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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자 다니엘 (단 06:16-27)

첨부 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 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피는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온 무명의 청년에서 이제 메데와 바사 왕국의 총리의 지위에 까지 올랐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성공과 존귀는 자연 부러움과 시기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에서 아무 그릇함도 허물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그의 신앙에 대하여 걸고 넘어 뜨리려 했습니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그의 신앙과 애국심을 미끼로 그를 잡으려고 들었습니다.

그는 태생이 유대인입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시기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세운 신상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종교를 말없이 조소하는 느낌을 받은 그들은 다니엘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맞대고 간교한 계략을 마련했습니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아끼는 신하를 제물로 삼든지 아니면 자신의 신실성을 손상시키든지 아니면 신성한 제국의 전통을 허물지 않으면 안되는 곤경에 몰아넣었습니다. 왕의 칙령은 발표되었습니다. 이제 삼십일 동안 아무 사람에게나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안됩니다.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함정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그 함정에 결국 빠져들고 맙니다.

독재자마다 그의 상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절제되지 않는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한 사람을 아주 어리석은 자리로 몰아넣습니다. 헛된 욕망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결과 사람의 양심을 억누르는 악명 높은 법령을 발표하도록 설득당합니다. 이런 처지에서 다니엘은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그의 지위를 포기하고 자기 갈길을 가야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습니까 극단적이고도 염세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기도굴로 후퇴해서 아무도 보고 듣지 못하는 곳에서 기도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도란 어디서 드려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소리내지 않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행동도 겁장이같은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사자같은 용기있는 마음으로 처신했습니다. 사자같은 담대한 마음을 가졌기에 사자굴로 들어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심령은 깨끗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그의 행동은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관습대로 행동했습니다.

마치 교수대를 올라가는 것같은 일이지만 그의 기도실로 올라갔습니다.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했습니다. 숨어서가 아니라 공공연히 기도드렸습니다. 모든 대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루살렘을 향한 열린 창에서 간구했습니다. 바리새적인 위선이 아니라 신교도다운 기개를 가지고 이전처럼 처신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명예를 구하지 않았고 아무런 위험도 면할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를 위해서는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조롱도 감수했습니다. 오랫동안 닦아온 기도의 훈련은 당면한 위기를 넉넉히 감당하게 했습니다.

1999/03/15 (13:24) from 210.18

2.80.70' of 210.18

2.80.70' Article Number:15
눅 6:39-40 Access:6 , Lines:90
소경이 소경을
소경이 소경을

누가복음 6:39-40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계속 주님이 평지에 서서 하시는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설교는 후반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워낙 격한 감정 가운데 행한 설교요 압축된 형태로 기록되어서 설교의 흐름을 따라 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듣는 이들에게는 수정같이 분명한 설교였는데, 오늘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파악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갑작스런 비유를 또 하나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앞 부분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지 파악하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

지금껏 주님께서 하신 설교가 무엇입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어떤 랍비도 감히 제시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설교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 이 사랑의 원리를 확장해서 가르쳤습니다. 비판치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라.

남을 정죄하는 한마디의 말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요 심판자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원수갚는 일도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지만 남을 판단하는 일도 하나님께만 속한 행위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법을 만든 분이시고 그 법을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왜 그러느냐'고 정죄하는 말을 하면 그것은 벌써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의 위반입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을 어기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정죄 대신 용서하기 위함 일뿐입니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을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석해보고 판단해보는 것은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비를 잃지 않는 판단은 호의를 베푸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오늘 본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급박한 주제의 변화 때문에 현장에 있지 않았던 우리가 그 흐름을 따라 잡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평지 수훈을 하시는 주님의 심정에 우리가 충분히 동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39절은 단순한 비유의 형식입니다. 40절은 지혜자의 말, 잠언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39절의 비유는 두 가지 수사학적 질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듣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입니다. 아니요.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그렇고 말고요. 청중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해낸 다음에 지혜자의 잠언 형식을 빌려서 한마디 하십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니라.

누구를 의도하고 지금 말씀하시는지 처음 들어서 파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소경은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시도는 비참한 결말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경이 다른 소경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인도하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구덩이에 빠지고 맙니다. 그게 웅덩이라도 상관없고 시궁창이라도 별다를 바 없습니다. 벼랑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하는 소경이나 인도 받는 소경이나 함께 빠지고 넘어지고 떨어지고 맙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자기에게서 듣는 자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며 어떤 선생도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 모두를 향해서 이중의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누구에게서 들어야 할 것인지 누구의 인도를 받아야 할 것인지를 선택할 때 주의하라는 경고가 거기에는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장차 어떤 류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씩 살펴봅시다. 주님은 지금 사방에서 몰려온 사람들을 향해서 설교하십니다. 이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능력 있는 설교를 하시고 계십니다. 평소에 회당에 가서 성경 봉독이 끝나면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졸기에 바쁜 사람까지도 그 날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회당 안에 앉아서도 바깥에 지나 다니는 사람들에게 신경쓰기 바빴던 사람인데 그 날은 바깥에서도 태도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주의가 산만해지기 쉬운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은 예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주님의 입술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입술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경청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느닷없는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모두, 그럴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모두 다 그렇다고 수긍하는 것이지요.

1999/03/15 (13:41) from 210.18

2.80.70' of 210.18

2.80.70' Article Number:29
눅 8:22-25 Access:10 , Lines:84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8:22-2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 24일 총력전도 주일을 앞두고 누가가 전한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본문을 기점으로 해서 주님의 모습이 새롭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위대한 설교자로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내십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다가 이제는 행동으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8장 후반부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전능자이심을 삼중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연세력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제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죽음까지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연계, 영계, 인간계의 주권자이십니다.

그가 누구신지 밝히는 사건들을 누가는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라는 제자들의 의문을 8장 후반부는 밝히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9장 18절에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제자들을 준비시킵니다.

폭풍이 덮친 갈릴리 호수를 말씀으로 잠잠케 하신 이 기사는 복음서에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우리로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신앙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신앙은 예기치 않게 당하는 풍랑 앞에 좌초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시련을 통해서 성숙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자세히 살피기 전에 우선 본문의 구성을 살펴봅시다. 네 절의 짧은 기록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감격을 싣고 있습니다. 기록이 짧은 것은 사건이 하찮아서가 아닙니다. 이 경우 그들이 받은 충격이 엄청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말이 필요없는 엄청난 충격을 재현시키기 위해 누가는 네 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2절은 상황 설정입니다. 23절은 문제제기입니다. 24, 25절 상반절은 그 문제 해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 하반절은 제자들에게 준 충격을 결론으로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우선 서막격인 사건의 상황부터 살펴봅시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22절)라고 사건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호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을 보면 하루 해가 기우는 저녁녘에 이 사건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무척이나 바쁜 하루가 지나가고 이제 쉴 곳을 향해서 떠나는 듯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어느 때에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그는 '하루는'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께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에 있습니다. 맹렬한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그의 능력과 권세를 보이는데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무척이나 바쁜 하루였습니다. 장시간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설교가 끝난 뒤에도 제자들을 데리고 앉아 그 비유의 뜻을 풀어 주셨습니다.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밀려드는 사람을 피해서 배에 앉으사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왠 종일 가르치시는 일에 자신을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그가 피곤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러다 보니 배를 타고 육지를 떠나기가 무섭게 잠이 드셨다는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삶을 사셨나 하는 것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편한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만큼 한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주님은 머리가 땅에 닿으면 이내 잠드는 분처럼 느껴집니다. 왠종일 자신을 열심히 쏟아 부었기에 눕기만 하면 잠이 쏟아져 부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배가 육지를 떠나자 마자 이내 잠드신 것으로 보입니다.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더니 어느새 보니 잠들어 계십니다.

마가는 생각보다 상세하게 기록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보다 짧게 기록되어 있어서 박진감있는 사건 전개를 하면서도 여기처럼 어떤 때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하게 기록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아주 간단하게 취급하는 기자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 기사를 기록한 것을 보면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서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말보다 행동에 감동한 마가이기에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면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마가복음을 한번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막 4:35-38). 그 날 저물 때에 언제 그 일이 있었는 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배에 앉아서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에 앉아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고 말합니다.

다른 배들도 함께 가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여기 보십시오. 마가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주무셨는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 뒷편에서 목침같은 것을 베고 잠드신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치도록 삶을 열심히 사신 주님이십니다. 사람사이의 표현을 빌려서 말한다면 아주 피곤해서 '골아 떨어진' 상태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기에 눕기가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적나라한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풍랑이는 바다를 향해 말씀하시니 잠잠해졌습니다. 자연을 향해서 명하시매 그대로 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건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시에 철저히 인간이셨습니다.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심이 분명합니다. 그 날 해변에 몰려든 무리들로 부터 벗어날 필요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배를 가지고 따라오는 무리들을 잠시나마 잊고 쉬실 필요가 계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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