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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양식 (요 06: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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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마치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것입니다.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평화를 구하

나 참 평화가 없습니다. 안전를 구하나 참 안전이 없습니다.

사랑을 구하나 참 사랑이 없습니다.만족을 구하나 참 만족이

없습니다.행복을 구하나 참 행복이 없습니다.결과는 원망과

불평,불만이 계속되는 삶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여유가 있고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좌절과 실

의와 허무감,그리고 불만족 가운데 사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참된 의미와 희망과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다시말해 참된

삶의 양식(糧食)이 없기 때문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

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라 (암8: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암8:13)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

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인간의 참된 양식은 오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입

니다.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

리스도이십니다.생명의 떡,참된 양식인 예수의 살과 피를 먹

고 마셔야만 영생(永生)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하

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하여 계시하신 것,즉 그 십자가에서 예

수의 보배로운 몸이 우리를 위해 버려지셨다는 것과 그의

피가 우리의 구속(구원)을 위해 흘려졌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흘려진,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

운 피가 우리 죄를 속했다는 것을 인정할 때,우리는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같은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

니다.유대인들은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일에 보다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눌 수

가 있습니다.영에 속한 사람은 오직 영에 대해 관심이 많고,

육에 속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그래서

비록 부부라 할지라도 속해 있는 부분이 다르면 몇 십년을

살았어도 타인입니다.

영에 속했느냐 육에 속했느냐의 구별은,보는 것과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그 둘은 전혀 다

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가령 무엇을 깨닫는다

고 할 때,이 깨달음도 그가 가진 관심에 기준해서 깨닫게 되

며 무엇을 보아도 관심대로 보여집니다.같은 것을 놓고 보더

라도 육에 속한 사람은 돈으로 보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진

리로 보여집니다.얼핏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

으로 만지면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어느 남편이 은근히

옆집에 사는 부인을 좋아해서 그 집 음식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보이고 맛있다고 해서 부인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어

느 날 꾀를 내어 그 부인은 옆집에서 김치를 얻어 밥상에

올려놓고 김치 맛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그 때 남편은 이

걸 김치라고 만들었느냐고 짜증을 내며 맛이 없다고 투정

을 했습니다.다음 날은 자기 집 김치를 내놓으며 옆집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남편은 맛을 보자마자 이것이 바로 김치

다라고 아주 만족해 했습니다.입맛까지도 마음가는 대로 맛

이 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결국 관심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

르면 서로 막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 관계가 서로 단절되어 통할 수 없는 것처럼 답답

한 일은 없습니다.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

자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

습니다.예수님과 유대인들은 서로의 관심이 다르기 때문에

피차에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

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

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

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

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

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

라.

하나님은 이 시대에 그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인간에게 말씀(대화,communication)하십니다.하나님과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인 대화는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

님의 참 뜻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지

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보내신 성

령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인간은 사랑으로

서 응답해야 대화의 기적(communication)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

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대화와 사랑의 관계는 마치 피와 몸과의 관계에 비길

수 있습니다.혈액 순환이 정지되면 몸은 죽게 마련입니다.대

화가 끊기는 때에 사랑은 죽고 반감과 증오가 생기게 됩니

다.하지만 대화는 죽음의 관계에서 소생을 이룩할 수 있습니

다.이것이 대화의 기적인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대화를 들으시고,우리의

찬송과 기도,그리고 사랑의 봉사와 헌신으로 그 대화에 응답

하시므로 대화의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카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하나님께서 그의 동

생에 관한 일을 물으시려고 그를 불렀을 때,모든 시대를 통

해 계속 메아리치고 있는 저 비극적인 대답을 합니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

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 비극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

로 입니다.하나님께서 살인범 카인을 부르시는 참 뜻을 모르

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묵살하는 인간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예입니다.하나님은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인된 인간들

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마틴 부버는 대화를 상대방의 처지를 체험하는 것이

다.라고 말했습니다.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처지를 말씀과 성령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말씀과 성령이 역사할 때 삶의 기

적은 체험되는 것입니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

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

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

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

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

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

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

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

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

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

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어느 조각 작품에 어머니의 유방은 풍만하여 젖이 철철

넘쳐 흐르고 있는데 그 어머니 품 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

의 모습은 유난히도 바짝 말라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있었

습니다.그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는 애써 젖을 먹이

려고 안간힘을 다 쓰는데 어린아이는 도무지 먹지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의 젖이 풍부

해도 그것을 거절하고 먹지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자 충만한 말씀

과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참된 양식을 공급하시고자해도 거

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1841년 미국기선이 빙산에 충돌했습니다.구명 보오트

한 척에 기어오른 사람이 너무 많아 홈즈 선장은 그중 일부

를 파도 속으로 밀어냈습니다.그는 살인죄 판결을 받았으나

타일러 대통령의 특사령으로 살아났습니다.이때의 논쟁에서

<구명보오트 윤리>(Lifeboat Ethics)라는 말이 나왔습니다.일

부의 생존을 위하여 일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논리입니

다.예수님은 이런 논리를 배격합니다.사람이 5천명이고 떡이

다섯 개일 때 강하고 우수한 인간 다섯 명을 먼저 먹여 살

리자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그것은 빌립의 타산적이고 계산

적인 믿음입니다.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계산이고

강자의 사고방식일뿐입니다.예수님은 다섯 명만이 아니라 5

천명을 다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의 떡이 남는 풍성하고 참

된,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시는 양과 질의 주님

이 되십니다.

생명의 양식,참된 인생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시는 성령이 충만하심으로 여

러분의 삶이 보다 더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현대시인 풀레쳐(Giles Fletcher)의 노래를 들어봅

시다.

방황하는 자여,잘못된 길로 가는 자여

참길은 예수이시다.

헐벗은 자여 부끄러운 자여

참옷은 예수이시다.

굶주린 자여 허덕이는 자여

참떡은 예수이시다.

짐진 자여 눌린 자여

참자유는 예수이시다.

그대 약한가 쓰러지는가

예수는 강하다.

그는 죽음을 깨는 생명이 되시고

그는 아픔을 낫게하는 의사가 되시고
맹인에게는 광명이 되신다

예수를 먹으라 예수를 마시라

그는 생명,영생의 떡이시니.

<Excellency of Christ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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