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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엄마, 나 2등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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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던 아이가 우리 가게로 부모님과 칼국수를 먹으러 왔습니다.
'선생님,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요, 선생님은 언제 피아노학원 그만 뒀어요?'
아이의 말에 문득 나의 손등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음악의 선율을 따라 매끄럽게 춤을 추던 나의 손은 피아노학원 원장님에서 칼국수집 아줌마가 된 지금, 굵직한 마디가 그 간의 생활이 힘들었노라 타원하는 듯 했습니다. 피아노를 하나하나 처분해야 했던 가슴 아팠던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갔습니다. 피아노가 열대 넘게 자리잡고 있던 피아노방에 덩그러니 나 혼자 남겨져 눈물짓던 순간들.
겨울 끝에서, 더 이상 물러날 틈조차 없을 때의 그 막막함 속에서, 많은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칼국수집을 차렸습니다. 성실한 남편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단지 마음만은 그랬습니다. 첫 배달이 있던 날, 마냥 출입문 앞에서 제자리 걸음만 치던 남편.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돌아서 눈물을 삼키기도 했습니다. 중학생인 아들녀석과 달덩이같은 초등학교 4학년 딸아이 얼굴을 떠올리며 어떤 어려움도 참고 이겨내리라고 다짐했건만, 시시때때로 남편과 다툴 일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손님들 입맛은 임금님 수라상 차림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어떤 때에는 짜다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싱겁다 하고, 잘못된 주문전화로 퉁퉁 불은 칼국수를 다시 갖고 와 온 가족이 억지로 먹던 날은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그즈음 중학생인 큰 아이 일기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집은 변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나는 냉장고를 열지 않는다. 간식거리를 사다 넣지 못한 부모님 마음이 아프실까봐..'
감사하게도 가게를 청결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재료를 아끼지 않은 이유인지 손님이 조금씩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바빠졌다는 핑계로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은 없어지고 만 것이지요.
며칠 전 딸 아이의 운동회 날이었습니다. 한산하던 우리 가게에 손님들이 북적대기 시작한 터라 운동회가 열리는 딸아이 학교에 가 볼 생각은 남편도 저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엄마, 나 점심 어떡해요?'
'김밥 싸놓을테니 가게로 와서 먹고 가라.'
딸아이가 '네.'라고 대답하더군요. 기특하면서도 요즘의 다른 아이들처럼 졸라대는 일이 없는 것이 더 가슴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바쁜 점심시간이 되자 오전 운동회 프로그램을 마친 딸아이가 들어왔습니다.
'엄마, 다른 애들은 목이 마르기 전에 엄마들이 음료수도 갖다주고 그러는데...난 목말라 죽을 뻔했어요.'
'잔말 말고 빨리 김밥이나 먹고 학교 가.'
주방일을 보던 저는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말았습니다. 딸에 대한 미안함에 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만 것이죠. 딸아이는 김밥을 다 먹을 때까지 침묵하더군요. 그로고는 오후 운동회에 늦었다며 후에하니 나가버렸습니다.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대는데, 그렇게 나가버린 딸아이의 빈 자리 때문인지 내 마음도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 전 같으면 손님들로 북적대는 앞집 가게가 그렇게 부럽더니만, 그 날은 손님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습니다.
점심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대충 정리를 하고는 다섯시간만에 의자에 않았습니다. 퉁퉁부은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딸아이의 마음은 이보다 더 퉁퉁 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지요.
앞치마를 풀렀습니다. 남편은 저의 넋나간 듯한 행동을 소리없이 지켜보기만 하더군요. 이미 모든걸 다 안다는 듯이...
'여보, 나...'
'어서 가 봐.'
지갑을 챙기고는 막 가게 문을 밀려는 순간, 누군가 급하게 들어오는 거였습니다.
'엄마! 아빠! 나, 100미터 달리기 2등 했어요. 자기네 식구 모두 왔다고 자랑하던 아람이는 4등 했거든요. 보세요, 여기 손등에 찍힌 도장. 나 2등 맞죠?!'
뛰어오느라 땀은 목까지 흘러 내리고 더위에 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활짝 웃는 딸아이 앞에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지요. 뜨거워진 제 눈가 만큼 빨개진 남편의 두 눈을...
/황애선(낮은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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