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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내게로 오라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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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님의 초청 말씀입니다. 이웃을 초 청해서 함께 예배드리는 이 뜻깊은 시간에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축복이 있 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그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그리고 '구체적인' 때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예수님께 대해서 한편에서는 불신 이, 다른 한편에서는 순수한 신앙이 일어날 때입니다. 오늘은 어떻습니 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나 예수 님이 말씀하시는 그때나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시간적으로는 2,000 년이 흘러갔지만, 외부 환경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변했지 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 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 람과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 다. 어거스틴이 그의 유명한 저서 「신의 도시」에서 말한 것처럼 인 류역사의 흐름이 바로 이 두 가지입 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싸움 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중심 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반대 하는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승리 할 때 하나님의 도시가 이루어진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두 가지 종류 의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말씀하 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적인 깊이를 말하 고 '슬기'는 분별력을 말합니다. 물 론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이란 그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 을 두고 한 말씀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졌다는 뜻 입니다. 그때에 지혜롭고 슬기 있다 고 자처하던 랍비는 주님에게 거절 당했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같이 순박한 갈릴리의 어부들을 용납하시 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 타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 여 지식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사용되었고, 그들 을 환영하셨고, 그들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혜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 분별력도 없는 형편 없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나타내주셨 습니까 지식 많은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 하는 것은 지적인 교만입니다. 예수 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프럼미라는 사람은
머리가 아니고 마음이 복음의 집이다라고 말했습 니다. 현명한 사람에게 복음을 숨기 신 것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에게 천 국의 진리를 숨기셨습니다. 어리석 은 사람에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무지가 신앙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낮아지는 겸손이 신앙에 필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대학 교수 한 분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그 런데 그에게는 고민이 있습니다. 예 수를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를 만나 이런 고백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고등학교 때는 문학 을 좋아하고 소질도 있어서 대학을 진학할 때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수 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친구가
너 문학하다가는 밥 굶는다
고 해서 경제과로 전과했습니다. 처음에 막스의 경제학을 읽으니까 별천지에 간 것 같고 이상향이 내다 보였습니다. '이것이 진리구나' 생각 하고, 즉 사상적으로는 완전히 공산 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경제학을 읽 으니까 갈등이 생겨서 오랫동안 고 민하다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게 되고 행정고시에 좋은 성적으로 합 격해서 관리 생활도 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이만하고 지난날보다 남은 날이 더 적은 것을 생각하니 이제 남의 덕담만 하기도 시간이 모자른 처지라 친구들끼리 만나서 비난하는 말은 일체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사는데 이러다가 끝나면 어떻게 되 나 생각해서 교회도 나가 보았습니 다. 그런데 도무지 내 마음에 믿어 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수님의 말씀 을 듣다가
이(李)박사님, 죄송하지 만 제가 이박사님의 심령을 위해서 말씀드리는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내가 가장 지혜 있고 슬기롭 다'는 교만을 버리세요. 아마 그러면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라고 충고했 습니다.
사람에게는 솔로몬과 같은 지혜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 람의 순박함이나 신뢰심이 어린아이 와 같지 아니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 의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결과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에 지혜롭다고 하던 랍비들의 지성적인 교만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보 았고 그들 자신이 현명하다는 랍비 보다 순박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 님께 더 가까움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 혜를 베푸십니다. 지식 많은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권력 있는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재물 많은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 나님의 나라를 나타내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 씀에는 바로 이런 뜻이 있는 것입니 다.
오늘 주신 말씀 26절 이하에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 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 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 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 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클라크라는 사람은
이 말씀은 위대한 진리요 구원의 열쇠라고 했 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지음을 받았고 그 아들 예수님에게 위임이 되셨습니 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에는 조그마한 비밀도 있을 수 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 과 그 아들 예수님 사이의 일은 누 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것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오직 아들 예수님의 소 원대로 계시된 사람, 다시 말하면 택함을 받은 성도들만이 하나님 아 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의 교제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아는 특권을 가 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이 하나님을 사람에게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8 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 다. 빌립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예 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아버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 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말씀을 들 으신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 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 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 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 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여기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만 일 네가 하나님 보기를 원하면, 만 일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 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원하면, 만일 네가 하나님이 사람들에 대한 모든 자세를 보기 원 하면… 나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혁신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볼 수 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확신을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겸 손하고 신뢰하는 마음만 있으면 예 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든 인류를 향 한 메시야의 절대적인 초청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하십니다. 불교에 서는 인생을 고(苦)로 보고 그 원인 을 무명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사 람들은 깨달음으로 이 고에서 해방 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성경 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데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 어진 데서 모든 인생고가 생겼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와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 으로 죄의 용서함을 받고, 따라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 있게 되는 것 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오라고 초청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 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 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 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죄의 용서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길뿐입니다. 누구든지 오 기만 하면, 그래서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신다고 약 속하셨습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 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나는 죄 인입니다하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되 는 것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지 않 는 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 떤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 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 던 탕자도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죄 를 사해 주셨고,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셨고, 아들의 권리를 회복해 주셨 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오 는 것으로 여러 가지 축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 니까 그것은 죄 사함 받는 축복이 라고 생각합니다. 왜 축복이 됩니 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있 을 때에는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하 나님의 진노가 죄를 범한 사람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 죄가 반 드시 너를 찾아 만나리라고 했습니 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할 일이 무 엇입니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 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죄를 회개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 오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 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심으로 누구 든지 죄사함 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 습니다. 그러나 이 길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일의 죄사함 받는 길입니다. 이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 다. 그런데 '회개는 해야겠는데 좀 천천히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시 는 분 계십니까 내일 일은 우리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했습 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 이 은혜받을 때입니다. 지금, 내게 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7장 37절에 보 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 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여러 해 전에 미국 서부 사막 지대에 사는 미국 원주민이 뉴욕시 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며칠 동안을 뉴욕에서 지내며 여기 저기를 구경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 습니다.
당신이 뉴욕에서 며칠 동 안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그 원주민이 수 도꼭지 옆으로 가서 수도꼭지를 틀 면서
원하면 이렇게 언제나 물을 구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인상 깊었 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빌 딩이 아니고, 거리를 메운 자동차가 아니고, 호화찬란한 의복이나 구미 를 돋우는 음식이 아니라 언제나 원 하면 마실 수 있는 물이 사막에 사 는 인디언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습 니다. 이것이 목마름을 뼈저리게 당 하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현입 니다.
이것은 팔레스틴 지방에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거기는 비가 별로 오 지 않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 리고 야곱이 우물을 찾기 위해서 얼 마나 애쓰고, 우물 때문에 얼마나 많이 싸웠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물 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생 존을 위한 투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하 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갈 증을 암시하는 강한 표현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단지 물질적인 의미 에서 '물'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절박한 육 체적인 갈망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켰 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필요를 깨우 쳐 주신 것입니다.
목마른 것은 인간의 진실한 열 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동서고금 을 막론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추 구합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윤곽 안에서 충족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 의 의미가 무엇이며, 왜 인간은 이 런 미궁에 빠져 있는가 하는 질문입 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요약 해서 인간이 타락하고 하나님께 대 하여 반항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 다.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독을 채울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은 누구 든지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생 수다. 나는 문제의 해결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절 박한 상황에서 소망을 야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인 간의 내면적 갈증, 영혼의 목마름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광야와 같 습니다. 광야는 물이 없이 메마른 곳입니다. 나무도 거의 없습니다. 풀도 거의 자라지 않습니다. 그저 있 다면 바위와 돌들이 있을 뿐이고 풀 도 아주 조잡한 풀만이 자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그렇습 니다.
광야에는 꽃이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이 세상에는 기쁨이 별로 없 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다 보니 가시 가 많기 때문에 손과 발이 닿으면 피를 내고 아프게 합니다. 물이 없 는 광야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히 그 런 거친 나무가 되고 또 그런 나무 라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 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 면 우리 육신에 상처를 주고, 심령 에 상처를 주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이 자리에도 상한 심령을 부둥 켜안고, 지치고 시달리는 형편에서 나오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믿습니 다. 더구나 메마른 광야 길을 걸어 가고 있는 인생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모릅니다. 갑자기 불어닥치 는 폭풍 때문에 모래흙이 날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있던 길 이 덮여 버려 길을 찾기도 어려워집 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 니라,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길을 잃어버리고 사는 모든 인간의 모습 을 상징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 생활만 그 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심 령을 살펴보아도 갈 길을 잃어버리 고 헤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혼의 목표를 찾지 못한 심령은 아직도 광야에서 헤매이는 가련한 심령과도 같습니다. 그러므 로 사람이 볼 때는 아무리 안정되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실상은 마음 에 평화가 없이, 초조와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방황하다 보니까 자연히 그 심령이 피곤해 집니다. 육신도 지칩니다. 목 이 마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인지라 이 사회 도처에는 분쟁 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불행한 사회 입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청춘은 가고, 기력은 쇠해지고, 환멸과 탄식 속에서 계속할 수 없는 생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 사회에는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반석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 반석을 칠 때 그것이 갈라지면서 생 수가 솟아 나왔습니다. 이 반석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 리스도는 이 쓸쓸하고 메마르기가 광야 같은 세상에 생수가 흐르게 하 셨습니다. 주님의 은혜, 진리, 생명 은 우리 심령에 말하자면 생수와 같 습니다. 생수는 고여 있는 물이 아 닙니다. 고인 물은 썩고 냄새가 납 니다. 그러나 생수는 새롭고 맑고 시원해서 마시면 상쾌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치고 목마른 사람 들이 웅덩이에 고인 물 같은 이 세 상의 물질이나 권력이나 향락으로 심령 깊은 곳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실망하 고 맙니다.
괴테나 나폴레옹이나 진시황 같 은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얻고 싶고, 누리고 싶어하 는 것을 다 얻고 다 누린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목마 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 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 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 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 람들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위 해서 얼마나 수고합니까 영혼의 목 마름을 해갈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 고, 만족을 얻지 못하고, 종래 하나 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 로 영접하므로 영혼의 해갈을 얻는 심령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에 만 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더 할 뿐입니다. 우리 영혼의 해갈은 세상 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심령의 목이 마른 분은 예수님께 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 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무슨 변명이 필요없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주님 나는 목이 마릅니다. 지금 제가 주님께 왔습니 다. 제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두 손 들고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내어쫓지 아니하시고 영접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은 이 시간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고통의 짐 진분 계십니까 슬픔 의 짐 진분 계십니까 실패의 짐 진 분 계십니까 고민의 짐을 지고 계 십니까 고독의 짐을 지고 외로워하 시는 분 계십니까 염려와 근심의 짐 지고 애타하시는 분 계십니까 주님께로 오세요. 지금 곧 나오세요.
주님께 나아오면 어떤 축복을 주십니까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참된 만족과 참된 평안과 참된 사죄 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님이 여리고에 가셨을 때 두 사람에 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는 삭 개오라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바 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세상적으로 볼 때 너무 대조 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사회적 명 성과 부를 지니고 있었고. 바디매오 는 소경이요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부자와 거지 로 보신 것이 아니라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가련한 심령으로 보셨 습니다. 속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 고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아낌없 이 은혜를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 워 주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 리시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지금, 오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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