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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마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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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땐가부터 인간은 행복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행복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지금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있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없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불행해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있어야 할 것 중에 상실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없어야 할 것들이 하나님을 잃어 버림으로 인간의 삶 속에 생겨 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을 상실한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비극은 인간의 교만으로 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했던 근본적인 유혹은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권위에 대한 욕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최초의 욕구를 ‘교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모든 생활속에 갈려있는 도덕적 결핍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불필요한 욕구가 인간의 행복을 파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감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중 첫 교훈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변해야 할 내면에 세계를 찾아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Ⅰ.심령이 가난한 자
우리는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가난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가난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식적인 생각에 저도 동의 합니다. 가난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가난이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도덕적 삶이라면 결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가운데 “풍성한 삶”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청빈과 규모있는 물질 생활을 그리스도인의 덕목중 하나로 봅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그리스도인의 덕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시인할 것입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의하여 나타난 가난한자에 대하여 성경은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인의 게으름이나 어리석음으로 가난한 자의 삶에 대하여는 결코 성경이 격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가난을 수치로 여김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음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격언을 우리는 의미있게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물질적인 가난에 대한 고통에 대하여 성경은 위선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고통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삶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덕적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를 찾아봐야 할 필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인격의 골수와 같은 내부의 영혼 부분에서 영적 궁핍을 느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지극히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욕망의 요소를 비우고 하나님의 신령한 것으로 채우기를 원하는 자를 가리키는 표현인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가지고 사는 사람!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급해 있는 사람! 더 나가서 주의 것으로 채워야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사람을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이제 축복의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Ⅱ.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제 그 축복의 실체를 주님은 천국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삶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되 경험되는 생활로 나타난다면 그 생활이야 말로 얼마나 충만된 행복으로 가득 차겠습니까 우리는 말합니다. 이 땅 위에서 누리는 세상적인 풍요가 우리의 행복을 영원히 충족 시켜 주는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데 편리함을 주며 세상의 고통으로 신앙이 시험받지 않도록 해 주는 역할과 하나님의 일을 이 땅에 실현 시키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물질이 나타낼 수 있는 최선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에서 누리는 인간의 복은 영원한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축복은 신앙이 가지고 있는 비밀 중 하나인 것입니다. 천국의 복은 제한된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으로 변질되지도 않으며 변질 될 수도 없는 축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인간의 삶을 무한한 행복감으로 충족 시켜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축복의 완성을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도덕성은 겸손, 다시말해 모든 삶에 주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생활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은 결코 이 땅에서 불행한 현실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현실성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하여는 무지 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의 현실은 우리의 욕망을 우리의 요구대로 채워주시는 방법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단의 방법인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욕망을 근거로 우리에게 접근해 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으로 몰고 갑니다. 그렇치만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않되는 욕망을 하나 하나 제거해 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깨닫게 하심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질되거나 망가질 수 없는 영원한 만족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비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 이 세상의 상식만으로 인생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을 해석하며 감춰진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누릴 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거짓된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이러한 이유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95년을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경험하는 인생으로 있고 싶다면 바로 이러한 겸손이 우리에게 요구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우리의 결단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관념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누려지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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