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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가 됩시다 (엡 0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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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부터 3장까지에 걸쳐 사도 바울은 기독교신앙의 귀중성에 관해서 언급했고,영원한 진리 및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있어서 교회의 기능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데 이제 4장부터는 교회가 하나님의 숭고한 계획과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교회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인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교회가 교회의 숭고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성도답게 살아야 하며,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도가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도가 하나되어야한다’고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오늘 모든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부터 하나님과 인간은 멀어졌고 그 결과 세상에는 불화와 부조리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과 다툼과 분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분리는 언제나 불행과 비극을 초래합니다.
자식이 부모와 등질때 불행하게 되며,사람이 하나님을 떠남이 가장 비참한 일이요 영원한 비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화목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는 차별이 있을 없으며,분단의 벽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남과 북도 있을 수 없으며,귀하고 천함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엔 이런 일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3절 초두에서 부터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말하기를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은 이 하나됨이 외부적이고 기계적이 아니라,내부적이고 유기적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외부적으로 교회를 연합하여 모든 종파와 교파를 없애고 거대한 초교파 교회를 이루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진리와 비진리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교회를 통합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오직 교회의 연합은 진리안에서의 합동이요,진안에서의 연합인 것입니다.
1-6절에서는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가 되며 또한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행정과 조직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기초를 이루는 신앙고백의 원리와 교리는 절대로 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적인 연합이요,내적인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진리로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7-12절까지 그리고 16절 말씀은 보면 ‘하나됨’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장’에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하나됨으로써 피차 은혜가 되며,그 결과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며,성장하여 교회의 사명을 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아니하고는 성도들의 신앙이 옳바로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단과 사설과 같은 사탄의 역사를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어린아이 자리에서 투정만을 부리고 문제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면 반드시 자라야 합니다.
1절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은혜와 복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며,실제적으로 행하여야 할 것을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몸된 교회를 위햐여 일하는 가운데 대접과 칭찬은 커녕 오히려 환난과 핍박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옥에 갇히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하여지지 아니하고,하나님을 의심하지 아니하며,믿음에 더욱 충실하였습니다. 인간의 수단방법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종이요,하나님의 자녀로써 부끄러움이 없는 자입니다.
잠25:19절에 “환난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오히려 고통을 더할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에 충실한 성도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 무엇입니까
2-3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반드시 사과 열매를 맺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반드시 행위에 있어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겸손이요,둘째가 온유요,세째가 오래참음이요 네째가 사랑이요 다섯째가 용서요,여섯째가 화평이요,일곱째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주위에 박힌 빛나는 일곱개의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믿음의 줄에 낀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입니까
이 여섯가지가 다 하나되게 하는 덕이올시다.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되게 하는 덕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1).겸손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덕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큰 것입니다. 그래서 ‘바실’이라고 하는 분은 ‘겸손은 모든 미덕을 담은 보석상자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제자들이 덕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어냐고 물었을때 그는 말하기를 덕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첫재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이야 말로 덕가우데 가장 크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지식이 많은 사람,재물이 많은 사람,가문이 훌륭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겸손한 자를 찾으시며 그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사 교회의 귀한 직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이 무엇입니까
첫째,사람이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는 정직한 태로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자기 진상보다 낮추어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빌2:3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각과 행위를 말합니다. 더욱이 영적생활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세째,책망을 달게 받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앞에서의 자신을 보기때문에 바른 책망과 의인의 책망을 달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만이 발전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141:5절에 보면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할 것인가
본문에 보면 ‘모든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있어서나 어떤 상황에 있어서나 겸손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의 특징은 남이 알아주던,안 알아주던 적든지,크든지 언제나 감사하므로 충성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2)온유입니다.
참으로 온유한 성품은 복받을 성품입니다.
마5: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온유는 베는듯하고,쏘는듯하고,찌를는듯 함에 반대되는 것으로써 손해나 방해를 받아도 분을 내거나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거나 하지않는 것이며,모든 일에 있어서 조급하지 않고 경솔하지 않고 침착한 미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진리를 보고 묵인하는 성품이 아닙니다.
마치 온유한 성품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운 얼핏보면 약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물처럼 강하고 힘이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고,휩쓸고 흘러가는 홍수는 이 산을 옮겨 저 골짜기를 메운는 것처럼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만이 강한 자요,큰 일을 해낼수 있는 좋은 일군입니다.
3).오래참음입니다.
헬라 원어로 ‘마크로 뒤미아’인데 그 뜻은 고난으로 인하여 변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면 모든 덕을 계속 진행함을 말합니다.
오래참는 자는 매사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입니다.
잠14:29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약1:20절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속상하다고 인내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마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승리의 멸류관을 받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과 같이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사랑가운데서 용납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안에서’란 말은 위의 모든 덕이 사랑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뜻입니다.
고전13장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으면 겸손도,온유도,오래참음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가운데서만 진정한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요14:21절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하나님 사랑없이 진정한 인간사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안에서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일을 할 수 있고 사랑아에서만이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5).평안의 줄입니다.
하나되게 하심은 성령의 역사요,싸우고 분리하는 역사는 사탄의 역사임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의 사람들이라면 자연히 지체를 이루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혜와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미 받은 은혜와 복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여기서 평안은 회평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화평케하는 자가 복있는 자요,회평케 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가 이 모든 아름다운 덕을 행할 때에 교회에 화평을 가져오며 자신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며 교회의 진정한 연합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저 나는 주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되게 하는 터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4-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교회를 몸으로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몸의 모든 구조는 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도 자기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몸 전체를 위해서 존재며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과 책임을 말없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터전은 조직도 아니고 행정도아닙니다. 바로 성령,소망,주님,믿음,세례,그리고 하나님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시말하면 마귀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소망둔자가 아니라 천국에 소망을 둔자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사람과 하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겸손히 회개하며 죄씻음을 받은 감격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초를 떠나서는 성도와 성도가 하나될 수 없으며 교회와 교회가 하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떠나서는 어떤 연합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운데 성도가 거할 때에만 진정으로 영적 연합을 이룰 수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랑에 까지 자라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늘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성령안에서 하나가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성도의 복된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들어내며 땅끝까지 주의 복된 말씀을 넉넉히 전파하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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