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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눅 0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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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은 이상하리 만큼 세계적인 위인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비밀 투표 등 민주의회의 초석을 놓은 영국의 재상 위리엄 글래드스턴, 찰스 다윈, 아브라함 링컨, 악성 멘델스존, 시인 테니슨 등이 그렇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위인들의 업적보다 더욱 위대한 업적을 이룬 한 사람이 2000여년 전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태어났습니다. 이날은 인류의 정신문화와 역사에 대변혁이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분이 태어난 해를 역사의 분기점으로 삼아 기원전, 기원 후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이 누구일까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 12월 25일입니다. 이날은 세계적인 명절이 되어 있습니다.

Ⅰ.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을까요

1.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찬양한 노래를 기록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했습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우주와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인간을 영장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만물은 인간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은 만물을 다스리며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은 다 창조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의 풀 한 포기, 땅속의 벌레 하나까지 다 지음 받은 까닭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겠습니까 더욱 귀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3:7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가 헛된 길에서, 헛된 것만 추구할 뿐 인간 본연의 사명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목적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목적 기능은 상실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계나 물건에 비유한다면 고장이 나 쓸 수모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간 본연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의 방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다는 것은 우리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인 가운데,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 때 육상 단거리에서 3관 왕을 차지한 그리피스 조이너라는 미국의 흑인 여자 선수 있습니다. 그는 경기가 끝날 때마다 경기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금메달을 수상한 후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묻기를 달려갈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달린다. 금메달도 명성도 다 안개다. 운동장에서까지라도 나의 행동, 나의 경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이 나의 만족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치 고장나지 않는 물건이나 기계를 아끼며 잘 관리하는 주인의 마음과 같습니다.

2. 땅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의 노래가운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화평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룩한 사람의 삶의 증거는, 그가 머무는 곳마다 평화가 있게 됩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나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기독교가 있는 곳에 양반과 상민, 남존여비가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평화와 자유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쓴 성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게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 모두의 소원,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Ⅱ.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이룩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일생 대변하는 도구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으며, 어떻게 땅위의 평화를 이룩하셨는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1. 말구유입니다.

본문인 누가복음 2:7의 말씀에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와 호적을 하는 때였습니다. 먼저 찾아온 사람들이 이미 여관을 다 차지했고, 만삭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먼길을 힘겹게 찾아온 마리아는 방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방 한 칸 마련할 수 없어서 구유에 탄생하셨겠습니까 만일 천사를 동원하여 어느 권력자의 집이나, 부자의 집을 찾아가 지시했더라면 어느 누가 감히 거절했겠습니까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방을 비워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유에 탄생하신 그 자체가 진리요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 가득한 하늘 나라에서 추한 세상에 내려오시되, 왕의 궁궐이나, 부자의 호화로운 저택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 오셨습니다. 출생의 때는 구유에 오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곳 없는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가장 높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만큼 존귀하신 분,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낮아져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은 존귀함의 길이라하셨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셨습니다.

겸손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으며, 땅에 평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까 교만하여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화를 깨뜨립니까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사람까닭에 이웃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화평은 깨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건물의 출입문은 아주 낮고 작습니다. 허리를 숙이지 아니하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문 위에 겸손의 문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까지 낮아지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셨고, 땅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 모습을 우리들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2. 세수 대야입니다.

요한복음 13:4-7, 12-15의 말씀에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스라엘나라는 날씨가 덥고 먼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집에 들러오면 먼저 발을 씻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관례로는 가정의 하인이 주인이나 귀한 손님이 집으로 들어오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인이 하는 일, 아랫사람이 하는 그 일을 친히 하셨습니다. 이것은 섬기시는 예수님의 봉사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
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7-28)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지 않아도 될 사람, 도리어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점가운데 하나는 마땅히 섬겨야할 사람까지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섬기는 사람을 찾아 복을 주셨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섬긴 아브라함, 20년간 외삼촌을 잘 섬긴 야곱, 13년간 억울하게 노예로, 죄수로 살았지만 그래도 주위 사람을 말없이 섬긴 요셉, 40년간 애굽의 학문을 통달한 석학이었으나 양치는 단순 노동으로 40년을 처가를 섬긴 모세, 광야생활 40년 동안 한마디 원망과 불평도 없이 모세를 섬긴 여호수아와 갈렙, 악한 왕 사울 앞에서 그래도 신하의 도를 다한 다윗, 끝까지 엘리야를 섬긴 엘리사 등 모두가 섬기기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기 전 먼저 섬김의 자세를 확인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섬길 때 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땅의 평화가 이룩되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이 십자가는 본래 흉악범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목걸이로, 또 어떤이는 뺏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죄인 된 우리들이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서 희생하신 그 고귀한 희생의 상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희생으로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이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평화가 주어졌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 기준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 살아간 삶은 아무도 인정하거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얼마나 희생을 했느냐 하는 것만 삶의 가치로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자신 만을 위하는 것은 동물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이웃을 위해 희생할 때 땅에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이 시간 전국 곳곳에서 4만여 교회, 1200만 성도들이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날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감격한 수많은 선교사들과 앞서간 성도들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습니다. 그 고귀한 희생에 의해 오늘이 있게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평화롭습니다. 다소간 어려움은 있지만 그래도 옛날에 비해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이 평화와 풍요로움이 저절로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애국지시들과 우방국들의 젊은이들이 피 흘려 희생한 대가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참 사람의 모델로, 하나님께 영광과 땅위의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이루시고자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이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본을 보여주신 삶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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