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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보기에 좋은 삶 (창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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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기를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것인데, 열여섯 살 정도 된 나르시스라는 소년이 숲속의 은빛 고요한 아름다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사랑을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그만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는데 「나르시시즘」이란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즉 '자애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 있던 여학생 한 명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아무래도 그 병에 걸린 모양이예요.
『왜 그러니?』
저는 아침에 거울을 보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거울을 떠날 수가 없거든요.
『얘야, 그것은 자애병'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병이란다.』
인간이 거울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즐기고 싶은 의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울을 열심히 보겠습니까?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동기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타인에 대한 의식이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 의식이 우리를 끊임없이 긴장시키기도하고, 열등감이 생기게도 하고, 분노와 수치심을 심어 주기도 하고, 혹은 성취감을 얻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의식 이외에 또 한 가지 신경 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지금의 내 모습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입니다.
저는 이 물음이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파악하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뒤 피조물들을 바라보시면서 느낀 소감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을 보면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창세기 1장의 마지막 절에서처럼 좋구나!라는 느낌을 가지시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조금 발전시켜 '이웃이 보기에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답해 보려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설계를 따르는 삶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절).
하나님께서는 천지(天地)를 설계하신 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천지 창조를 강조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강조합니다. 달리 말하면 설계 이전에 설계자인 그분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이런 방면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진화론이 합당할까? 인간이 어떻게 아메바에서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되어 나왔을까?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런데 사실 창세기 1장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어떻게'(how)가 아닙니다.
우주를 어떻게 창조했는가?는 성경 기자가 말하려는 논지의 초점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 올바른 자세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누구일까? 그분은 왜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입니다. '누가'(who)에 관심이 모아져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에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입니다. 이것은 번역이 쉽지 않은 단어입니다. 『엘로힘』은 본래 복수 대명사인데 복수이면서도 복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즉, 둘 이상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존재, 엄청난 존재, 전능하신 존재를 나타내는 독특한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태초에 엘로힘이…는 다시 말하면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은 전능(全能)하시고 전지(全知)하신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한 엘로힘이시므로 그분의 설계는 완벽합니다. 이 사실이 창조의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그분은 놀라운 지성(知性)과 완벽한 계획을 가지시고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창조가 시작되는 첫 부분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2절).
이 구절에서 혼돈과 공허가 중요한 단어입니다. 혼돈(formlessness)은 히브리어로 『토후』라고 하는데 아직은 틀이 없다, 형태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무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공허(emptyness)는 『보후』인데 혼돈과 공허가 합쳐져서 『토후보후』라는 중요한 히브리어 단어가 생깁니다. 이는 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으로 채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창조는 시작됩니다.
첫째 날에는 빛을 지으시고 둘째 날에 공간과 바다, 셋째 날에는 땅과 식물을 지으십니다. 넷째 날은 첫째 날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빛이라는 틀을 제공하신 다음에 빛을 사용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해와 달과 별을 넷째 날 지으셨습니다. 둘째 날 만드신 공간(궁창)과 바다라는 틀과 무대 위에는 다섯째 날 이 공간에서 날아다닐 수 있는 새와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지으셨습니다. 셋째 날에는 땅과 식물을 지으셨는데 여섯째 날 그 땅 위에 짐승과 인간을 주인공으로 채우셨습니다.

창세기 1장은 단순히 법칙에 따른 전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따른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즐기고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창조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이 엄청난 창조의 일부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계획하고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성공은 내가 소원한 것을 얼마나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얼마나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대로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았느냐로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내 소원이 아니라 그분의 소원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나를 인간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조지 트루엣의 명언이 있습니다.
최고의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최고의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을 던집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은 선한 뜻(good will)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한뜻(perfect will)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우주 만물에도 그 존재의 목적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없을 리 없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이 일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자 하는 자에게 반드시 발견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 7:7).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실 것이고 그 뜻을 행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삶은 단순히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삶입니다.

2.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창세기 1장에 제일 많이 나오는 구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입니다. 우주의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표현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13).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주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고, 지금도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말씀에 올바르게 순종할 때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런던에는 영국 성공회(聖公會)에 속한 바울 대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이 세워진 경위는 이렇습니다. 1600년대 후반에 런던에 대화재가 일어나 런던 시내가 거의 잿더미가 되어 버렸는데, 런던 시민들은 물론이고 영국 국민들이 모두 깊은 침체와 절망과 낙심에 빠졌습니다. 그때 영국 여왕의 마음 속에 국민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멋진 예배당을 지었으면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여왕의 소원을 받들어서 영국의 한 유명한 건축가가 평생 사역으로 그 일을 자원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랜 경입니다.
그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성당의 일꾼이 되겠다고 몰려들었습니다. 무려 35년간에 걸친 대역사 끝에 드디어 1710년 성 바울 성당을 헌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왕이 성당을 어떻게 생각할까가 모든 사람들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특별히 이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던 크리스토퍼 랜은 여왕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 세웠습니다. 그런데 여왕의 입술에서 나온 첫 말이 정말 놀랍군요라는 감탄이었습니다. 이 한 마디 말에 크리스토퍼 랜은 지난 35년간의 모든 수고가 가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성당은 나의 설계와 감독과 더불어 열망을 가지고 그대로 따라 준 이름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완공할 수 있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 10절 이하에서 인생을 집 짓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건축자로서 우리 인생을 짓고 계십니다. 건축자이신 그분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만들어지도록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지시에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작품이 다 만들어졌을 때 주께서 네 인생은 정말 놀라운 작품이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
하나님은 창조의 절정에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대로 지어진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육체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인간도 거룩한 존재로, 하나님이 자유로우신 것처럼 인간도 자유로운 존재로,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인간도 사랑의 존재로,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닮은 존재답게 그분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이란 신(神)과 짐승의 중간 존재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때로 신처럼 행동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짐승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동물 같은 본능을 가지고 짐승처럼 행동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동물과 같은 본능을 따라 살 때가 아니라 오히려 본능을 부인할 수 있는 때입니다.그 동물성을 초월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보일 수 있을 때 인간은 정말 인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나 욕망을 억누르며 하나님 자녀답게 살겠다고 다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동물은 땅을 바라보도록 지어졌지만 인간은 앞을 바라보고 위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고 했습니다. 그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완전한 실체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닮은 보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무엇을 성취했다는 것보다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보통 심리학자들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자기 존재의 확인입니다. 자녀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깁니다.
둘째, 욕망의 투사(投射)입니다. 부모가 못 다 이룬 소원을 자녀를 통해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부모가 제일 행복할 때가 부모의 꿈을 자녀가 성취했을 때입니다. 부모의 진정한 기쁨은 부모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자녀들 아름다운 삶을 살 때 찾아옵니다. 자신을 닮은 자녀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 때 보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도 피조물인 인간이 그분의 이상(理想)을 따라, 그분의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 기뻐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그분을 본받아 살았느냐'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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