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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앙망합니다 (사 40: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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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사야서 40장 3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 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 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해서 생 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 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본래 이스라엘 민족이 멀리 바벨 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범한 죄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가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50년, 60년, 7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 직도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희망 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서 그들 가운데 낙심하는 사람도 생기고 실망하는 사람도 점점 많 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이사야는 말씀했습니다.
너는 알 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 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 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곤 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 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 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 고,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 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을 앙망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앙망한다'는 말은 '의 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나를 의지하지 말고, 내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내 지식을 의지하지 말고, 내 힘을 의지하지 말고, 내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내 환경을 의지하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 라는 말씀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 어지고 변하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시간이 지나면 늙어질 청춘 을 의지하지 말고, 어제나 오늘이 나 영원히 변함없는 주님을 의지 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 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는 언제든지 믿음 의 주인이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앙망하는 것입니 다.
'앙망한다'는 말은 생각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권면 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 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 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 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 을 생각지 말라.
항상 주님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두 걸음 풍파 많은 고해 같 은 인생항로를 건너가야 하고, 태 산준령과 사막이 많은 인생행로 를 걸어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앙망한다는 말 은 주님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는 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 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요 리문답에서 우리가 배웠습니다.
사람을 앙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지, 그것이 향락이든지 영광이든지, 세상에 있는 지위든지, 세상에 있 는 돈이든지 이런 것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 을 우리의 앙망의 대상으로 삼으 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치 봄동산에 피는 꽃이 언 제나 위를 향해서 자라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자라 올라가고 꽃피우는 심령이 되라는 것입니 다. 불길이 언제든지 위를 향해서 타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언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타 올 라가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제든지 영혼의 방향을 위로 향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즐 거워하는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 다. 이것이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 의 삶입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언제 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는 모든 죄를 자연히 고백하게 됩니 다. 더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사 정을 아뢰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있는 말 로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을 앙 망한다는 말은 주님을 앙망한다 는 말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 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를 바라보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항상 앙망하면서, 주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 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디지털 시대라고 합니다. 정보통 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네트워크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위 벤 처산업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벤 처'란 문자 그대로 모험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모험이 동반 하는 시대입니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금년 말쯤에는 우후죽순 처럼 일어나는 벤처산업의 90% 는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일어서고, 다른 한편 으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벤처산업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벤처에는 모험과 불안이 따릅니 다.
사실은 벤처산업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서 이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는 깔려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이런 환경에 처해 살다보니까 자 연히 이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만 보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해서 갈릴리 바다 위로 걸어 예 수님께로 가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물결이 높아질 때 그 물결 만 보고 겁이 나는 순간 물 속으 로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거세게 밀어닥치 는 물결만 보지 아니하고 그 큰 물결 뒤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 고, 주님을 생각했다면 물 속으로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풍랑은 높 고 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결을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그 래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풍랑 뒤에 계신 예수님, 그 풍랑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 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일곱 번째 천사 가 나팔을 불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 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 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 한이 제정로마 정권의 압박을 받 으면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캄캄 한 굴속에 있을 때에 그는 하나 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이 말씀 은 그 계시의 일부입니다.
사도 요한의 눈에는 그 당시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로마정권 만 보인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와서 말하기를 세상 의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겠고, 우리 주님께서 세 세토록 왕노릇할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러 분, 이 세상의 풍파는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더 높아만 가는 풍랑만 볼 것이 아니고, 풍 랑을 제거할 수 있고 잔잔케 하 실 수 있는 주님, 역사를 다스리 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용기와 확 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겠 습니다.
더구나 주님을 앙망하는 우리 는 세상의 물질보다도 주님을 더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고 있는 우리가 정신차리고 힘쓰 지 아니하면, 이 세상 물질을 바 라보기가 쉽습니다. 물론 이 말은 이 세상을 등한시하라는 말이 아 닙니다. 사업을 열심히 잘하는 것 과 물질을 바라보는 것은 다릅니 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흔히
돈 이면 다라는 말이 너무 자주 들 립니다. 요사이 젊은이들 가운데 는 우량 대기업에서 일하는 것보 다 희망 있는 벤처산업으로 출애 굽한다는 말이 들립니다. 들어맞 으면 1년에 수억 원 이상의 수입 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 니다. 그러나 물질만 따라가다가 는 시험에 빠지고 실망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왜 주님을 앙망해야 합니까 세상을 바라보고, 권력을 바라보 고, 물질을 바라보고, 영화를 바 라보고, 청춘을 바라보다가는 실 망할 때가 오고야 말지만, 영원하 신 주님,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 으신 주님을 앙망하며 사는 사람 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이르든지 낙심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어서 어떤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도 모든 것을 이기는 생활 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 씀을 보세요.
오직 여호와를 앙 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에 없던 새로운 영적 능력을 얻겠다는 말 씀입니다.
인간의 힘은 언제나 제한되어 있습니다. 힘으로 말하면 소만도 못합니다. 빠르기로 말하면 말만 도 못합니다. 높이뛰기로 말하면 벼룩만도 못합니다. 이렇게 인간 의 체력, 인간의 머리, 인간의 지 력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 의 인내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도 제한되어 있습 니다. 사실 인간의 권세도 제한되 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 은 이 제한된 힘 위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겠다는 말씀 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니까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앙망하는 사 람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하늘 높 이 올라가는 것처럼 위로 올라가 는 힘을 더해 주시겠다고 했습니 다.
옛날에는 위를 향해 하늘 높 이 올라가는 것은 독수리밖에 없 었으니까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 니다. 아마 요새 사람들에게 알아 듣기 쉽게 말하라면, 위성이 대기 권을 뚫고 무중력의 공간으로 높 이 올라가는 것처럼 그와 같은 힘을 더해주시겠다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사실 인공위성이 나오 기 전에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은 비행기라고만 생각했었습니 다. 그런데 인공위성에서는 북한 의 형편도 다 사진으로 찍어서 지구에 보내옵니다. 우리가 북한 을 직접 가서 보지 못하고, 가서 본다고 해도 지극히 제한된 곳만 보고 옵니다. 그러나 위성에서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다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아직도 많 은 사람의 심령은 이 땅, 이 세상 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래서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근심 과 염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 욕, 이생의 자랑, 시기와 미움, 고 통과 번민, 슬픔과 낙심 이런 모 든 땅에 속한 것에 매여 지내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심령 은 아직도 땅을 떠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앙망하는 사 람은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생활 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이와 같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마치 공중에 높이 올라간 것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공위성은 타보지 못 했지만 보통 비행기는 타 보셨을 것입니다. 아니면, 높은 빌딩을 올라가 보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 니다.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면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집니 다. 보는 각도도 달라집니다. 그 러기에 비행기가 없을 때는
새 눈으로 본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영어로 그것은 '버어즈 아이 뷰 우'(Bird's eye view)라고 했습니 다. 즉 새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땅에서 보지 않고 공중에 높이 올라가서 모든 것을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사실 공중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모든 것이 땅에서 보는 것 과 달라 보입니다. 거리를 지나가 면서 어떤 건물을 보면 그 건물 이 높아 보이고 굉장해 보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 가 지상을 내려다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땅에서 어떤 산을 보면 굉장히 높다고 생각되지만, 비행 기 위에서 내려다보면 한국에서 높다고 하는 한라산 같은 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유럽에서 제일 높아서 지붕이라고 하는 알프스 산도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 다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밑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보입니 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심령이 높이 올라 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견지에서 이 세상을 살피게 됩니다. 그러면 땅에서 보는 것과 모든 것이 다 르게 보입니다. 세상의 향락, 세 상의 영광, 세상의 권세, 이런 모 든 것이 세상 사람의 견지에서 볼 때는 굉장한 것 같지만, 주님 을 앙망하는 신앙의 견지에서 볼 때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을 기 억하십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 도를 알게 된 다음부터는 전에 귀하게 여기고, 전에 사모하고, 전에 자랑하던 것을 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위에 올라가서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이 달라 보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슬픔, 고통, 실패, 심지어 죽음까지도 달라 보입니다. 그러 기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 장 18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기 록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 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 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 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 함이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받는 다고 하지만, 그 환난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 난을 받기 때문에 오히려 영원한 하늘의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 라고 한다면, 잠시 받는 환난 때 문에 과히 번민하고 고통하지 않 을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신앙의 경지에 올라갈수록 세상 만사를 다르게 보게 됩니다. 인생관, 가 치관, 세계관, 역사관이 달라집니 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독 수리와 같이 올라가는 신앙을 가 지게 되면, 높이 위로 올라가게 되면 구름 한 점 없이 언제나 맑 습니다. 비행기를 타보신 분은 아 시겠지만,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 라가면 땅위에 낀 구름도, 비도, 바람도, 공해도 없습니다. 구름은 다 아래 있습니다. 구름이 보이기 는 하는데, 땅에서 보는 것처럼 어둡고 답답하고 때로는 무섭게 보이는 구름이 아닙니다. 위에서 구름을 내려다보면 그 구름이 햇 빛을 받아서 마치 솜틀에서 피어 오르는 솜처럼 그렇게 보기가 아 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언제나 광명한 빛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면 거 기에는 구름이 없습니다. 거기에 는 안개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바 람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눈도, 비도 없습니다. 언제나 광명한 햇 빛만 비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앙 망하는 참된 신앙생활을 해서 우 리의 심령이 높은 곳에서 살게 되면 거기서는 언제든지 우리의 태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이것을 'Heavenly sunshine'(하늘 의 햇빛)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신앙의 높은 곳에 올라 가면 하늘의 햇빛을 볼 수가 있 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습 니다.
땅에서는 구름이 없어야 햇빛 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서 북부인 시애틀 쪽이나 캐나다 벤 쿠버 쪽은 10월부터 4월까지는 거의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주 우울해 합니다. 그러나 하늘 높이 올라가 면 언제나 해를 볼 수 있습니다. 땅에서는 햇빛을 보면 명랑합니 다. 그러나 구름 끼고 비가 오면 우울합니다. 내 마음대로 모든 것 이 되면 기쁩니다. 그러나 마음대 로 안되면 슬픕니다. 그러나 주님 을 앙망하며 사는 사람은 주 안 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어떤 환 경이나 조건에서도 항상 행복하 게 살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주님을 앙망하는 사 람은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 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 리 인간 생활에는 달음박질할 수 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왜요 우리는 생존경쟁, 무한경쟁 속에 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신 의 분투와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 다. 적당히 사는 때가 아닙니다.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야 할 때입니다. 더구나 인간 생활에 는 종종 위기가 닥칩니다. 천재지 변이 있습니다. 큰 사고가 일어납 니다.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우리가 옳은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앙망하 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권능을 주 어서 이런 것들을 극복하게 한다 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생행로'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일생을 길을 가는 것으로 비유해 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는 길은 항상 평탄한 것만이 아닙니다. 태산준령을 넘을 수밖 에 없는 때가 있고, 장강대하를 건널 수밖에 없는 때가 있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요단강 을 건너야만 했고, 여리고 성을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우리 인간 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습 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힘이 필요 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항로'라는 말을 합니다만, 우리가 건너야 하는 바 다는 항상 잔잔한 것이 아닙니다. 풍랑이 갑자기 일어나고, 폭풍우 가 몰아치고, 운무가 우리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에게는 새 힘을 주어서, 이사야 43장 2절 이 하에 있는 말씀과 같이, 강을 건 널 때 물이 침몰치 못하게 해주 시고,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불 꽃이 우리를 사르지 못하게 하십 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앙망하고 참 으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시편 27편을 쓴 시인처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 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 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외치 는 것입니다. 또는 다윗처럼
여 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 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 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 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 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 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 입니다.
달음박질할 때에도 힘을 주어 서 곤비치 않게 하는 것이 주님 을 앙망하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을 앙망하는 사 람은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합니 다.
이것은 어떤 삶의 경험을 말 씀한 것입니까 인간 생활에는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 있습니 다. 단조 무미하지만, 매일 한 발 자국씩 걸어가야 하는 각자의 의 무가 있습니다.
요사이 큰 공장에 가보면 대 개가 자동화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울산에 갔다가 자동차 공장 에 들러보았는데, 레일 위의 움직 이는 차체에 사람들이 자기가 맡 은 부품을 하나씩 붙여 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볼트를 박아주고, 다 른 사람은 조여주고, 그 다음 사 람이 다시 조여주는 식으로 한 가지 일을 계속해서 하루 종일 합니다. 기계가 일하는 것인지 사 람이 일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 려울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공장만 그런 것이 아 니고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도 마 찬가지입니다. 매일 같은 일의 반 복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반 짓고 설거지하고, 점심 해먹고 설 거지하고, 틈틈이 밀린 빨랫감 세 탁하고, 방 청소하고, 저녁 해 먹 고 설거지하고, 이렇게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옛날 시골 방앗간에서는 소나 말이 연자맷돌을 돌렸습니다. 말 은 멍에를 메면 곧장 달리기 때 문에 눈을 가리고 연자맷돌을 돌 리게 합니다. 말은 눈을 가린 채 온종일 뱅뱅 돌며 일을 합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그렇습니다. 이 렇게 똑같은 일을 하며 뱅뱅 돌 아가는 동안에 어느새 검은 머리 는 희어져 백발이 되고, 곧던 허 리는 굽어집니다. 단조롭지만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 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의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십 니다. 독일어에 'aeefheber'이란 말이 있습니다. 용수철을 위에서 보면 둥근 원입니다. 그러나 옆에 서 보면 돌아가면서 올라가게 되 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일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 어서 날로 향상하고 전진하고 의 미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 를 앙망하는 사람에게 인내력, 참 고 견디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앙망 하는 사람은 단조로운 삶 속에서 도 하나님께 찬송을 부릅니다. 걸 어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새 힘을 주는 것은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 에게만 베푸시는 축복입니다.
'앙망한다'는 성경 구절을 이 사야서 두 곳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사야서 45장 22절입니 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 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를 회개시켰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사야 49장 23절입 니다.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주님 을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아 니합니다. 전에 스데반 집사가 순 교할 때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 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앙망함으로 성경에 약속한 축복을 다 받으시 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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