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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시대적 사명 (엡 0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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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순교하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처 지에서도 에베소 교우들에게 무엇보다도 '생각하라'고 강조하고 있습 니다.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 한 교회 내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대조해서 생각하고 한 것입니다.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 요...,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 수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제71회 총회 후 1년간은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교계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중요한 한 해였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모든 자 유가 한꺼번에 분출되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다 숭요하기 에 힘겨웠고 또한 피곤했다고 봅니다. 우리 총회는 이 시대에 대처하 기 위하여 성명서, 혹은 목회서신 등을 통하여 진로를 밝힌 바가 있었 습니다. 이런 격동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제72회 총회의 주제를 '정의, 평화, 일치를 통한 교회'로 정하게 된것 입니다. 우리 총회는 하나님과 이 백성 앞에 참된 민주화와 복음의 증 인이 되기 위해서'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깊이 자각하면서 우리의 소 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올바른 삶을 넓게 심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옳게, 양심대로 살자는 명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또한 바르게 사는 일에 무슨 요령이나 수단방법이 있겠습니 까 옳게 사는 그 자체가 참이기 때문에 어떤 소식도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혼란하여 복잡한 때일수록 옳게 살아야 신앙의 진가가 나타날 것입니다. 옳다는 것은 바로 정의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의라는 것은 사회규범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합니 다. 좀더 간단히 요약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정의 란 그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정당 한 몫이 침해를 당했으면 바로 잡아 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뿐만 아니 라 개인의 능력이나 업적에 알맞게 재물, 지위, 명예 등을 공정하게 하는 배분의 정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간단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노사분규, 권력구조, 사회적 지위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와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공평무사하게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문화민족으로 자부한 독 일인들이 민족성의 우월론을 내세워 죄 없는 유태인들을 대량학살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였습니다.

또한 가까운 예로, 정치적 보복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여.야가 서로 경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는 복수심이 잠재하고 있다는 증 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옳게 산다는 것은 좀더 깊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음미해야 할 과제인 줄로 압니다. 양심적이고 신앙 적인 입장에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는'데서만이 가능할 것입 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참된 바른 생활은 하나님과 인간,그리고 이웃 과의 옳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는 그런 수리적, 물량적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는 옳은 인간관계라고

할 수있습니다. 주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친교관계를 통하여 높은 정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이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정의가 우리의 교회 를 통하여 체질화되고 확산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평화를 활성화하고 정착시켜야 하겠습니다.

인간 사회에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벌써 남.북이 분단된지 40여년이 넘었습니다. 아직도 긴장상태가 얼마나 더 할런지 아무도 모릅니다. 도처에 불신이 있습니다. 갈등과 불화, 그리고 대결 이 자유의 거센 물결을 타고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샬롬'이나 헬라어의 '에이레네'는 평화나 평강을 의미하 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원적인 깊은 뜻은 '완전,완성,결함이 없는 무 흠'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들고 헐벗으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평안치 못할 것입니다. 건강하고 부족함이 없는 선한 삶을 살때 평안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 을 보고 도와주어야 마음이 기쁘고 평안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 서, 이웃이나 사회가 번영하고 안정되었을 때 세상이 평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경쟁 집단간의 적대감정이 사라지고 전투행위 가 없어졌을 때 평화롭다고 하지만 이는 다 피상적인 것입니다. 6.25 사변이 멈춘지 30여년이 지났지만 남.북간에 평화가 수립되었다고 하 지 않습니다. 서로의 불신과 오해,그리고 적대감정을 모조리 십자가에 완전히 못박지 않고서는 평화가 회복되지 못할 것입니다. 눌린 자, 병 든 자, 헐벗은 자, 소외된 자, 사람다은 삶을 살지 못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인이 있는 한, 사회는 절대로 평화롭지 못할 것 입니다.

우리를 화목케 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심장이 뛸때, 신비하고 이상스러운 평화가 우리 마음과 사회에 충만할 것입니다. 할 수 있거 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하 고 있습니다.

옛날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원수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 위에다 십 자가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이것을 안 당사자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겁 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왕이 저들을 다 불러 놓고 여기 십자 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내 죄 까지도 용서해 주셨으므로 나도 여러분의 죄를 다 용서해 드립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을 용서해 준 왕이나 용서를 받은 사람이 다 화목케 되고,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어떤 희생의 있더라도,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평화를 이룩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되는 공동체의식을 넓혀야 하겠습니다.

누구나 범죄하면 친교가 깨집니다.그리고 분열이 생겨서 멀어지기 마 련입니다.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도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은 후부 터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한 몸인 부부 사이에도 금이 가서 서로 책임을 떠맡기는 변명이라는 수법이 들어왔습니다. 교제를 못하고 보니 외롭고 우울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복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이 때 문에 가정불화가 잦았습니다. 현제간에 싸우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

나 상했겠습니까불행을 사전에 막기 위해 아브라함은 생전에 재산을 분배해 주어 이스마엘을 멀리 가서 살게 했습니다. 이처럼 죄는 친교 관계를 파괴시켰고, 또 사랑의 한 공동체적인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었 습니다. 이렇게 불화한 형제 사이를 가깝게 접근시킨 것은 아브라함 이 죽었을 때였습니다. 저들은 화개하고 장례식을 합심해서 잘 치렀습 니다. 축복은 하나되기 위해 마음을 넓힌 이삭이 받았습니다. 부친 생 전에 화개하고 하나가 되었더라면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습니까 예수 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들은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불 화하고 원수되었던 우리들이 한 형제 자매가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 니다.

우리는 말로만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이 신령한 지체로서 동고 동락하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리 신조가 같은 교회가 수십 개의 교파로 나뉘었다면 어찌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또한 분열하 고, 불화하고, 멀어지면 예수님을 다시 시자가에 못박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한 교회에서 등을 지고 예배드린다면 주님께서 불편하 여 그자리에 임재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힘써서 하 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계대전시 프랑스에서 전사한 시신을 전우들이 메고 와서 교회묘지 에 안장하려고 성직자와 교섭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묘지법에 따라 세례자만이 가능해서 세례 여부를 물었을 때, 저는 알 수가 없다기에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법이 그러하다 하여 할 수 없이 묘지 울타리 밖에다 안장하고 군인들은 갔습니다. 얼마 후에 그 군인들이 그 무덤을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직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 은이의 시신을 세례 여부로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고민하다가 다 음날 새벽에 그 궁닌의 묘까지 포함해서 묘지 울타리 울장을 옮겨 놓 았다는 것이었습바니다. 인간적인 제도나 법을 넘어서 예수님의 사랑 으로 그 군인은 하나의 묘역에 잠들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성직자와 군 인들과의 갈등과 주장도, 견해 차이도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다 없 어졌습니다. 분명히 사랑의 한 공동체에 귀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려운 때를 만났습니다. 우리들은 성경말씀대로 화목 케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을 자인하고,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화를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서로 불신하거나 불화 해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귀한 명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가 될것입 니다. 지난날의 나뉨의 역사를 깨끗이 씻고 서로 하나됨을 힘써 지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총회가 이 책임을 다할 때 위대한 공헌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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