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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 되시는 주님께 인생을 맡기자 (행 02:42-47, 벧전 02: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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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 감독의〈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현재 상영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전쟁 신(scene)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장면이 30분간 계속됩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총을 맞고 바다 에 수장되는 군인들이 즐비한 가운데, 어떤 병사는 잘려나간 자신의 한쪽 팔을 들고 있고, 어떤 병사의 한쪽 다리는 끊겨나간 채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병사의 내장이 다 쏟아져 나와서 갯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런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편과 저편이 함께 승리하는 법이란 없습니다.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은 어김없이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이 죽고 사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갈립니다. 결국, 상대편을 어떻게든지 많이 죽여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의 전쟁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내 대신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비정한 생존경쟁 방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의 경제 형편과 시대 상황이 어렵다 보니, 생존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그런 생존경쟁 방식을 배척합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너는 죽어도 상관없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이나, ‘다른 사람이야 굶어죽든 말든 나만 혼자 잘 살면 된다’는, 그런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살게 될 경우에는, 누구나 한 번씩은 죽게 되는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영혼의 죽음’까지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서로 돕고 함께 사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누구는 죽고 어떤 이는 살아남는, 그런 살벌한 생존경쟁 세계가 아니라, 빵 조각 하나라도 함께 나눠먹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가, 초대교회 때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습니다.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각자 필요한 대로 나눠 썼습니다. 그리고, 각 집마다 번갈아 모여서, 기쁨과 감사로 음식을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면서 자리다툼을 벌이던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더 살고싶은 욕심 때문에 스승이신 예수를 배반하고 제 각기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제는 날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드린 후에는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 교제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그들의 모습이 예루살렘 모든 시민들에게 호감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숫자가 날마다 더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의 모습이 그토록 달라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난 후, 주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부활 이전에는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다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라도 내놓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 풍성케 하기 위해 왔다(요10:10)』고 하신 주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며, 또한 참된 복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렇게 두려워하던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핍박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야로 말씀 연구하는 일에 힘썼고, 또한 그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애썼습니다.
그 결과, 그들 자신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았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우리 인생의 참 목자로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까
물론, 복잡한 세상에서 주의 가르침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지만, 살기 힘든 세상일수록 주의 뒤를 바짝 좇아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목숨을 노리는 강도에게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1.그런데도, 주의 발자취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이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잘 참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아름다운 일이 된다(벧전2:20)』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에다가 식칼을 꽂았던 무당이 잡혔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턴가 꿈에 충무공이 나타나면, 머리가 아팠다고 합니다. 그래서, 충무공과 그 후손들의 기를 끊으면 병이 나을 것 같아 식칼과 쇠말뚝을 무덤에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식칼과 쇠말뚝을 꽂기 위해 부산에서 아산까지 가서,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7시간 동안, 충무공 무덤에다가 식칼 200개를 열심히 꽂았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쇠고랑을 차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병 낫기 위해 한 짓이라고 하지만, 그의 행위는 그 누구도 용납할 수가 없는 미련하고도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그녀는, 신이 내리자, 남편과 자녀까지 버리고 혼자 살면서 점치는 일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헛된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 진리 따라 살았으면, 그런 불행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 중에서도, 성실하게 주를 따르지 않을 경우, 그녀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것은,
①주께 인생을 맡기지 못한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무당은, 마귀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 줄 알고, 가정까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마귀는 그녀를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충무공의 무덤에다가 칼을 꽂는 어리석은 짓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잘 살펴보면,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을 온전히 맡겨 살지 못하는 까닭에, 헛된 것에다가 정력을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결코 책임져 줄 수 없는 것을 위해서 열심을 바치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②구원으로 인도하는 주의 음성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를 때에,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5)』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목자의 음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낯선 사람을 따라간다(5)』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지만, 강도는 양의 생명을 빼앗아간다는 것을,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닌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집부리면서 세상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뻔할 일입니다.
③불행한 인생을 살다가, 영원히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 무당은, 남편과 자식들한테 버림받은 것은 물론이요,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가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얻고 있습니까
주 앞에서 진실하게 살지 못하면, 가족들로부터 존경받기가 어렵습니다. 입으로만 주를 찾고,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할 경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줄거리를 대충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밀러 대위와 몇 명의 대원만이 상륙에 성공합니다. 그 전사 소식을 유가족에게 전하던 중, 라이언 3형제가 한꺼번에 죽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넷째도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그 넷째 아들 라이언을 귀향시키기로 합니다. 그 일을, 밀러 대위와 7명의 대원이 담당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라이언 일병을 찾지만, 그는 동료들을 버려둔 채 떠날 수 없다고 귀향을 거부합니다. 할 수 없이, 밀러 대위는 그곳에서 라이언과 함께 마지막 작전을 치릅니다. 그러나, 밀러 대위는 전사하고, 라이언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라이언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전사한 밀러 대위의 유언에 따라, 훌륭한 인생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늙어 죽을 날을 앞둔 라이언은, 가족과 함께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 무덤 앞에서, 그는 인생 보고를 합니다. 밀러 대위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것을, 아내로 하여금 증언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2.주님의 발자취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진리 따라서 바른 삶을 살고자 하면,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잘 참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을 남겨놓아서, 우리가 그 발자취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께
①우리 인생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목자가 되시는 주께서는, 어떤 적이 공격해도 우리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벧전2:25)』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을 멀리하면 되겠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충실하게 지켜 살면, 그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라이언이 평생 밀러 대위를 생각하고 살아감으로써, 그 자신과 가족들이 인정하는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일평생 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다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②우리는 주의 음성을 잘 듣고,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무턱대고 인생을 살면 실패합니다. 모범이 되시는 주를 본받고 살아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주께 인생을 맡겼으면, 무조건 주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어려울 때에는 서로 기도해줄 수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물론, 자신들만을 위한 집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공감과 인정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님 마음에 들도록 살 경우,
③목자가 되시는 주께서,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는『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그 문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좋은 풀을 얻게 된다(요10:9)』고 하셨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수시로 예배드린다고,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그 인생을 주께 맡기고, 그 지시를 따를 때, 주님이 그 안에 거하고, 그는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며, 때를 따라 꼴을 먹여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풍성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간 그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을 하실 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인생을 마치기 전에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일단 인생이 끝나면 공의의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도 그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살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완전히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그 인생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인생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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