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목회자의 마음 (살전 03:1-13)

첨부 1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과 같이 하였습니다.
부모가 되어보지 못하고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자녀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크게 받고 또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지식을 낳아서 길러보아야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고전4:15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했습니다.
갈4:19절에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씀으로 양육함되, 어머니가 친히 자녀를 낳아서 양육하는 것 처럼 해산의 수고를 격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부모가 자식이 잘 되기를 위하여 소원하는 것 처럼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잘 되기를 소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의자의 심정입니다.
2장에서 본바와 같이 바울은 성도들을 심방하기를 원하였지만 할 수 없게 되매, 참다 못하여 다른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디모데를 대신 그들에게 보내었던 것입니다.
살전3:1-2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참다 못하여’라는 말은 ‘견디다 못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심려 때문에 견디다 못하여 디모데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며 염려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이 어떤가

1.성도들이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살전3:2-3절에 보면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디모데를 보낸 것은 믿음에 굳게 서서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도록 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는 교역자나 성도들이 여러가지 환난 가운데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요동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요동’이란 말은 헬라어 고어의 뜻에 ‘개가 꼬리를 흔든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첨한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환난이나 고난을 당할 때에는 사탄은 그들로 하여금 죄와 타협하여 쉬운 길로 가게 하려고, 개가 꼬리를 치듯이 아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귀의 아첨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난 받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군인이 강력한 훈련을 받아야 좋은 군인이 되는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는 마귀의 유혹을 받기도 쉽고, 낙심하기도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든든히 서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디벨리우스는 기독교인에게 고난이 반드시 따르는 이유를 두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늘 가는 길은 험하고 그 길로 가는 자마다 그 험난을 격게 된다는 것입니다(행14:22). 둘째는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너무 밀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반드시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일찌기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환난이나 고난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 밖에 당한다면 누구나 낙심하고 넘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앞에 당할 일을 각오하고 맞는다면 오히려 담대하게 대처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기도로 준비하고 말씀으로 무장할 때에 어떤 고난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를 우리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고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사탄의 시험까지 받아야 합니다. 영생포구를 향해서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게 되면 자기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배에 있는 무거운 짐들을 내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고난의 폭풍을 만나게 될 때에 영혼의 생명만을 위하여 모든 무거운 세상욕심을 분토와 같이 벼려야 합니다.
3:5절에 보면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라고 했는데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때에 두가지 대조적인 양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정말 믿음에 서있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두울 때에 하늘의 별이 밝게 빛나는 것 처럼 성도들은 환난 중에서 더욱더 믿음의 빛이 밝게 빛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낙심하고 믿음에서 떨어는 자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는 것은 환난으로 인하여 첫째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승리하여 원수 마귀를 물러처버리고, 둘째는 환난을 이김으로써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 높아지며, 세째는 성도들의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2.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 넘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3:6절에 보면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과 사랑’은 성도의 경건생활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위로와 기쁨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사람과 같이, 자나 깨나 항상 생각하고 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들의 아름다운 관계요,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신령한 교제의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에 큰 기쁨과 위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잘되는 것은 어떤 어려운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에 든든히 서서 장부답게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영적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8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심정은 성도들이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더 즐거운 것은 영적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굳게 서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복된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라고 한 것을 보아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삼1:4절에 보면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사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사랑으로 행한다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요, 또한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3.성도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3:10절에 보면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목회자는 온 성도들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많은 기도의 정성과 시간을 드리는 것은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엎드리면 자연히 생각이 나고 기도하지 않고는 그저 지나갈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부족한 믿음이 온전함에 이를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앞에서는 그들이 믿음에 든든히 서서 승리하고 있음을 칭찬하며 기뻐하였는데, 여기서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이 아무리 크고 든든하다고 할찌라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죽는 날까지 달음질하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11절에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만나는 것도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을 직접 만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은 멀리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뿐아니라 속히 만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진정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3:12절에 보면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더 사랑이 충만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서로,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래서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말하는 사랑은 질에 있어서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동시에, 그 양에 있어서는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성도 사랑의 목표는 주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3:13절에 보면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의 행실에 있어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어 주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모습으로 서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심정이요, 목회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난 자녀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목회자의 기대 이상으로 믿음이 성장하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여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주님 기뻐하시는 선교와 사랑과 봉사에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칭찬과 빛는 상급을 다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