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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된 행 복 (마 0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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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미국 사람 빌리 로즈가 조사하여 발표한 내용에 보면, 1923년도에 시카고에 있는 엣지워터 호텔에서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경제인 9명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시 최대 독립 강철회사의 사장인 찰스 슈압, 최대 공익회사의 사장인 새무엘 인설, 최대 깨스회사 사장인 하워드 홉슨, 최고의 곡물 투기업자인 아더 갓튼, 뉴욕 증권사장 리차드 휫트니, 당시 미국정부 내각의 한 사람이었던 아더 폴, 금융계의 본부인 윌가의 곰으로 불리우던 제씨 리버모어, 전매업계의 최고자 아이반 쿠르거, 국제 개척은행의 총재 레온 후레저 등 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48년에 이 사람들의 형편과 소재를 알아 보았습니다.
파산을 한 슈압은 죽기전 5년간을 빚내어 꾼돈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인설은 법망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가서 한푼 없는 거지로 죽었습니다. 홉슨은 정신병으로 미처 버렸습니다. 캇튼은 지불 불능의 파산자로 외국에서 죽었습니다. 횟트니는 그 무서운 씽씽 감옥에 들어 갔다가 나왔습니다. 폴은 형무소에서 특사로 간신히 풀려 나와 곧 집에서 죽었습니다. 리버모어는 자살하였습니다. 크루거도 자살했습니다. 후레저 역시 자살로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고 합니다.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금 만능주의자가 되어 돈을 캐려고 눈이 벌겋게 미쳐 날뜁니다. 돈은 좋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돈무더기에 파묻힌 졸부들이 노닥거리는 것을 보면 과연 돈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권세를 부러워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권세가 곧 돈입니다. 유신체제가 끝장 나던 때 김종필씨가 게워놓은 그 엄청난 돈을 보면 권세가 곧 돈이라는 실감이 납니다. 오죽이나 권세가 좋으면 돈더미 속에 파묻혀 사는 정주영씨 까지도 권세를 잡아 보겠다고 저리 노망기를 부리는지요.
그러나 권세도 일장춘몽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불과 30여년 어간에 우리나라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이승만씨, 박정희씨, 전두환씨가 모두 비극의 주인공들이 아니던가요. 돈도 권세도 좋지만 부나비가 불속으로 뛰어 들듯이 자기를 망치는 탐욕의 소산들입니다.
달도 차면 기울듯이 모든 것은 정도껏 해야 합니다. 과하면 망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에는 한정이 없습니다. 누가 그 욕심을 자제하며 누가 그 탐욕을 다스리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분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었습니다. 그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 먹어 보겠다는 사람, 병을 고쳐 보겠다는 사람, 잘 이용하면 국권회복에 도움 되겠다고 군침을 흘리는 사람, 까닭없이 헤헤거리며 어슬렁 어슬렁 따라 다니는 사람들도 수다했을듯 싶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인기만 믿고 자칫하면 김동길씨처럼, 이주일씨처럼 헤까닥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허상에 들떠서 우우 몰려 다니는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가르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 산은 다볼산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해발 300미터의 높이라고 하니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은 아니었습니다. 목초가 우거지고 펑퍼짐한 미국의 초원 같은 것으로 생각지는 마십시오. 황량하고 바위가 많은 작은 언덕들이 줄비한 산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주님이 그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 것은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산을 오르기 위하여 땀흘리는 수고를 아끼는 사람은 뒤로 처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행복에 대하여 배울 자격이 없습니다.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침 소쿠리처럼 움퍽한 지형이 있어 많은 사람에게 강론하기에 적합한 자리에 주님은 앉으셨습니다. 앉아서 가르치는 것은 유대인 선생들의 관습입니다.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입을 열어 가르쳐”라는 관용적인 표현은 격식이 갖추어진 상황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주는 상황에서 사용된다고 합니다. 비록 야외이기는 하지만 주님은 선생으로서 충분한 권위를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 산에서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5대 강화(講話) 중 첫번째의 것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먼저 인생의 참된 행복을 가르치는 팔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팔복에 대하여 상고 하시면서 우리가 복되게 살 수 있는 참된 길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첫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을 천국입니다(3절)
주님은 인간이 참되게 누릴 수 있는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은 사실상 수(數)로 보면 아홉이지만 그 성격으로 보면 일곱입니다. 마지막 두 복은 핍박에 관한 것으로서 복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복을 받게 되는 외적인 조건을 다루었습니다.
이 복은 역설적인 것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것 없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역설적인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차지한다는 것이지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육적인 세상에 마음두지 않고 영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도무지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자세를 가집니다. 내 삶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그들만이 하늘 나라를 찾기 때문입니다.
두 내외가 교회에 다니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늘 기도하고 성실하게 봉사했습니다. 사업도 잘 되었습니다. 재물이 늘어나고 풍성한 생활을 하면서부터 교회의 봉사는 물론 출석마저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부부가 함께 지방 출장을 갔습니다. 남편은 더 머물러야 하고 부인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그만 그 기차가 무서운 사고를 내었습니다. 여러사람이 죽고 이 부인도 일그러진 차체에 깔리어 걸레쪽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겨우 병원으로 옮겨지자 의사에게 애원했습니다. “나좀 꼭 살려 주세요. 죽지 않게 해 주세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의사가 말했습니다. “부인 참으로 미안합니다. 부탁하시는 대로 이루어 드릴 수가 없군요” 그러나 죽음을 앞둔 이 부인은 한탄스러운 고통의 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주 예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살았을 것을”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을 비워내지 못한 자의 불쌍한 말로입니다.
우리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재물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 없기에 심령은 더욱 세상적인 탐욕으로 가득찰 수도 있습니다. 재물이 넉넉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비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가난한 자 되게 하십시오.

둘째 복은, 애통하는 자가 받을 위로입니다(4절)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습니다. 슬픔을 당한 자에게는 위로 받는 것이 최대의 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애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고 그 사랑을 맛봄으로 위안을 받게 됩니다.
사실 불쌍한 것은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1)”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요일 1:8,10)”이라고 합니다.
죄에 둔감해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 불쌍하게 되는 일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를 깨닫고 기분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슬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애통이 하늘의 문을 열고 주님의 손길로 위로 받게되니 이 어찌 복된 일이 아닙니까.

셋째 복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5절)
온유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라우스(πραυs)는 그 뜻을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은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리키며,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그에 따르는 자제심을 말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위대한 지배자는 강자가 아니면 안됩니다. 온유한 자는 타인을 압박하며 능욕할 만한 용기와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배척과 비난과 압박을 받습니다. 시체 말로 바보 같은 멍텅구리입니다. 아둔해서가 아니라 그 자제력이 못나 보이기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하십니다. 땅은 신학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먼저 알 것은 예수는 육신이 되어 땅에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명하시기를 “땅을 정복하라(창 1:28)”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땅을 잃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땅, 즉 흙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의 거처는 땅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땅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려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사탄이 땅에 들어 왔습니다. 땅에 자기의 체계인 세상나라를 조직했습니다. 사람이 발붙이고 살아야 할 땅은 사탄의 지배를 받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부탁하신 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땅위에 그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계 11:15)” 될 때에 땅은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역사는 계속 전개되어 나갑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땅은 모두 불타버립니다(벧후 3:10-13). 새 땅이 창조됩니다(계 21:1) 새 땅위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옵니다. 이 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아 그 안에서 승리한 믿음의 공동체들입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산다는 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으려면 죄악의 욕구를 자제하고 허세 부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원수를 대신 갚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넷째 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배부르게 됩니다(6절)
성경에서 의는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같은 말입니다(사 45:8)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새 창조에 참여하려는 뜻이 간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비로소 구원의 만족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의를 향하여 가장 깊고 뜨거운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이러한 약속과 선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구원의 종교가 아니고 창조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 얻으며(행 4;12)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십니다.

다섯째 복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7절)
하나님의 속성은 긍휼입니다. 긍휼을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긍(矜)자는 ‘불쌍히 여기다, 가엾게 여기다, 괴로워하다, 아끼다’ 등의 뜻이 있고 휼(恤)자에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금품을 주다, 근심하다, 동정하다, 돌보다, 마음쓰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긍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락하밈”은 “렉헴(자궁)”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자기 태를 찢고 나온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 같은 것이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은 성경에 그 좋은 예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보십시다.
유명한 솔로몬 왕의 재판입니다. 한 어린 아기를 두고서 두 어머니가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짐짓 칼을 가져오라고 분부합니다. 그 아이를 두쪽으로 나누어 반쪽씩 가지라는 판결입니다. 이 명령을 듣고 진짜 아이의 어머니는 제 자식을 생각하여 “락하밈”했습니다. 이 “락하밈”을 개역성경은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왕에게 그 아이를 제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우기는 여인에게 주고 죽이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정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여섯째 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8절)
인생은 본래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창조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심령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인생의 눈은 살인, 강도, 음행, 사기, 불의, 부정 등으로 불결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볼 수 없게된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과 집착에 더덕더덕 붙어있지 아니하고 마음이 깨끗해 지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보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바울이 본 하나님, 스데반이 본 그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비쳐라는 사람은 “마음 속에 하나님과 닮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을 이해하며, 그는 하나님과 가장 깊이 관련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닮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복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웁니다(9절)
화평케 하는 자, 그가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말은 영어로 “Peace Maker 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 자기 마음에 평화가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평화롭게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피스 메이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시비와 분쟁을 없애고 평화롭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되게 하시려고 성령님을 주십니다(엡 4:3) 영적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분쟁을 끝내고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재능이 없다 능력이 없다 말하면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덟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 받으면 천국이 저희 것이 됩니다(10-12)
세상은 참으로 묘합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이런 시기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악마의 심보 아니겠습니까. 앞서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치인가요.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세상은 증오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화평케하는 자가 항상 환영을 받는 세상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주님의 제자되는 표시인 것처럼 사람들로부터 까닭없이 반대를 받는 것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누리는 것을 처음 복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복도 천국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지만 또한 그 의를 위하여 핍박도 받아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주님의 뜻이기에 이 고생을 합니다. 십자가의 가시밭 길을 걸어 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이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욕먹어도 기쁨으로 가는 그 사람이기에 천국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 다 그러합니다.
사보라놀라는 말하기를 ”전쟁이 없으면 승리가 없고 승리가 없으면 면류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 구속이 없고 구속 없이는 기쁨도 소망도 생명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비소와 조롱과 박해와 순교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고귀한 은총의 선물이요 영원한 행복이 됩니다. 이 말은 박해 받기를 자청하라는 것이 아니라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마음이 혼란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 걸으신 길을 함께 걷고 고통도 함께 받고 십자가도 함께 질머진 후에 주님의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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