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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물 뛰어넘기 (느 0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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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탕 남작은 올림픽의 5가지 기본경기로 달리기,사격,펜싱,수영,그리고 장애물 뛰어넘기를 지정했는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이 다섯 종목이 기본경기로 채택된 인상깊은 이야기를 전세계에 소개했다고 합니다. 19세기 젊은 프랑스 기마장교가 전쟁터에서 중요한 전령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타고 전쟁터를 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갑자기 적군이 나타나더니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신청했다고 합니다. 칼을 빼어들고 결투에서 승리한 장교는 다시 말을 달리다가 그의 말이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자 말에서 나뒹굴면서 자기를 겨냥하는 적군의 심장을 향해 총을 뽑아 사격을 한후 적의 사살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맨발로 달려 강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이번에는 수영을 해서 강을 건너 마침내 아군의 진영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성공합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 다섯가지의 경주를 치러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달려야 했고, 칼을 뽑아야 했고, 총을 쏘아야 했고, 수영을 해야 했고, 강을 위시하여 여러 장애물을 건너야만 했던 것입니다. 쿠베르탕이 5가지 경기를 제안했을 때 제일 반대가 많은 것이 장애물 경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베르탕은 장애물 경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이 기본경기에 포함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 이유가 장애물 경기야말로 인생의 그림을 너무나 유사하게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물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삶도 예외일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재건에 착수하자마자 만나는 장애물 체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이 장애물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합니다. 오늘 우리도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너무 힘들어 보이는 장애물을 대하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동족상쟁의 전쟁인 6.25는 끝난지 50여년이 지났지만 민족의 운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남과 북이 대치를 계속하고 있는것도 그렇고,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국제 열강들의 이해관계속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입니다. 거기에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그동안 우리가 획득한 경제적 안정의 기조를 하루 아침에 잃을수도 있는 현실앞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오히려 가난한 시절보다 더 심각하기만 합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부딪혀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 본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계획하면서 가능한 모든 장애물을 미리 가정해 보았고 그 장애물들을 통과할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그가 아닥사스다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재건작업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그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기까지의 통과증을 요청한것도 이런 불필요한 장애를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할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 스스로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즐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순교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평케 하는자(피스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트러블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제발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문제를 피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은일에도 여전히 어려운 장애가 존재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느헤미야의 경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으로부터 예루살렘 재건허락을 받아냈을 때 그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확신했습니다. 본문 8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느헤미야는-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하지 않았습니까 자, 이제 예루살렘 성의 중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요, 그가 인도하신 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고국에 돌아가 성의 중건을 백성들에게 설득하자마자 어떤 일이 생깁니까 18-19절을 읽어보십시오. 여기 이름조차 으시시한 산발랏, 도비야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0절에 의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흥왕을 원치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의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마귀의 방해공작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면서 동시에 사단의 방해를 허용하실까요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가 있을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착수한 일에 장애가 존재한다고 해서 너무 서둘러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속단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어서 사단이 질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시고 강하고 담대해 지십시오. 이런 사람만이 장애물 뛰어넘기에 성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즈음 개의 용기를 예찬하는 유머가 유행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제목이 개가 해석한 개에 대한 속담입니다. 그중에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개는 타고난 용맹성을 지닌다. 복날 개패듯 한다/개는 어떤 시련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닭좇던 개가 지붕 쳐다본다/개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본다.

자, 그렇다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장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이런 장애물을 우리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장애를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의 느헤미야의 고백을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믿음직한 믿음의 사람의 고백인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느헤미야는-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종으로 그의 일을 하기위해 여기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그가 이 성벽 재건에 착수한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저는 종교개혁이 인류에게 선물한 가장 큰 기여중에 하나는 만인 제사장직의 성서적 발견과 함께 모든 직업의 성직성을 우리로 깨닫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하고자 하는 일은 사실 설교도 전도도 아니요, 성전건축도 아닌 성벽재건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세속적 일이 아닌 거룩한 일 곧 거룩한 사명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그로 하여금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게 한 것입니다. 개혁자 루터는 만일 소젖을 짜는 하녀가 하나님이 이 일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에 임한다면 그녀의 직업이 바로 성직이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 만이라도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이런 사명감을 가지고 임한다면 이 땅, 이 사회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이 일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이유-하나님이 맡기신 거룩한 사명이라고 확신한 까닭이었습니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그가 선교의 숱한 장애물을 뛰어 넘은 비밀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명이 다할때까지 나는 죽을수 없었다고.

2)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일이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으로 맡기신 일임을 확신할 수 만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그일 을 형통케 하도록 도우심을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뜻하신 일인데 그분이 방관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미 생각한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허락하신 일에도 하나님이 허용하신 어떤 장애, 어떤 난관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애 앞에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 도비야, 게셈 이런 사람들의 방해를 받으면서 무엇이라고 외칩니까 다시 20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느헤미야의 믿음입니다. 일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또한 일을 마치게 하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빌립보 교인들을 격려하던 바울의 믿음이 아니었습니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1:6) 그것이 중국 오지에서 선교하며 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너무 쉽게 사람들의 도움을 호소하며 손을 벌리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였습니다. 이 정책을 후일 중국내지 선교회를 계승한 OMF는 Faith-miss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지원이 부족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여유있는 환경이 주어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가운데 서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을 위해 서도 우리가 먼저 구할 것 그것은 경제회복도 열강의 도움도 아닌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통일 한국도, GNP 2만불의 번영 한국도 주께서 주님의 때에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민족사의 장애물도 믿음으로 뛰어 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남북 대치의 상황에 대해서도 종종 이런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세계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복음의 부흥, 기독교의 부흥을 주신 하나님이 왜 남북사이의 분단의 철책선은 아직도 거두시지 않으시는가라는 의문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쩌면 이 남북대치의 상황이야말로 이것 때문에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더 기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속에 허용된 장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장애물을 비관하기보다 감사하며 더 기도하는 민족,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지난주말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최대의 골프잔치 미국 US오픈 골프경기는 매우 흥미있는 에피소드들을 가장 많이 남긴 대회로 기록될 전망입니다. 우선 변변한 스승 하나도 가져보지 못하고 8자 변칙 스윙을 하는 짐 퓨릭이라는 의외의 선수가 우승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승 소감에서 나를 유일하게 믿어준 아버지의 코치를 따라 한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열받은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의 표정 사진이 클로즈 업 된 것입니다. 뉴스는 그가 2라운드에서 샷을 하는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온 휘파람 소리로 놀란 우즈는 제대로 스윙을 못하고 공은 벙커로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신문들은 휘파람에 무너진 우즈라는 보도를 내 보냈습니다. 20위로 쳐진채 대회를 마무리한 그에게 소감을 묻자 그는 다시 평상심을 회복하고 그래서 자신은 골프에 겸손해 지고 진지해 질 수밖에 없다고. 인생은 골프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 한국을 대표한 최경주는 많은 한국 골퍼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컷 오프 탈락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날 하루나 적어도 며칠동안 골퍼들은 깊은 낙심의 시간을 지난다고 하는데 최경주는 US오픈이 진행되는 경기장 바로 옆의 연습장에 나타나 다시 연습에 몰두해서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그에게 한국 기자가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담담하게 다음경기가 있지 않습니까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 게임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라톤 장애물 경기인 것입니다. 하나의 장애물을 비껴가면 또 다른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장애물 통과는 우리에게 실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수치와 자존감을 함께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넘어 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계속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려질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일관성있게 달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 하나의 장애물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제자가 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분의 인생의 마지막 장애물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십자가를 단순한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십자가를 질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여, 할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얼굴에 땀 방울이 변하여 피 방울이 되기까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엎드려 기도하시는 그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나타나 새 힘을 돋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담담히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은 우리의 깨끗함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새롭게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다시 사심은 우리의 다시 삶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을 당신의 코치로 영접해 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초청해 보십시오. 새 인생이 시작되실 것입니다. 인생의 장애물을 넘어서실 새 힘을, 새 희망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줄거리)는 무엇입니까

2. 8절에서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3. 산발랏과 도비야의 도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 20절에서 느헤미야는 어떤 결심으로 사역의 장애물을 뛰어넘기로 결심합니까

5. 오늘의 삶에서 우리 각자가 부딪힌 장애물을 말해 보고 그것을 어떻게 뛰어 넘어야 할 것인지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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