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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일을 하려면 작은일부터 잘 감당해야 합니다 (시 78:7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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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쏟아놓은 말 가운데 가장 스케일이 큰 위대한 말이 있었다면 이런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이 말을 한 주인공은 1700년대 말기의 세계교회 특히 영국교회가 세계선교의 책임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에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도전을 받은 나머지 아직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한 온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우선 인도대륙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와 남태평양 아세아 모든 나라들 속에 예수의 복음의 영광이 나타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없는 공상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비전을 가졌지만 동시에 아주 실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처음에는 구두 수선공이면서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이었는데 그는 놀라운 열정으로 구두를 만들었고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쿡 선장의 마지막 항해'라는 책을 읽으며 알려지지 않은 지구촌의 나라들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그가 가르치는 교실 한쪽 벽에 세계지도를 만들어 붙여 놓고 선교지도를 완성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도선교 비전이 구체화되자 그는 인도 벵갈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793년 그의 나이 32세에 인도로 출항함으로 근대 세계선교의 문을 연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침례교 선교사인 윌리암 케리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일생, 그의 전기가 남긴 교훈이 있다면 그는 위대한 꿈을 가졌지만 그의 위대한 꿈은 작은일에 대한 성실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가 하나가 되고 새로워지는 통일왕국에 대한 열망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일개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목자로서 양치는 일에 성실했을 때 하나님은 마침내 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기르는 나라의 목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그가 작은 일에 성실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큰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큰일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의 진리라고 할만 합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작은일이 주어졌을 때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까요

본문은 작은일을 우리가 어떤 태도로 감당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1. 작은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큰일로 보이는 일 생색나는 일에는 열심이어도 작은일에는 열심을 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큰일과 작은 일이 따로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의 교훈입니다.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가며 맡긴 5,2,1 달란트는 매우 작은 것으로 느껴지지만 당시로는 어마 어마하게 큰 액수였습니다. 당시 금 한 달란트면 약 20년의 생계비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면 100년을 살아갈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까 그러나 다섯 달란트 맡겨진 종이 다시 그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을 때 돌아온 주인이 어떤 칭찬의 말을 했습니까 내가 너에게 어마어마한 것을 맡겼더니 너는 또한 어마어마한 일을 했다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주인의 관점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인 것입니다. 큰 일과 작은 일을 나누는 것은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큰일도 작은 일이고 작은 일도 작은 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일이 큰일인가 작은 일인가가 아니라 맡겨진 그 일에 대한 충성스러움 곧 성실성인 것입니다.

본문의 71-72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이유가 양떼를 잘 돌보는 다윗을 지켜 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기업으로 맡기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더니 72절의 증언처럼 그는 양떼를 돌보던 때처럼 여전히 마음의 성실함으로 자기 민족을 돌아보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말씀이 있지 않으신지요 눅16:10의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자는 큰것에도 충성되다는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우리민족이 한 단계 더 높은 문화적인 수준으로 성숙해 가기 위해서는 이 작은일의 중요성을 깨닫는 자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민족은 작은 나라에 태어난 열등감 때문인지 유달리 큰것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나라이름부터 대한민국, 최고 지도자도 대통령, 최고학부를 일컬어 대학교, 대학원, 외교사절에게는 대사, 서울시내 도로도 모두 대로(강남대로,양재대로) 다리도 모두 대교(한강대교, 영동대교,성수대교) 심지어는 술도 대포(왕대포)입니다.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의 성실성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할줄로 믿습니다.

2. 작은일에 탁월해야 합니다.

본문 72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백성을 지도할때에 그 손의 공교함으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공교함이란 말은 달리 말하면 기술적으로했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skilful'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전문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기술적인 전문성을 목동으로 있어서 양을 칠 때부터 발휘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맡겨진 일을 감당할 때에 성실성과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전문성입니다. 성실하기는 한데 기술이 없다면 과연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요즈음 처럼 과학 기술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외상을 입어 외과의사의 수술이 필요한 경우를 만났을 때에 찾아갈 수 있는 의사 두분이 있는데 한분은 아주 성실하신데 기술이 전혀 없고, 또 한분은 전혀 성실하지는 않은데 탁월한 수술기술이 있다면 어떤 분을 찾아 가시겠습니까 좀 성실성이 떨어져도 기술있는 의사를 찾지 않겠습니까 물론 제가 두가지 극단적인 가정을 했습니다만 성실성과 탁월한 전문성을 겸하고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두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실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탁월하게!-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처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무엇보다 작은일에 대한 정교함을 요청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소위 마이크로(micro)시대가 아닙니까 작은 마이크로 칩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작은일이 결코 작은일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일은 작은 일에 대한 정교함 그 기술적인 전문성에서 판가름 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3. 작은일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전 목동 시절부터 그는 양을 돌보는 작은 일에서부터 성실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일하는 모범을 보여 왔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질문은 그가 이런 일들을 어떤 기분으로 감당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즐겁고 기쁘게 목양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증거는 그가 남긴 엄청난 분량의 시편들이 그것들을 증명합니다. 그는 시를 쓰며 악기(수금)를 타면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사울왕이 다윗을 궁중으로 데려온 동기도 그가 지혜롭고 용맹할뿐 아니라 수금을 잘 타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오늘의 본문 자체도 시편이 아닙니까 잘 아시는 것처럼 대부분의 시편은 바로 다윗에 의하여 지어진 것들이고 그중에 상당한 부분은 그가 목동이었을 때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노동이 음악이었고 시였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목동 다윗이 즐겁게 양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동일한 즐거움으로 그의 민족을 목양할 것이라고 판단하시게 된 것입니다. 작은일에 즐거워 할수있는 사람은 큰일도 즐거워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노동 그자체를 타락의 결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오해입니다.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경작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창2: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타락 이전의 일입니다.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즐거워야 할 노동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아담에게 주어진 형벌이었던 것입니다.(창3:17-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여기서 수고는 고통스러운 노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노동관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불신자들 보다 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쁘게 일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악기를 타는 신바람으로 찬양하며 일자리에 서서 작은 일을 주께서 맡기신 일로 감당하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의 메세지를 위대한 비전을 안고 인도로 출발한 윌리암 케리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도에 도착한후 대학사역과 성경 번역선교 사역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여 헌신하였습니다. 케리의 초인적인 헌신의 결과로 인도선교의 견고한 기초가 형성되었고, 무려 44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신구약 성경,신약성경,그리고 권별 성경을 번역하는 위대한 기적을 자신의 기대처럼 이루어 낼수 있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인도에만 12개 지역에 선교회 지부들이 세워졌고 버마를 위시한 아세아 선교의 문을 열었습니다. 케리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마다 믿기 어려운 이런 초인적 사역들이 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가능할수 있었는지를 질문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는 정말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여유있게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는 가운데서도 꽃과 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인도 세람포르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어 무려 6,000평의 땅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습니다.그는 친히 가꾸어 놓은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자주 휴식을 취하며 말씀을 묵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원에서 쉬다가 일어날 무렵이면 그는 모든 피곤을 떨치고 다시 즐겁게 일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원의 꽃향기야 말로 나의 사역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열병의 후유증으로 더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 했을 때에도 그는 이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생의 마지막 영감을 얻을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 정원에서 꽃향기를 맡고 있었던 어느날 그를 방문한 동료 선교사에게 그는 이런 마지막 유언적인 고백을 남깁니다. 나의 잔은 가득차다 못해 넘치고 있다네,난 이제 더이상 바랄것이 없다네. 선교사 한분이 그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회고하자 한참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당신은 나에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신듯하오. 이제 내가 죽게되면 내 이야기말고 나의 구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주기 바라오. 며칠후 그가 고요히 마지막 눈을 감았을때 그의 손에는 벵갈어 번역성경 개정판이 들려져 있었고, 열려진 창으로는 아침의 꽃 향기가 방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케리의 생애의 사역 스타일을 요약할수 있다면 이 세마디가 가능합니다. 그는 참으로 작은일에서부터 성실하게, 탁월하게 그리고 즐겁게 일하다가 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여러분과 저의 사역의 모습을 확인해야 할 시간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오늘이라는 이 시간 내게 맡겨진 작은 일에서부터 진실로 성실하게,탁월하게 그리고 즐겁게 일하고 계신가요

인류 구속의 십자가를 지신 우리주 예수님도 소위 3년의 공생애가 있기전에 30년동안 그 아버지 요셉을 도와 목공실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목공실에서 성실하셨던 것처럼 십자가를 지시는 구속의 사역에도 성실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지금이 일해야 할 시간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고통의 절정에서 그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수 있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이 십자가조차 즐거움으로 지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분이야 말로 성실하게 탁월하게 즐겁게 일하고 마침내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오늘 우리는 그의 제자답게 살고 일하고 있다고 고백할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예수를 구주와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는다면 무엇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어떻게요 성실하게, 탁월하게 그리고 즐겁게! 말입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본문 72절에서 다윗이 양치기와 민족의 지도자로 있었을 때의 한결같은 리더십의 특성으로 지적하는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

3. 본문의 내용을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마태25:14-30)와 연관하여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작은일과 큰일의 개념을 정의해 보십시오.

4. 성실성과 전문성(탁월성)의 균형이 왜 중요한지 나누어 보십시오.

5. 우리 각자가 수행하는 일(직업)이나 봉사에서 전문성이나 탁월성의 요구를 어떻게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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