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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자족하는 신앙 (빌 0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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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항상 만족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원대로 항상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주위의 환경이나 여건의 변천에 따라 항상 감정과 기분이 부침하면서 괴로운 인생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 소개되는 바울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 중에서도 항상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런 비결을 배웠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육체적으로 부자유합니다. 또 언제 사형이 확정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보건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행복, 기쁨, 평안, 만족 등의 말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4:4 “ ... ... ” 기쁨이 흘러넘치는 모습입니다. 또 빌4:11-12 “ ... ... ” 현재 감옥에서는 물론이고,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온다 해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환경을 초월해서 항상 기뻐하는 사람 바울! 우리가 모두 부러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우리 마음 속에서는 “나와 바울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라는 강한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경지는 바울 같이 특별한 달인(達人)이나 가능한 것이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결코 눈물도 없고, 슬픔이나 고통도 못 느끼는 목석(木石)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이거나 미친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나 우리나 꼭같이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또 감정에 치우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환경에서라도 기쁨과 만족을 유지하는 비결을 터득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하)에 “ ...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랬습니다. 자족하는 신앙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그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터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3절 “... ... ”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은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울고 불고 야단일지라도, 영영 좌절하고 말지라도, 불만과 불평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인생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능했다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꼭같이 가능케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성경 전체에서 적극적으로 명령하고, 또 주시마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기쁨’이란 단어가 성경에 164번, 또 ‘기뻐하라’는 단어가 191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의 신앙 자세가 어떠한가
일 것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 처럼 어떤 상황 가운데라도 항상 기뻐하고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는 말씀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자족하는 신앙의 비결을 몇 가지로 살펴 봅니다.

[1] 환경 조건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환경 조건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착각입니다. 좋은 환경이 생기면 잠시는 기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사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환경 조건은 가변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와 같이 내 곁에 와서 앉았다가 언제라도 훌쩍 날아가 버립니다. 그런고로 환경 조건에 행복의 기대를 거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의 권태감 때문입니다. 환경 조건이 만족스럽다가도 시간이 흘러가면 이내 권태를 느낍니다. 더 큰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다시 불만과 불평이 닥쳐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 우리가 생각할 때 환경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것 같은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불행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적인 거부(巨富)였던 카네기와 록펠러의 고백을 소개해 드립니다.

카네기는 “백만장자는 웃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록펠러는 “나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을 주고, 내가 클리브랜드의 작은 사무실의 화장실에 앉아서 주급(週給)으로 받은 3달러를 만지작거리며 행복해 하던 시절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도 똑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자요, 박사요, 귀족이요, 종교적인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이 없고, 참 행복이 없음을 나중에야 깨닫고 뭐라고 고백합니까 빌3:7-8에서, 그 모든 좋은 조건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환경 조건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자체가 인생에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조건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각자 맡겨주신 인생의 무대일 뿐입니다. 무대가 좋으면 약간 편리할 뿐입니다. 그리고 무대가 나쁘면 불편할 뿐입니다. 무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삶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환경 조건은 각자에게 적당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씀합니다.

딤전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잠30:8하-9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
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의 행복과 기쁨이 혹시 환경 조건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좋은 조건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하지는 않습니까 지나치게 조건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도달해 보려고 안달복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을 감사하게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맡은 일에 성실하게, 부지런히 임해야 하지만, 지나친 욕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쪼록 환경 조건이 결코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항상 만족할 수 있는 전천후 신앙의 첫 걸음이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2] 항상 자족하는 신앙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빼앗는 것이 염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내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① 염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백해무익’하다는 점입니다. 이로운 점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해로운 점만 많습니다.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가 우리 삶에 아
무소용이 안됨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염려는 우리의 인생을 파괴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영어로 ‘염려’라는 말이 ‘WORRY'입니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물어 뜯는다’는 뜻입니다. 짐승이 이빨로 목을 물어뜯어 질식시키는 것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염려가 사람을 해치는 독소를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잠17:22에 보니까,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근심과 염려가 많는 사람들에게 관절염 발병율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대로 신경성 위장병, 신경성 두통 등 소위 심인성 신체질환이 현대인들에게 대단히 많습니다.

②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원치 않는 염려가 왜 생깁니까 우리를 능히 건져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고, 단지 눈 앞의 어려운 환경 조건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꼭같은 오류를 반복합니다.

<예> 안개를 예로 들어 봅니다. 안개가 짙게 끼면 시야가 가리우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안개는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 그 뒤에 태양이 있기에 금새 걷히게 됩니다. 조사에 의하면, 약 30미터에 해당되는 안개가 6,000억 개의 물방울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엄청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걷혀서 물로 된다면 한 컵 분량의 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악조건은 크게 보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③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염려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빌4:6-7 입니다. “ ... ... ”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임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즉 전혀 예상치도 못 했던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이 우리 마음 속에 솟아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체험하는 실상인 것입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을 때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런 평안이 분명히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려운 현실 조건을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매일 다가오는 스트레스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그 가운데 사로잡혀서 염려만 한다면, 여러분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오십시오. 아무런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에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신실하신 주께서 분명히 기쁨과 평강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인생의 각종 염려의 상황 가운데서 기도함으로써 날마다 기쁨을 유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항상 자족하는 신앙을 위해서는, 예수 중심의 인생관으로 변화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항상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옥살이의 의미와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환경 자체가 나쁘다고 망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를 모를 때에 망합니다. 좋은 환경이라도 그 가치를 모르면 망합니다. 반대로, 나쁜 환경이라도 그 가치를 알면 얼마든지 인내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 조건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관 혹은 가치관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은 이후 인생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자기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한 몸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빌1: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
니”

당시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투옥되자 그를 시기하여 복음을 전하면 바울이 더 고역을 치루겠거니 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야비합니까 그러나 바울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복음이 전파되니 오히려 기뻤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투옥된 것을 안타까이 여겨 대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바울이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왕궁 시위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또한 기뻤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중심의 인생관으로 변화되자 그
는 이래도 저래도 기뻤습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면 나 혼자의 행복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살려고 결심하면 이것도 충족되고, 나 자신의 행복도 보장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슈바이쳐도 자신의 인생 체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살라! 그러면 당신도 행복해질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 중심의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코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항상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삶의 원리를 산상수훈 가운데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관을 갖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어떤 인생관을 심어주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제 나와 내 피붙이만을 위한 편협한 인생관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주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중심의 인생관’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바라건대 여러분 모두가 예수 중심의 인생관을 갖고 사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고, 여러분 자신도 항상 기뻐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항상 자족하는 신앙을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죄사함 받은 후 얻은 생명을 즐기는 것입니다.
생명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요10:10 “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여기서 ‘아는 것’이란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즉 영생은 이 다음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생활 속에 모셔 놓고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생명이요, 영생입니다. 그런 삶이 이 지상에서부터 계속 깊어지고, 풍성해지다가, 장차 천국에 들어간 후에는 완전히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천국을 설명할 때 황금길이 있고, 생명나무도 있고, 진주문이 달린 보석으로 된 예루살렘 성 등 물리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천국의 본질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말씀했고, 또 계21:23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여러 가지 물리적인 축복도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더더욱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 생명 자체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기뻐하고, 항상 어떤 환경 조건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 안에서’! 무슨 뜻입니까 주님과의 연합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내 속에 계시매, 나의 생활 속에 계시매 나머지 환경 조건이 좋아도 나빠도 별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건이 좋으면 어떻습니까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이신 주님이 계시매, 좋은 조건 주신 것에 감사할 뿐, 집착할 필요도,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 조건이 나쁘면 어떻습니까 낙심, 좌절합니다. 기쁨을 잃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연합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주님과 함께 라면 어느 곳이라도, 어떤 처지라도 좋습니다! 불편하리는 몰라도 주님과의 밀월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마치 맑은 샘물에 흙이 무너져 흙탕물이 되어도 금새 맑은 물로 회복되는 것과 같습니다.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기쁨과 평안은 금새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4:7-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랬습니다.
질그릇처럼 나의 인생은 연약하지만, 그러나 내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시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그것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더 즐거워하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그 고난 보다 몇 배나 강하고 존귀하신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여러분 가운데 항상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맺는 말 >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조건 때문에 때로는 희희락락하고, 때로는 낙심과 불평에 빠지는 얕은 신앙이었다면 이제는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어떤 환경과 형편 가운데서라도 기쁨과 만족을 충만히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자족하는 신앙입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자족하는 신앙을 소유하셔서 항상 만족하는 생활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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