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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사는 사람 (행 16: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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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불신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살되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은 자신을 믿고 돈과 권세를 의지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국은 파괴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은헤로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보다 더 좋게 발전시켜가면서 그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사람은 사탄의 유혹으로 점점 악화시켜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사람은 천국을 지옥으로, 축복을 저주로 악화시켜가면서 삽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사람은 지옥을 천국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호전시켜 가면서 삽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이야 말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창조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복된 삶을 살펴보면서 피차 은혜를 받고저 하는 것입니다.

1.최악의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하던중 귀신들려 무당노릇하던 한 여종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그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정말 인사와 응분의 대접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사는 커녕 모욕을 당하였고, 대접은 커녕 곤장으로 매를 수없이 맞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투옥까지 당했습니다. 속된말로 정말 재수에 옴 붙은 사람입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당한 고통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매맞은 상처로 인한 고통도 견디기 어렸웠지만 억울하게 당한 봉변으로 인한 수모감은 더욱 견디기 어렸웠을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런한 경우에 상대방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그 심령을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중에서도 찬송과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찬송하는 중에 감사가 생기고, 기도하는 중에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최악의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 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고 궈면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직은 천국이 아닌 지옥과 같은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최선의 시간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시간에 작면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최악의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신앙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요한 번연은 12년간에 걸친 옥중생활을 하는 동에 천로역정을 저술함으로써 최악의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서든지 사도 바울을 본받아 최악의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찬송과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부모의 사랑을 남달리 받았기 때문에 형들에게 시기와 미움을 받았고, 그러던 중 형들의 손에 붙들려 깊은 우물에 던짐을 당해 죽을 번하였습니다.
그러나 형 루우벤의 권유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애굽의 대상에게 종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로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으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잘 되는 것 같았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결국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됩니다. 정말 요셉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쯤되면 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겠느냐고 원망하고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다 낙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창50:18-21절에 보면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감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전화위복의 삶이요 창조적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최악의 장소를 최선의 장소로 만듭니다.
옥이라는 곳은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외로운 곳입니다.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곳입니다. 지옥과 같은 곳이 바로 감옥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불행한 곳이 바로 감옥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최악의 장소로 하여금 최선의 장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의 장소로,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해 내는 구원의 장소로 삼았습니다.
간수는 자기 책임에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결하려고 하였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그대로 있고서는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보면 복된 장소가 아니라 불행한 장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럽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임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 간수는 무지몽매한 심령이요, 눈먼 소경이요, 길잃은 양으로써 시급히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그를 구원하는 중차대한 과업을 수행하였기에 그 곳이야 말로 복된 장소가 된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떤 곳이든지 잊을 수 없는 복된 장소로 변하는 것입니다.
네로왕은 지신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므로 최선의 장소를 최악의 장소로 전락시킨 폭군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는 잘 다스려야할 복된 장소인 왕궁을 죄악과 불행한 장소로 만든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없고 그리스도가 없는 곳은 어떤 곳이던 최악의 장소로 변질 되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에게 해를 입고 사경에 빠져있던 부상자를 구출하므로서 최악의 장소인 여리고 골짜기를 최선의 장소가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과 실패의 원인을 환경과 장소의 탓으로 돌려서는 않됩니다. 바울처럼 최악의 장소를 최선의 장소로 바꾸어 놓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주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적극적이고 긍정적고 창조적인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3.최악의 사건을 최선의 사건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당할 때가 많고, 기쁜 일 보다 슬픈 일 당할 때가 많고, 편한한 일보다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보드라도 그렇습니다. 요셉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고해와 같다고 합니다.
정말 이 세상은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와 권세를 가지고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종종 원치않는 사태가 발생하여 우리는 최악의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때에 어떤이는 될대로 되라고 자신을 내 던져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낙심과 좌절 속에서 혜어나지 못하고 결국 심신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봅니다. 전자보다는 훌륭합니다만은 그렇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 커지고 그것에 짓눌려 버리고 맙니다. 만일 일이 어쩌다 문제가 해결이 되고 일이 잘 되면 그제 부터는 자신이 하나님이 됩니다. 교만의 꼭대기에 올라서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외면하고 교만과 패망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어진 여건을 하나님의 복되신 뜻으로 믿로 감사하므로,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게 되는 것입니다. 전화위복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창조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성도들의 생활철학있으며 승리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다니엘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의 아름다운 꿈은 억울하게 옥에 던짐을 당할 때에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에 억울한 감옥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발탁되는 도약대가 된것입니다.
다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되는 비운이 바벨론의 영광스러운 총리의 자리에 오룰 수 있는 지름길이 된것입니다.
믿음과 확신에 넘치는 사람은 무슨일을 만나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드립니다. 소망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항상 자신과 환경을 척도로 하기 때문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전화위복의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원망과 불평입니다.
롯은 옥토인 소돔과 고모라를 초토화시킨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선하신 뜻과 경륜 보다는 현실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불모지를 복지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복이 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인 사람이란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을 의미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사람도 창조적인 사람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언제나 파괴적인 존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앞세우고 주장하는 사람은 파괴적인 사람이요, 언제나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자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을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창조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것이던간에 인간 자신의 수완과 능력의 탁월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임의로 창조해낼 수 있는 성질의 역사가 아닙니다.
주님을 그 안에 모시고 주님께로 부터 힘과 능력과 지혜의 공급을 받을 때만이 창조적인 역사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여호와는 나의 피나차요,나의 산성이요,나의 방패시요,구원의 뿔이시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처해있습니다. 또한 IMF 환란으로 인하여 무두가 최악의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우리는 사도 바울 처럼 믿음의 철저한 생활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다시말하면 주님을 언제나 모시되 내 앞에 모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그 말씀되로 힘써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고, 바빠지면 바빠질 수록 기도와 예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서 최악의 시간을 최선의 시간으로 바꾸며, 최악의 장소를 최선이 장소로 바꾸며, 최악의 사건을 가장 복된 일로 바꾸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길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시기를 바라며 눈물의 골짜기가 기쁨과 찬송과 감사의 아름다운 계곡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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