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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와 일치된 삶 (출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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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말합니 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입니다. 역설적인 말인지 모르겠습니디만, 기실은 그런 착오 때문에 인생이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본래의 인생 목적대로 살면 자연스럽게 행복이 따라 오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의 목적은 제쳐 두고 행복을 잡으러 다니다가 오히려 역작용이 일어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나 실상은 불행한 것입니다. 본말이 전도된 삶의 모습입니다. 예> 피아노가 있습니다. 물론 무생물이지만 의식이 있다고 가정하면, 어떤 경우에 가장 행복할까요 그 존재 목적 대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며 제 기능을 다할 때 일 것입니다. 행복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음악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 다. 행복은 부산물입니다. 만일 피아노 위에 멋진 인형을 올려놓고 치장을 하고 장 식용으로 거실에 방치된다면 진정 행복하겠습니까 전혀 아니죠. 오직 음악 연주라 는 존재 목적 외에 그 어떤 것도 피아노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을 위해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사는 사람은 결 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방황만 있을 따름입니다. 오직 인간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그대로 살아갈 때에 비로소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존재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예배찬송

(1) 창조 목적-사43:7,21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 ...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중에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더더욱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게 창조 목적이요, 인생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영광과 이기심의 충족을 위해 사는 존재로 변질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불행 원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피로 인간을 타락과 불행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즉 구원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인생으로 회복시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구원 목적-엡1:6,12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성공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는 사람은 인생에도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의 '엑기스'인 십계명은 바로 '예배에 관한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전체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드러내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1계명은 유일한 예배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 2계명은 올바른 예배의 방법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화시키면 안되고, 오직 성령과 말씀 가운데 영으로 만나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계명은 무엇입니까 예배의 태도 혹은 자세입니다. 어떤 태도로 하 나님을 섬기고 예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출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 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하지 아니하리라 '망령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랏솨웨'인데, '헛되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고 귀중히 여기고, 더 나아가 높여드리고, 빛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성호'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등을 대표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름이 철자가 잘못되어 온 우편물을 보고 기분 나빠하는 이유도 이름과 나 자신이 동일시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을 높여 드리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명령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하반절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2중 부정, 강조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바로 앞에 6절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3계명 역시 인생의 행과 불행,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계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3계명의 의미를 잘 음미하면서 그대로 실천해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함께 살펴봅니다.

 [1] 직접적인 신성모독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 을 들먹이며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아주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또 서양 사람들의 욕설에 하나님(God) 혹은 예수님(Jesus Christ)이 들어가는 게 대단히 많습니다. 딱한 일이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우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축복이 있겠는가 뻔한 일입니다.

예> 고대 로마 시대에 기독교를 지독하게 핍박하는 황제가 있었답니다. 한 기독교인을 잡아다 막 사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조롱합니다. 야, 네가 이렇게 도대체 너의 주, 목수 나사렛 예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그 사람은 황제 앞에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황제여! 나사렛 예수는 하늘 나라 목공실에서 당신의 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황제는 즉사했다는 사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하나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불신자나 악인이나 하겠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잘못은 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부지불식간에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함을 깨닫고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그럴까요

[2]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실된 마 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이름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그 이름과 더불어 하나님이 항상 자기 앞에 가까이 계신 임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하는 것처럼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입니다.

예>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야훼)이 나오면, 감히 자기 입술로 부르지도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가 지나칩니다. 혹은 여호와 대신 '아도나이'(주님)라고 읽습니다. 성경을 베껴쓰는 서기관들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붓을 빨고 쓰고, 쓴 후에 또 빨고, ... 이런 정도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느끼며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예배드릴 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하는지 모릅니다. 예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도 예배를 잘못드리면 즉사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즉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체를 꺼내러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옷에 방울과 끈이 달아 놓습니다. 여차하면 끌어내야 했던 것입니다(출28:31 이하).

 물론 오늘날 이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배를 귀중히 여기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정말 기쁘게 받으실만 한가 정성이 있고, 진실되고 간절한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다는 엄숙함이 있는가 죄로 영 죽을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예배 시간마다 ...

혹시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찬송이 주문 외우듯이 기계적으로, 의미없이, 입에서 만 맴도는 식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헌금에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담겨 있는지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겅청하고 순종하려는 겸손의 자세가 있는지 모든 예배 순서 순서가 입술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는 예배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때우는 식으로 마지 못해 드리는 예배, 몸은 와 있는데, 마음은 세상의 잡념으로 딴데 가 있는 예배, 겉모습만 있고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예> 어른이 내 앞에 있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면 예배 태도는 쉽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어른이 앞에 계신데 엉뚱한 소리 하겠습니까 조심스럽게 진실되게 말합 니다(기도&찬송). 어른이 말씀하는데 딴청 부리겠습니까 경청하고 금새 순종합니다(말씀). 어른에게 선물 드리는데 성의없이 동냥하는 식으로 할 수 있습니까 정성껏드립니다(헌금).

아무쪼록 우리 예배 모든 순서마다 진실된 마음이 담뿍 담긴 향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뭉게 뭉게 피어 올라 천국 보좌 앞 천사의 금대접에 고스란이 담겨져서(계5:8), 우리 하나님께 올려지는 아름다운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예배와 불일치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 로 예배와 일치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 외에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또한 한곳(예배당)에 있는 모습만 보시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삶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에배를 드리는 순간뿐만 아나라, 우리의 일상 생활 중에도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 우리 자녀들이 가정에서는 잘 하고, 학교에 가서는 엉망이라고 가정해 보시죠.

부모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겁니다. 부모 모셔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정에서도, 학 교에서도다 잘 해야 좋은 자녀입니다.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만 아니라, 가정, 직장, 심지어는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조차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삶 전체가 모드 에배드리는 순간들입니다. 십계명 중에 5계명 이하의 실제 삶에 대한 명령도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예배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원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롬12:1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만일 우리의 예배와 불일치된 삶이 있다면 어찌 우리의 예배가 진실된 예배가 되 겠습니까 밖에서 바람 피우고 집에 와서 잘 하는 척 하는 사람과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 에배는 실패한 예배요, 그 인생도 실패한 인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면서 그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렘7:4이하 4 너희는 이것 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 라 ...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 하며 살인하며 간 음 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 악을 행하면서 성전에 나오면 가로막고 못들어 오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정직한 삶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한 대로, 기도한 대로, 말씀듣고 깨달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공인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 출석하면서부터 공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 크리스챤크리스토포(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그리스도를 등에 업고 다니는 자).

예> 나폴레옹이 사병 막사 시찰 때의 에피소드-보나파르뜨(동명이인)의 오명.

“이름을 바꾸든지 너희 행실을 바꾸라!”

그럴진대 우리가 어찌 조심없이 살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구원받았으나 아직도 죄의 관성이 남아 있어 괴로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삶 전체가 예배라는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상당히 나아지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그것을 잘했다고 고집하지 않고, 겸손히 회개하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성화되어 가는 것을 기뻐받으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도 놀랍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올라갑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시대가 너무 악해져서 우리가 조금만 빛을 발해도 금새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정상이 비범한 것으로 인정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예> 물건 사고, 거스름돈 받았는데, 더 받아서 갖다 주면 주인이 어떤 반응 보입니 까 아이구, 감사합니다. 세상에 요새도 이런 양심적인 분이 다 있네 치하에 치 하를 다할 겁니다. 당연한데 ... 오히려 떼먹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데 ...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만 잘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크게 부담느끼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우리 속에 성령님이 와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힘 주셔서 감당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공예배가 진실되이 주께 드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더 나아가 예배와 일치된 삶을 통해 주의 이름이 더욱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에배에 승리해서 인생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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