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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디 있느냐? (창 0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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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물으신 말씀이요 그리고 그 다음은 그 질문에 대한 아담의 대답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몸은 흙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흙이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복합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 인간의 대표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의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함께 하실 때에 비로소 참된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삶의 형상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공동체를 이루어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고,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요, 그리고 복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탄의 유혹을 받고 그만 범죄의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흙에서 낳으니 흙에서 난 것을 먹고, 흙 위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남자는 땀흘리며 일하여 먹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지은 죄와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범죄한 아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은 두려움에 쌓여 동산 안에 있는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범죄했으니 죽으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은총적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대해 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지금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네 영혼이, 네 인생이 어떤 형편에 있느냐’하는 것을 물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스스로 자기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대단히 깊은 뜻을 가진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는 줄을 네 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으면 하나님이 찾으실 때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숨바꼭질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숨바꼭질 할 때 ‘어디 있니’하면 ‘나 여기 있다’하고 대답하는 것 보셨습니까 숨어 있으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니, 아담이 ‘내가 여기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아담의 대답이 너무 복잡합니다. 원래 진실이 담긴 말은 단순한 법입니다. 설명이 길고 복잡한 말은 거짓말입니다. 무언가 잘 못되어 있기 때문에 변명이 많고 말이 복잡한 것입니다. 사실을 말할 때에는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결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한 분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사무엘에 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삼상3: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진실하고 겸손한 태도입니까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있사오니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고 순종하겠나이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이 없습니다.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실 때에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아담도 하와도 ‘내가 먹었나이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담이 이렇게 비굴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까
그 중요한 원인은 바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가장 처참하게 만듭니다.
첫째로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게 됩니다.
잠5:7-9절에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말하고 말 못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오,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다른 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면 짐승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짐승보다 더 추악한 동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렘17: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존귀와 영광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센 사자나 짐승들도 아담과 하와를 두려워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영광과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짐승들까지도 사람을 무시하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짐승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담은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모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을 이미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결과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조건 원인을 부인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한 인간의 가련한 모습니다.
(예).영국에 와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옷가게에 들어가서 주인 부부를 살해하고 많은 돈을 빼앗아 가지고 미국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도 낳고 돈도 벌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는 고향 생각이 간절해져서, 꿈에도 그리던 런던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런던의 이곳 저곳을 돌라 다니면서 실컷 구경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백화점 안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소매치기가 진열대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곧바로 순경이 뒤쫓아가면서 ‘저놈 잡아라!’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들 어떻게 되나 하고 그 쪽을 바라보는데, 유독 와인 혼자만이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합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순경이 그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문책한 결과 20년전에 지은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범죄하면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는 언제나 소리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도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잠을 갈찌라고 발을 쭉 뻗고 편안하게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존 엘 비커스토크는 훌륭한 학자요 뛰어 난 정치가입니다. 비커스토크는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책상을 살펴보았습니다. 책상 서랍에는 아무것도 없고, 다만 책상 위에 커다란 글씨로 쓰여 있는 기도문만이 있었습니다. ‘오! 주님!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내게 주시옵소서’ 그것은 그가 평생 외던 기도문인 동시에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 할 줄 모르기에 쓸데없는 일, 시시한 일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은 짐승보다 추악해지며,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공포로 떨고 사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질구질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가장 구질구질한 인생은 변명하는 사람입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돌리는 자 입니다. 정말 멋있는 사람은 책임을 질줄 압니다.
아담은 덮어놓고 변명하려고 듭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이 모습니다.
잘못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고 하나님께서 물어 보실 때에 제 아내가 주어서 먹었노라고 대답합니다. 여자에게로 책임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무로 내가 먹었나이다’--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라고 감히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와 때문이라는 말은 또 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와의 아름다움과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여자가 못생겼다든지 막돼먹은 행동을 한다든지 하면, 아무리 선악과를 먹으라고 해도 ‘너나 먹고 죽으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하와를 주셔서 그 호의를 뿌리치지 못했다는 식입니다. 사실 아담은 하와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랑이 원망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책임을 전가하며, 변명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할 때에는 모든 것이 좋다고 하고, 자기가 불리할 때에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담은 나 아닌 다른데도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내때문이요,가정때문이요,행복때문이요,그리고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도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예의 근성입니다. 노예성을 말하는 것이요, 종속적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변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영원히 자유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보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때문이요,정치때문이요,환경때문이요,부모때문이요,.....그저 책임을 미룹니다. 자기만이 피해자라고 합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가해자라’고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삶이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에도 마주 앉아서 이야기 할 때에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는 소리는 아예 해서는 안됩니다.
‘미안하오, 나 때문에 모두에게 불행을 주었소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이오’라고 할 때에 그 순간 마음속에 엄청난 자유와 평안히 깃들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에’라고 변명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 왕이 하나님의 큰사랑과 복을 받게 된 것은 그는 언제든지 변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회개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은혜 없고, 회개 없이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생 동안 라헬 때문이라고 변명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넷째로 숨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동산 숲 속에 숨었습니다. 숨었다고 숨겨지는 것입니까 영적으로나 육신 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숨겨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양심을 속일 수 없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몸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마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살펴보십니다. 그 앞에 드러나지 없을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의 잘못을 숨기려 하는 위선과 거짓은 오히려 인간을 어리석게 하며,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습 이대로’ 솔직하게, 진실하게 주님 앞에 엎드릴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오히려 사랑과 긍휼로 감싸주시는 것입니다.
(예).어떤 젊은 의사가 갑자기 체중이 줄면서 몸이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동료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1개월 정도밖에는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는 위암을 전공한 의사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지난 10년 동안에 단 한번도 암에 대한 진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암에 걸린지 벌써 3년이나 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6개월 전에만 알았더라도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진단에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항상 자기는 예외 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환자를 보면서 나도 환자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 나도 죽을 것이요, 다른 사람이 죄지은 것을 보면서 나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자신을 본다고 진정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종일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하더라도 나를 알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보면서 그 속에 자신을 투시시켜 보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 나타난 아담을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나를 알고, 역사를 보고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보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을 보고 우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변명도 소용없습니다. 다 헛된 일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저 사람의 죄도 내 책임입니다’라고 말했더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랬더라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도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모두가 내 책임입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 때문에 모두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인하는 순간 두려움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불안이 살집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평안히 그 마음속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지금 묻고 계십니다.
위선과 거짓을 활짝 벗어버리고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바로 응답할 때, 하나님의 더욱 부드럽고 더욱 은혜롭고, 인자하신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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