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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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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가운데 만사를 잊어 버리려는 것이있습니다. 괴로운 일을 잊고, 고통스러운 일을 잊고, 근심된 일을 잊고 살아가기 위해 만사를 제켜 놓고 훌훌 떠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심지어 아떤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가출을 해서 가정을 버린 사람들도 많아도 하니 세상에서 지고 사는 일들의 무게가 얼마나 컷으면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가지 특징은 자기에게 이익이나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면 알려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모르는체 하고, 옆에서 불이나고 홍수가 나도 내게 직접적인 해가 없으면 알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는 것처럼 했다가는 오히려 큰 낭패를 당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교통 사고의 목격자를 찾는 프랑카드를 길거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몰라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불행해 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오늘이 성경 말씀에는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 도다”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하면서도 알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 이중적이 모순 속에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사람들은 識者優患이라고 하고, 전도서에서는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도 다하느니라”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지식은 우리들에게 번뇌를 가져 오는 그런 지식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알아야 할 참 지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면 다른 지식을 가진다고 해도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보신탕 집 앞을 지나면서 보니 개들이 다섯마리가 있는데 먹을 것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영리하다고 해도, 만일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안다면 저렇게 싸울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도 많고 어려운 일도 많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내세의 일을 믿지 않고 알지 못하니 세상살이를 제 멋대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칼빈은 자기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또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없다라고 말하고, 칼 발트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지식의 객체가 아니고 주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알기 우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라 꼭 알아야 하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확실하고 분명히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자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불결함과 거짓은 하나님의 참되심 앞에 그 진실한 모습을 나타내고, 인간의 위대함과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에 비교해야 그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성과 제한성은 하나님의 무한대에 비교를 해야 얼마나 가치없고 짧은 한 순간임을 알 수 있고, 인간의 교만과 오만과 불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교해야 그 진상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날 장례식이 있어 장의차를 타고 오는데 앞에 쌀가마처럼 보이는 짐을 잔득 실은 추럭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추럭이 덜컹거리는 바람에 그 중에 한가마니가 땅에 뚝 떨어졌는데도 추럭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달려 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장의차 운전사는 차를 급히 세우고 그 가마니를 차에 실으려고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장의차의 운전사는 내가 먼저 보았으니 내 것이라고 하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 떨어진 것이니 우리 것이라고 하다가 싸움이 생겨 치고 받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얼굴이며 몸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때 집사님 한분이 그 가마니를 열어 보고하는 말이 여보시오. 이것은 쌀가마가 아니고 소금가마요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에이 에이하면서 그 소금가마를 내 버린체로 싸움을 그치고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그러므로 세상을 살면서 열심히 싸우고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흔히 치열한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전우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가 누구를 위해 싸우며,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고 외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형수가 형장에 끌려 가면서 형장을 올라가는 계단을 잘못 밟아 넘어질 뻔햇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아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들이 흔히하는 말들입니다. 사형을 받으려 가는 사람들은 형장을 가면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본다고 합니다. 그런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안 넘어 질려고 애를 쓰고,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많이 가질려고 싸우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르고 목적 의식도 없는 사람들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을 알고 우리를 알아야 사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는 이유가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모은 재산이 우리들 자신들에게 얼마나 해독을 끼치는지를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하나님 없는 권력이 인간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모두 보고 듣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지식이 얼마나 인간을 교만하게 하며 오만 방자한 짓을 하게 되는지 잘 모았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없는 시대, 즉 인간의 성숙한 시대가 온다고 말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시대는 더 잘망적이고 귀신이 날뛰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리시고 찟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불의하고 가증한 자의 제사를 싫어하시고 외식하는 자의 예배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입니다. 기다려서 잡히면 처벌하시는 피동적이며 수동적인 법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을 찾아 경고하시고, 엄격히 벌을 내리시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생활에 직접 관여하시고, 불의를 책망하시며 심판을 하시기 전에 미리 경고하여 죄인이 스스로 죄를 회개하고 돌아 오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사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이 사라짐 같이,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저를 구속하였음이니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정의의 하나님이십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팔장을 끼고 인간의 모든 일을 방관하시고 계신 하나님이 아닌 역사 속에 우리들을 간섭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 얼마나 추악한지--진실로 사람이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얼마나 죄인들의 생활이 올바르게 질서 잡혀질지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운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삶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2.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물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 쯤은 다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대게 철학적입니다.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이요, 행동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게 구체적으로, 행동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우리을 사랑하신다고 믿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링컨은 그가 그의 삶의 마지막 몇 달을 남겨놓고야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모셨음을 아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나는 어머님의 기도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나는 그것을 언제나 따라했습니다. 어린시절 나는 성경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남북전쟁후 그의 임종 직전에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Do you love jesus 답하기를 내가 대통령 직을 위해 고향 스프링 휠드를 떠날때 나는 사람들에게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게티스버그에서 나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겼읍니다. 이제 나는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I do love Jesus!
여러분! 부모님의 믿음이나 자신의 착한 태도나 교회에 등록되었음을 의지 하지 마십시오. 링컨같이 당신의 믿음을 주 예수께 둘 때에야 영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어버지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생명의 근본이라는 말이고, 가치의 근본이라는 뜻도 있으나 가장 큰 뜻은 하나님의 진노적인 의로운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잘못한 자를 벌주시되 잘못한 본인은 용서하시고 대신 예수님을 징계하시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에게 벌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고 어머니라고 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술 주정뱅이요 난폭한 아버지에게 많은 학대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오래 전 어떤 미국 선교사가 중국에 와서 전도하는데, 때마침 이름 모를 전염병이 유행하여 수많은 중국인들이 희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병균을 유리병 속에 담아서, 면역체를 만들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려 할 때에, 검역소 직원들이 방역 조치를 위해서 철저하게 승객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선교사는 병균을 자신의 입에 털어 넣고 유리병은 바닥에 버렸습니다. 조금 뒤에 그의 온몸에 병균이 퍼지면서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몸에는 지금 중국에 번지고 있는 전염병이 감염되었으니 이 병균을 뽑아서 면역체를 만들어 중국에 보내어 많은 사람을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십자가의 희생정신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을 희생하는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1-2)
베드로의 고백 (김석균)
사랑하는 주님 내게 다가와/ 이밤이 다 가기전에/ 네가 나를 버리리라 하실 때/ 왜 그리 섭섭하 던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배반하지는 않겠다고 했던/ 믿음없는 나의 헛된 맹세/
주님 마음을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 부인하고 돌아서서 한없이 울었네/
내가 주를 잃고 발황했듯/ 주도 나를 잃고 슬퍼했네/ 하지만 나의 눈물보다/ 주님의 눈물 더 뜨 거웠네.

3. 하나님은 우리들을 축복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선지자는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라고 멀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비와 같다는 말씀은 내가 계획하는 일들이 즉시 즉시 마음먹은데로 기대하는 데로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늦은 비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지만 기다리니 되여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기회가 다 끝이 났다고 우리 스스로 포기해 버렸을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늦은 비의 은총을 인내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여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내 뜻대로 되는 일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일들을 더 소중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세상살이에 우리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해서 비관하거나 낙심할 일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목화를 재배해 큰 수입을 올리는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베빌'이라는 벌레가 나타나 목화 작물을 모두 먹어 치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절망과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화대신 해충의 해가 적은 땅콩을 심기로 했습니다. 다행히도 새로 시작한 땅콩 재배는 마을 사람들에게 목화를 키울 때보다 더 큰 이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이 든 농부들은 마을 광장에 해충 ‘베빌’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웠습니다. 불행! 그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축복의 기회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시고 에레미아 선지자는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잘 아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반면에 여호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곧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체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여,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에서 산다는 말과 같은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압니까1). 성경을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읽고 순종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멀리 외국에 간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알려면 편지를 받으면 되고, 전화로 대화를 하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의 인식이 아니고 마음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 말하지 않아도 알고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 나 사랑해”하면 멋적어 하는 남편이 “그걸 꼭 말해야 해”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응 알았어--” 그런데 남편이 이상한 짓을 하고 오면 그냥압니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물으면 그냥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시려면 나를 온통 하나님 앞에 놓고 기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3).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매일 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꼭 좋아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순종에 대해 주님은 아주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마21:28-31)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애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렇게 순종하는 사람도 불순종하는 사람들 보다는 낮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즐겁게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겠습니까
우리의 근본적이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압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써 복을 누리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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