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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앉은뱅이2-기적의 의미 (행 0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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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절에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13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했다. 바로 이 부분을 신자들이 많이 오해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특성 중의 하나는 역사성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일반인들이 갖는 종교의 종교됨, 즉 종교란 무엇으로 인하여 종교 되는 가치와 힘을 갖느냐 할 때에 초월성을 들곤 한다. 초월성은 기독교가 아닌 종교집단에도 있다. 초월성은 어느 종교나 다 있다. 그래서 미개한 사회, 원시인 같은 생활을 하는 부락에 가도 거기에 초월성이 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역사성이다. 이 기적을 논할 때마다 이제부터 우리가 관심을 갖고 추적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성경이 왜 초대교회의 시작을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이런 기적으로 언급하며 설명하기를 기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성경이 약속하고 우리에게 알게 하는 내용들을 성경은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보통 신자들이 기독교는 초월적이고 신비롭고 내용이 알차고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뜻밖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독교의 내용을 잘 정리한 성경의 기록 형태와 내용을 먼저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①성경은 위대한 종교인들의 종교적 사상을 모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적인 내용과 사상을 모은 책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학적 개념을 열거하거나 무슨 신학적인 사상을 추상적으로 철학적으로 논술하고 있지도 않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에 대한 설명도 없다.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냥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성경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무슨 거룩한 얘기, 좋은 얘기가 성경에 없는 것에 사람들은 사실 놀라게 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은 목적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그런 방법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②성경은 깊고 신비한 종교적인 체험들을 모아 놓고 있지도 않다.
물론 신약성경의 대부분의 내용을 쓴 사도 바울은 그런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수많은 체험들을 한 그도 자기의 체험을 주제로 얘기한 적이 없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그의 체험을 나열하고 있지 않다. 그의 체험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한 얘기를 증거하는 데 본인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자신에 관한 설명이 있다.
성경은 역사적인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그 내용들도 역사적인 것들로 삼고 있다. 구약은 전부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신약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초대교회의 역사이다. 역사적인 서술 방법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역사가 90%를 점하고 있다. 그렇다고 성경책이 역사서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책에는 세상 나라의 흥왕성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종교서임에도 중교적 내용을 사상과 논증과 체험으로 하지 않고 역사서의 형태를 빌리고 있다. 그 내용들을 왜 역사라는 것으로 기술했을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과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이 방법을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심리적이거나 감정적인 희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의 주된 내용을 선언하는데 있어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하나의 사건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라는 차원에서도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더 더욱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항복시키시려는 기독교적인 약속과 내용이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훨씬 큰 초점이 있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의해서 만족과 기쁨과 행복으로 가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적을 사건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한 영혼 속에 어떤 기쁨의 묘약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의한 합당한 결론에 근거하여 만족과 기쁨과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기적이라는 것이 도입된다. 그것은 사건적으로 되어진다. 출애굽기 19장에 이런 선언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1-6)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꺼냈으니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를 믿는다 하는 기독교 종교가 세상 역사는 역사대로 흘러가면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데 이 역사 속에서 재앙을 막아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찌니라”(신 6:20-25)
자녀들이 “왜 이런 규례를 지킵니까 왜 이런 신앙생활을 합니까” 물으면 애굽에서 우리를 꺼내셨다라는 역사적인 증거를 대도록 되어 있다. 지키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인생과 역사가 하나님 손에 의하여 벌 받는 쪽으로 갈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었던 생각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또한 우리에게 알게 하려는 생각이다.
예수를 믿으면 보호받고 행복한 정도가 아니다. 역사가 우리를 향하여 문을 연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를 만나러 부름을 받아 오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일들을 우리 앞길에 두셔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들로 우리 길이 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는 곳곳마다 매맞고 발길에 채여 옳은 길로 돌아오게 되는 얻어맞음밖에 없다. 신명기 28장을 보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68절까지를 계속 보면 축복과 저주가 이어져 기록되었다. 이 축복과 저주가 무엇 때문에 기록됐는지 아는가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하면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제발 이 길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쪽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구약을 통해서 결국 어떻게 결론지어졌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기 때문에 여기 떨어졌던 저주들이 그대로 응한다.
그들이 그 나라에서 쫓겨 나가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결국은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진멸되어 그때부터 온 세계를 유리하기 시작하여 1948년 독립하기까지 온 세상 구석구석에서 핍박받으며 살아왔다. 모든 역사가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내는 것으로 가버렸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복음에 앞장설 때는 그 나라는 흥하고 거기서 고개를 돌릴 때는 그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 역사가 증거하는 가장 큰 내용일 것이다.
역사와 문명은 기독교를 따라서 서진하고 있다.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해서 소아시아와 지중해를 넘어 유럽으로 갔고 이태리가 흥했고 이태리를 지나 영국으로 가서 영국이 흥했고 그것이 미국으로 가서 미국이 흥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경제인들의 노력과 수고인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경제가 일어날 만한 조건은 사실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났다. 왜 그럴까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들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신자들은 경제적인 부흥과 함께 신앙을 팔아먹기 시작했다.그래서 모두가 지금 같은 상황으로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다고 안주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배우고 가진 모든 것들이 복음을 위하여 쓰여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인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이 말씀에 있는 저주와 같이 된다. 지금 여기서 선언하는 바와 같이 그는 우리 앞에 생사화복을 놓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의 결정 여하에 따라 우리 신앙생활의 충성도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어떤 결정된 모양이 없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5-20)
이 모든 역사적 기록이 하나의 사건으로 초대교회 맨 서두에 등장하는 것이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추적하는 것은 하나님은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과 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요구하는 것을 좇는 것이 우리의 복이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 앞에 형통한 대로를 만들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쫓아다니시면서 괴롭히실 것이다. 왜 그러시는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살기 좋아지자 기독교는 힘을 잃기 시작했고 신자들은 우리를 포함해서 너무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행복도 의미도 너무나 재미있는 세상에 묻어 버렸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인 것을 기억하라. 우리에게 모든 만족한 것과 행복한 것을 주신 것같이 그가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왜 주셨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걷는 한 걸음, 우리가 결정하는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그가 지켜보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하는가에 따라 우리 앞길을 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앞길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길이요 하나님 나라가 증거되는 것으로 탄탄대로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간섭을 더 많이 구하는 길로 여러분을 몰아 넣으라. 하나님이 아니면 재미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로서 우리의 매일의 삶의 연속이 되도록 노력하라. 그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기적과 우리가 상상했던 어떤 행복과 보람보다도 더 놀라운 감격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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