신론적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신이 없는 고로 하나님이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무신론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일평생 순례자로 살았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순례자들 ‘필그립’입니다.
우리에겐 부활이 있고, 하늘 처소가 있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영원한 장막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과 영원한 내세의 축복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기들은 손에 들고 있는 과자를 내 놓으라고 하면 결코 내어놓지 않습니다. 욕심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좋은 선물을 내밀며 손에 쥔 것을 달라고 해 보십시오.
하나님도 우리에게 세상 욕심을 버리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주시고, 미래를 주시며, 내세의 축복을 주시며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큰 장애물, 즉 시험의 원인인 욕심은 내어버리시고 또 다시 웅비하여 올라가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