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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내방의 커튼을 젖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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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알아요, 어머니께서 밤마다 주무시지 못하고 아파하시는 모습을. 전 봤어요, 그 모습, 그 눈물. 아무리 못된 아들이라도 그런 모습 보고는 눈물 흘려요. 어서 빨리 나아서 저와 함께 나들이 가요. 언젠가는 제가 어머니를 업고서 저 하늘, 저 우주 멀리 떠나요. 그날을 그날을 기대할래요. 어머니 이제 제가 보살펴 드릴께요.'
이제 막 초등하교 5학년이 되는 아들녀석이 국어시간에 지은 시라며 슬쩍 내 손에 쥐어주고 간 쪽지 내용이다. 어린게 아푼 엄마 지켜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썼을까? 시를 읽고난 후 마음이 아파서 울고 또 울었다. 내 아이의 예뿐 마음 때문에 울고, 어린 나이에 마음 고생 실컷 시킨 미안함 때문에 울고… .
내가 관절염을 앓게된 건 지금부터 13년 전이다. 첫아이를 가진 기쁨으로 충만할 때 손목과 둘째 손가락이 퉁퉁 부어 올라 종합병원을 찾아 검사해 본 결과 임신중독증이라 했다. 아기를 낳으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크게 안도하면서 앞으로 늘어날 새 식구에 대한 기대로 하루 하루를 손꼽으면서 보냈다.
그러나 아기를 낳은 후에도 손목은 걸레 하나 빨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모유를 먹이느라 약 한번 써 보지 못하다가 아기가 세 살이 되었을 때야 비 로소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관절염이 심해진 상태여서 물리치료와 약 물치료를 해도 완전치유는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그래도 아직 심하지 않다니까 괜찮을꺼야. 열심히 치료하면… .'
함께 병원에 갔던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으며 위로해 주었기에 그다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의 말대로 열심히 병원을 다니며 치료했지 만 나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하나 망가지기 시작했다. 첫째 손가락, 가운데 발가락, 발목, 무릎, 어깨…. 무언지 모를 고통들이 내 몸 구석 구 석을 헤집고 다녔고 마음도 점차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10년째 접어 들었을 때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걷는걸 포기해야 할 지경이 되어 버렸고, 매일 맞다시피한 진통제로 인해 또다른 합병증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161Cm의 키에 30Kg도 안되는 체중, 한웅쿰씩 빠 지는 머리카락, 심한 빈혈에 생리 중단… . 급기야 병원에서는 진통제를 비롯한 약물 복용을 금했다.
내가 이 지경이 되자 살림살이는 엉망이 되어갔다. 아내 노릇도 엄마 노 릇도 며느리 노릇도 할 수 없는 나는 허수아비처럼 그저 침대의 한자리만 지킬 뿐이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통을 참아내는 것과 그것도 어려우면 큰소리로 우는 것이 전부였다.
'모두들 건강한데, 거리에 저 많은 사람들 모두 밝게 웃고 있는데 왜 나만… 나도 걷고 싶어! 나도 뛰고 싶다구!'
아무도 없는 텅빈 집안에서 내 고통과는 무관하게 창문으로 쏟아지는 따 스한 햇볕을 바라보며 나는 오열했다. 난 이렇게 아픈데 봄은 어김없이 찾 아오고 햇살조차 이리 따스하니 왠지 나만 이 세상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이후 내 방의 창엔 늘 커튼이 드리워졌다. 하루 24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며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덜 슬프게 죽을 수 있을까'하고 종일 그런 생각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웃음을 잃은 무서운 얼굴로 내게 닿는 모든것들에게 상처를 냈다. 그토록 헌신적인 남편과 아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 이의 도시락을 싸주고 퇴근 후 허등대며 저녁밥을 지어 날 먹여주고 빌린 빨래에 너무나 하기 싫어하는 청소까지 말없이 끝내고는 나의 몸 곳곳의 굳 은 관절을 두 시간이 넘도록 주물러 풀어주고서야 잠자리에 드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변함없었던 남편에게도 나는 웃음 한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움직일 수도 없는 엄마를 위해 세워주고 눕혀주고 온갖 잔심부름에 변기 청소까지 하는 그 어린 것에게도 가시돋힌 말을 서슴치 않았다. 온몸을 조여오는 고통은 내 삶이 의지보다 휠씬 강했고 실제로 내 의지대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텅빈 집에서 극심한 고통에 숨죽여 울고 있는데 아이가 학 교에서 돌아왔다. 아이는 내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저도 날 안고 같이 울면서 '엄마, 힘 내세요, 엄마'하고 조막만한 손으로 내 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내 아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의 넓은 어깨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인가는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아이가 내 어깨 밑으 로 늘어진 이불을 올여주며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가만히 내 가슴 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살아야지. 저 슬픈 얼굴에 웃음을 찾아줘야지. 그 흔한 놀이공원 한번 같이 못 가주고 학교 행사에도 번번히 빠지고…. 얘야, 정말 미안하구 나. 엄마의 도움이 많이 필요 했을 텐데. 내색도 안하고 기특한 녀석, 엄마 는 이겨낼거야. 이까짓 병 이길 수 있어.'
그제서야 나는 알았다.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는 나의 고통을 오랜 시간 시간 내 가족이 함께 앓아 왔음을.
갑자기 막혔던 가슴이 뻥 뚤렸다. 난 혼자가 아니었다. 춥고 가난했던 겨 울을 지나 봄을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있는 힘껏 어둡게 드리워진 내 방의 커튼을 젖혔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편과 아이의 더없는 사 랑처럼 햇빛도 한결같이 내 창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난 다시 태어났다. 그날 이후 내 몸은 조금씩 좋아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운동량은 다섯 발자국을 뒤뚱뒤뚱 걷는 것으로 아슬 아슬 힘겨웠지만 이렇게 일어나게 된 것만도 감사했다. 하루하루 이전의 상냥한 나로 돌아가 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한 결과 몰라볼 정도로 좋와져 자리에서 일어선 후 한 달 뒤엔 아파트 한 동을 돌 수 있게 되었다. 2년만의 외출은 비록 불편하긴 했지만 너무나 즐거웠다. 땅을 딛고 서 있 다는 게 꿈만 같았다. 모두가 정답고 반갑기만 했다. 지금은 시내에 쇼핑도 가고 가끔은 맛난것 먹으러도 가고 부모님 오시면 며느리 노릇도 한다.
이제 우리 가족은 더없이 행복하다. 그 어떤 시련이 닥친다해도 사랑으로 능히 이겨낼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하늘을 향해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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