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희망할 바를 알려주시는 하나님 (엡 01:15-21; 요 14:15-17)

첨부 1


인간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세상이 가장 악하고, 가장 어렵다고 인식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오늘 이 시대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이 너무나 어려운 문제들이 많고 또 이 세상은 매우 위태롭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남.북 관계가 북핵문제로 악화 되어 전쟁 위기를 겪었습니다. 만일 이 땅에서 전쟁이 터지면 핵전쟁일것 이기에 우리는 정말 공포를 느꼈습니다. 또 최근에는 김 주석 사망의 상 황으로 우리 남쪽에 소위 '신 메카시즘'적 공안한파가 불어 닦쳐와서 학 생들이 마구 구속되고 있고 사회는 뒤숭숭합니다. 이러한 민족사적 위기 에다가 또 물가폭등으로 우리 사회는 혹서에 가계위기도 겹쳤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여기에 자연적 재앙, '유사이래 처음'이라는 불볕 더위와 가뭄이 우리 땅을 덮쳐서 우리들의 위기체감도가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 다. 그야말로 우리의 상황은 총체적인 위기로 느겨지고 있습니다. 민족적 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두 감당하기 어렵게 여겨지는 어려움 을 직면하면서 우리는 오직 좌절감과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수 없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적인 데가 보이지 않은듯 합니다.

 각 시대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감정과 시대적 풍조는 종 교신앙에 그대로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하는 기도와 설 교는 물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많이 불렀으나 요즘은 그 가사의 내용이 너무 피안적이어서 별로 부르 지 않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구주의 뜻 준행하니/ 참 기쁜 복 내것일세 (1절) 이 세상은 늘 변하고/ 험학한 일 참 많으나/ 주 은헤만 생각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2절) 이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 더 좋으니/ 내 맘과 뜻 다 합하여/ 저 천성만 향해 가네 (5절).

 이 찬송가에 반영된 기독교인의 세상과 현실인식은 이 세상은 요란하 고 늘 변하고 험악한 일 참 많으나라는 데서 엿볼수 있듯이 매우 부정 적인 것이고 비관적이며, 그래서 오직 내 맘과 뜻 합하여 저 천성만 향 하여 가네라는 데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피안적 신 앙, 타계적 신앙이라고 특징지을 수 잇습니다. 저는 이러한 피안적 신앙 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르침과 정신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설교해 오고 있습니다만 본래 예장 출신인 저의 신앙의 기초이고 기조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존하는 이 세상의 질서를 보다 정의와 자유와 민주가 실현되는 사회질서로 되도록 변혁을 가져오는 데에 관심하고, 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관심하고 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운동'이라는 것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민 주화, 인권, 사회정의, 평화, 통일 등을 관심하고 이에 대해 많이 설교하 고 비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목회의 한 부분이고 사명이라고 확고하게 민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수적 교회에서는 진보적 신학노선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진보라는 것을 부 정으로 보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제가 진보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신학과 신앙노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도 여러 교우들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다고 그것 들을 저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나의 궁극적 인 희망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현실은 결국 안개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라는 것, 인생은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은 풀의 꽃 과 같으며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진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성서의 인간 관, 세계관을 저는 확고하게 믿고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유한한 세 상은 궁극적인 실체도, 인간의 고향도 아니며 다만, 인간이 잠시 와서 살 면서 순례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을 순례를 한다는 것은 인간은 이 세상 에서 유한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하늘의 뜻을 깨닫고 생의 사명을 깨달아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이 생과 현실로 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세상을 도피하 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보이는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현실이 있다 는 것, 그것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가야하는 목적지이고 고향이 라는것을 믿습미다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을 우 리는 사명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 본문에 도 확인되어 있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가 기도하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목회자로서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어떤 내 용의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 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었 을 바랄것이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 고 큰 것인지를 알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 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 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 1:17-19)

그는 에베소 교인들이 어떤 것을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 다. 에베소 교인들이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무엇을 바랄것 인지..또...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 기 바랍니다....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 여 주시기 빕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어떤 것들을 알게 되기를 바울은 기 도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에베소 교인들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적 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둘때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그들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째 성도들이 물려받을 축복 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빈다는 것입니다. 넷 째 성도들 가운데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그들이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의 내용을 관찰할 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교세의 확대, 복음화, 교회에 대한 충성과 섬김,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얻거나 잘 할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복을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우리들의 기도-우리는 이것을 기복 신앙라고 합니다-와 대조적입니다. 또는 바 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신앙이나 우리가 요즘 특별히 많이 듣는 영성이나 경건의 성장, 발전을 위해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알게 되기를'위해 기 도하는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물론 기독교는 소위 철학에서 말하듯이 주 지주의란 지성적.합리적.이론적인 것을 중시하는 입장(민중 엣센스 국 어사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주지주위는 아닙니다.그렇 다고 기독교는 맹목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합니다. 아니 그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에게 하느 님을 바로 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 유대인 들이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이지 않는데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 를 둔 것이 아닙니다(롬 10:2). 신앙에 있어서 바른 지식의 중요성을 일 깨워 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2천년전 에베소 교인들만 위한 기 도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입니까 적어도 바울이 기도한 바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선적으로 네가지를 알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 네 가지란 무었입니까

첫째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아는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알되 '바 로', '진정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참 하느님'을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로 알고 있습니까 그는 누구입니까 성 서가, 특히 특히 에베소서가 말하고 있는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랑의 하느님 이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이 세상의 섭리주며 이 세상의 구원주이십 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믿을때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하 고 이 세상을 도피하고 부정할 수 있습니까 미국인들이 잘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그의 손안에 가지고 있다는 가사가 있습니 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손 안에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눈동자처럼 사랑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것이 바로 성서의 복음입니다.

 하느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바로 알려면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압됩니다. 오늘 본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지 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하느님의 은혜라고 말할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열성은 인정하나 그 열성이 바른 지식에 근 거하고 있지 않다고 바울이 비판한바 있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비판입 니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바로 우리 한국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이 아닙니 까 한국 기돌교인들의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특정지우는데 그것은 하느 님을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기보다 마치도 요술 방망이로 믿는듯이 끝없이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기적인 동기나 탐욕 을 문제시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또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대하 여 부정적인 가진 나머지 저 세상, 피안의 세계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습 니다. 이러한 신앙을 타계적인 신앙, 또한 피안적 신앙이락소 할 수 잇습 니다.이러한 기복적인 신앙이나 타계적, 피안적 신앙의 문제는 다른 어떤 것 보다 하느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바로 알 때 우리 신앙의 부조리의 많은 부분이 고쳐지리라고 봅니다.

 두번째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 니다.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특징은 희망적이라는 것입니다. 기 독교인들은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암담하고 고난에 찬 것이라도 우리는 희망으로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넘어서 메시 아가 재림할 것을 희망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기를 희망하 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희망할 것 입니까 바울은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했습니 다. 희망할 바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분, 우리들이 무엇을 희망하고 바라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냥 희망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희망(The hope of the call)이라고 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희 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공연 히 부름을 받은 일은 없습니다. 할 일이 있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냥 기독교인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맡기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고 소명을 받은 것은 에수님의 그것과 직결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앗듯이 우 리도 그리스도에 의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께서 나를 세상에 보낸것 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 한 17:18)고 했지 않습니까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 은 소명은 무었입니까 예수님의 소명의 목적의 연장이고, 계승이고 계속 입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2장 14-1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그의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이고 그가 십자가 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의 의미, 그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효과 등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가지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설 명했습니다. 그것은 화해, 평화, 일치(통일)입니다. 우리 강단을 통해서 이 세가지에 대해서 충분히 강조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이 세상에서 할 일은 화해, 평화, 일치(통일)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른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희망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개 교회가 커지고 영광스럽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지 않 습니까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의 희망이 무었입니까 적어도 지도자들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10여년전에 국내 최대교파인 예장의 총회장님이 미국 에 와서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 상황을 설명 하면서 현재 기독교인의 수가 전 인구의 25%인데, 이것은 그리 자랑스러 운 수치가 못된다. 전국민 4천만명이 모두 기독교인이 될때가지 만족할 수 없지만 당분간 그것은 어렵고 다만 최소한 50%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르므로 한국교회는 지금 무엇보다도 오로지 전도에 힘쓰야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의 과제와 사명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전도이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총회장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들려준 '교훈'이고 당부였습니다. 그가 말을 하게 된 맥락은 미국에 있는 한국이민교회 목사들이 한국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고 통일과 같은 문제에 관심하고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 습니다.

 우리 한국기독교는 스케일이 아주 큽니다. 전군, 전경찰, 전민족 복음 화 등 주로 전체가 아니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요즘 우리 한국기독교의 복음화의 지평이 넓어졌습니다. 그것은 통일이 되면 복음화 할 새로운 지 역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신론자들 2천2백만 정도가 살고 있 는 북한입니다. 그동안 반통일세력이었던 한국교회가 요즘 통일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데 그 중요한 동기는 바로 복음화입니다. 감 리사를 파송하고 이북 5도노회, 서부연회도 있고, 옛날에 교회가 있던 곳 을 되찾아서 강단을 수복하겠다., 어느 지역에 어떤교회를 세우느냐는것 등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여기 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데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여기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소명자의 희망은 화해, 평화, 통일이 아닙니까

오늘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최대교파인 감리교, 침 례교 같은 교회가 매년 1백만명 정도 감축되고 있어 우려가 되고 있습니 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성장을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몇년전부터 성장이 둔화되고, 정지되고 이제는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근간의 신 문보도입니다. 저는 최근에 어는 교회에서 교인이 감소한다고 하여 어느 집사가 담임 목사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지 금 기독교가 줄으드는 추세는 그 교회만도 아닙니다. 요즘 우리 교회는 교인수의 감소가 주일예배 때에 현저하게나타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매우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우리 교회만도 아니고 그동 안 교회성장을 누렸던 대교회들도 교인감소가 눈에 띈다고 말하고 있습니 다. 교인감소가 걱정이기는 하지만, 교회나 교단의 지도자들이 이런 문제 에만 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중세처럼 전세계를, 전민족을 기독 교화하여 권력을 떨치고 번영과 영광을 누리려는 데에 희망을 둘수 없듯 이 한 교파나 한 교회가 교세를 크게 확장하고 교회를 대교회로 하고, 교 인숫자를 늘리는 데에 희망을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화가 중요 하지만, 교회가 추구할 제일차적인 목표로 될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보냄을 받은 일차적인 목적도 사명도 아니었다 는 데에서도 명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희망할 바가 무었입니까 교회 가 크던지 작던지 화해, 평화,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 그러한 세게를 실현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걸어야 할 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지난 번 김일성 주석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토요일에 왔고 그 다음날 주 일이었습니다. 젊은 신문기자들은 그동안 반공을 설교해 온 목사들이 어 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호기심이 있어 시내 중요한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 를 들었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주요 일간지의 기자들이 왔었습니다. 그런 데 어떤 큰 장로교회에서는 '김일성이 죽은 것이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었 다. 그가 죽은 것은 하느님의 심판의 결과이다'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 다. 어떤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에서는, 또 여의도의 큰 교회에서는 교역 자들의 이름으로 '김일성에게 조문이 왠말이냐'고 햇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말이고 생각이고 희망입니까

셋째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게 되는 일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났는가, 어디를 보나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우리의 현 실, 그 현실, 그 현실 상황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가지로 반성하고 성찰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활동과 하느님의 능력을 말할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본문에서는 하느님이 얼마나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가를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가,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력을 우리는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온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만이 아닙니다. 온 우주를 다 포함하여 하느님이 창조하셨고 그 창조의 위업은 실로 놀랍고 위대하십니 다. 이 세상의 주권만이 아닙니다. 공중과 우주에 있는 천신들의 권세까 지도 모두 그의 발아래 굴복 시키시고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주권, 그것이 실로 위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으 며 그 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걸 지배하게 하셨습니다(엡 1:22). 이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 신 위력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반생명의 세력, 미움의 세력, 불의 의 세력이 악마와 결탁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에수 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셨는데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반생명의 세력, 미움의 세력, 불의의 세력이 생명을 의로 운 세력을 억압하고 감옥에 넣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해하고 실망하 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활동하고 있는 하느님의 위력을 알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받을 축 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상속받을 축복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되어있습 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로 부터 받을 축복이란 무엇 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닙니까 우리가 그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축복의 백성이된것,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축복의 풍성함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살려내 주시고 해방해 주신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스러운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 서...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앗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이 구원이 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엡 2:6-7)

그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꺾고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약속입 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그 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밑질 일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미움 을 받고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껏해야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끝입니까 우리가 죽임 을 당한들 그것이 무서울 것이 있고 문제가 될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시 살리심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약속, 그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주인이 될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상속인 것을 알때 우리가 어찌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 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 민족사와 세계사의 현실에서 반생 명, 미움, 불의의 세력이 판을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세력에 의해 우 리가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절망할 것입니까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절망은 불신에서 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이 어떤분인지 를 바로 알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할 바를 바로 알때, 하 느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고 어떤 위력을 떨치고 계시는 가를 알때, 우리가 받을 상속이 무엇인지를 알 때 우리는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설교을 듣고 응답하는 기도.

 희망할 바를 알려주시는 하느님, 화해와 평화의 성령에 배반하는 광폭한 시대의 흠암과 유래없는 극심한 가뭄과 폭염에 시달리며 절망하는 이 민족의 현실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희망의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주님! 당신께서는 그 뜨거운 열사의 모래땅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순종으로 감수 하시고, 죽으심으로써 하느님의 본체를 증거하시고, 바라보아야 할 소망의 나라를 열어주셨습니다.

 그 소망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저희도 부끄러운 탐욕에서 놓여나게 하옵시고, 이기심으로 어두어진 눈을 씻어주셔서 세상 가운데서 참 하느님을 뵙게 해주시옵시옵소서.

 가치없는 논쟁으로 은총의 빛을 가리우지 않게 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끌어 당길 변혁의 삶에 뜻을 두고 올곧은 희망을 지키며 살수 있는 크리스천으로 붙들어 주시옵소서.

 절망의 세태 가운데서도 희망할 바를 다시 깨우쳐 주신 주님께 기쁨으로 감사하며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