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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서야 할 자리 (잠 04: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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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복잡한 환경 가운데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혹은 모르면서 잘못된 일에 개입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주변에 좋은 친구의 충고도 있고 신실한 사람들의 삶의 모범도 있고 교회를 통한 신앙 교육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일이 잘못되어질 경우 환경을 탓하는데,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고 인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설자리를 바로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밤늦게까지 긴 시간 설교를 할 때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걸터앉아 설교를 듣다가 졸아 그만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사도 바울이 뛰쳐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를 붙들고 기도해서 살려 놓았습니다.
왜 유두고가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앉을 자리에 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쯤 창가에 걸터앉아 자리가 잘못된 까닭에 설교를 듣다가 희생을 당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즘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는 내가 어느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잠4:23,27)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마음을 강하게 정립하고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좌우에 치우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설자리가 어디인가 내가 어느 자리에 서야만 될 것인가' 를 지혜롭게 판단하고, 그 삶의 바탕을 바로 정하는 사람이 남에게 빛을 발하고 어느 시대든지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의해서 오늘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1. 공의의 바탕 위에서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의로운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까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고 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사회와 국가에 대해 공의와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자기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못하는 불성실하고 가증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정의를 부르짖고 아무리 공의를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자기 개인의 생활이 신실치 못하고 올바르지 못하면 그 말에 권위가 없는 법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기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공의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사람이 대의 명분이 서지 않는 그릇된 일을 범한 까닭에 정권이 바뀌거나 시대가 바뀔 때에 희생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른 자리에 서지 못한 까닭입니다.
이번 트리니티 성서 연구 시간에는 다니엘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포로로 끌려간 유대 소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유대 소년들을 데려다 3년 동안 교육을 시켜서 술사, 술객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궁중에서 먹는 훌륭한 음식을 내주면서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신실한 다니엘은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채소와 물을 주십시오. 열흘 동안 그것만 먹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었는데, 그 후에 바벨론 소년들과 비교해보니까 채소와 물만 먹은 다니엘과 그의 치구들이 더 윤기가 돌고 광채가 났습니다.
나중에 다니엘은 지혜와 명철을 발휘해서 왕의 꿈을 해석하는 등 왕을 돕게 되어 그의 인기가 상승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은 바벨론 왕의 신임을 얻어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벨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니엘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모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얼마나 충성된지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기 때문에 모함할 길이 없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메대와 바사의 법에 의하면 바벨론 왕 다리오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절하지 못하게 되어있었으며,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런데 그 때 다니엘은 하루 세번씩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벧론 사람들은 다리오왕에게 가서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합니다. 당신의 어명을 어겼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 하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에 집어넣었습니다. 모두들 다니엘이 사자들에 의해 먹혔는 줄 알았는데,아침에 왕이 가서 보니까 다니엘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자들이 입을 다문채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사자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신실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해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은 4대 임금을 섬겼고, 85살까지 장수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기 쉽습니다. 또 이렇게, 저렇게 치우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오직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바른 관계를 맺고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언제나 바르게 산다는 말입니다.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은 왜 강단을 통해 정부에 대해 공격을 하거나 위정자를 향해 질책의 화살을 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좌우에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에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전에는 프로야구 선수였습니다. 24살 때에 회심의 체험을 하고 변화되어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34살에 뉴욕에서 큰 집회를 열게 되었는데, 그때 백만 명의 미국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신앙의 선배가 권고하기를 빌리 군, 절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의 비결을 알려 주겠소. 매일 15분 동안 성서를 읽고, 15분 동안 기도를 하고, 15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빌리 선데이는 일생 동안 그의 충고를 충실히 지켰기 때문에 미국 교계에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설자리에서야 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바른 자리에 서게 될 때에, 충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들어 쓰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바탕 위에서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 일서 4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공의를 넘어서는 법입니다. 사랑은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신실한 교인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병중에서 하나님,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계시해서 보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한편 그의 아내는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보았습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눈치로 알아서 남편을 편하게 해줍니다. 그는 처음으로 아내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교인들이 찾아오고 구역 식구 찾아오고 선교회 친구들이 찾아오는데, 그 사랑이 마나 뜨거운지 '과거에 내가 이런 사랑의 빛을 몰랐구나.' 하고 감격해 했습니다. 그 사람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마술적으로 병을 고쳐 주실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아내의 뜨거운 사랑, 친구들의 우정어린 사랑, 교인들의 기도와 사랑을 체험하면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여기 계시는구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병중에 깨닫고 치유 받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이 사랑을 체험할 때 하나님이 지금 임재하고 계신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표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권고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사랑의 힘, 사랑의 지혜입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 때에 그 사랑이 내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느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그 안에 붙어 있는 거울에는 '삶은 거울과 같습니다. 이 앞에서 웃으면 그 웃음은 당신에게로 돌아오고 노한 표정을 지으면 노한 표정으로 돌아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을 베풀 때에는 그 사랑이 내게 돌아오고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이 풍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지성 청년이 교회에 와서는 목사님 설교만 듣고 예배만 드리면 되지 선교회고 속회고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님의 설교만 듣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설교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도 합니다.
종종 저는 미국인 목사님이 설교한 카세트 테이프를 듣습니다. 얼마 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목회 하시는 척 스미스(Churk Smith)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젊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입니다. 그런데 척 스미스 목사님이 해외에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이렇게 묻곤 합니다.
오늘 누가 설교를 하십니까
척 스미스 목사님은 해외에 나가시고 안 계십니다. 오늘은 다른 분이 설교하십니다. 그럼 난 돌아가야겠군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집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척 스미스 목사님은 예배는 설교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1주일을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라고 강조한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설교를 듣고 설교가 좋다 나쁘다 평가하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 중심의 신앙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세 가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 아주 지성적이고 똑똑한 청년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만을 믿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에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한 분밖에 없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것이었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아내가 속해 있는 선교회 회원들이 찾아오고 또 주변의 교인들이 찾아와서 격려를 하고 위로를 할 때 뜻밖의 사람들이 모여 와서 사랑을 베풀고 밤을 새워 주는 것을 보고 '내가 언제 이런 사랑을 베풀었나. 내가 언제 남의 가정을 찾아가 봤던가. 내가 교회를 착각하고 있었구나.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이런 사랑이 내게 베풀어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고는 그 다음부터 교회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있든지 앞장서서 사랑의 부채를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더욱 헌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사랑의 바탕을 바로 두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 인격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3. 적극적인 믿음의 자리에서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간곡히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4절에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 네가 믿는 하나님을 끝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우상을 믿는 만치 저속한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고상한 종교를 믿으면 인격이 고상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믿는 만치 그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집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산대로 하여금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믿음의 바탕 위에 있을 때에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믿지 못할 때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이 '남북 대화'를 많이 운운하고 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이북에서, 공산 치하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전에 남북 대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리 해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고, 그들의 인격을 믿을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대인 관계에서 있어서 서로 믿고 신뢰하는 관계가 될 때에 문제가 해결되고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이란 시대적인 장벽을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란 공간과 시간과 개념을 초월해서 현대에 살지만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을 가지고 여기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11:1)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말씀의 바탕 위에서야 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곳에 귀를 기울이라(잠4:20)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이 진리의 말씀을 내 생활 속에 응용하고 실행하며, 또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800년 전 이스라엘 요시아라는 왕이 있었는데, 종교가 부패되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수리하다가 잃어버렸던 신명기 성경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요시아왕은 그 성경을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 읽게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백성들의 생각과 정신과 신앙이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워졌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진리로 돌아왔을 때 신앙 개혁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충북에 어느 큰 강가에서 대학생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오늘날 기성 세대가 대학생들에 대해서 오해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모인 대학생 7천명은 천막을 치고 한데 모여 성경 말씀을 듣고 기도했습니다. 시간만 나면 조용하게 앉아서 명상을 했습니다. 충청도에서 온 대학생과 강원도에서 온 대학생이 서로 부둥켜안고 이 나라를 염려하고 조국의 복음 화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를 했습니다. 7천명의 대학생들이 왔다갔다하는데 담배꽁초 하나 떨어진 것 없이 깨끗합니다. 나중에 그 집회에 초청된 강사가 대한민국은 선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중국에 선교사로 갈 사람이 누구냐고, 일본에 선교사로 갈 사람이 누구냐고 할 때에 수백 명의 대학생이 일어나서 저마다 중국에 말씀을 갖고 선교사로 가겠다고, 일본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새로운 결단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공의의 바른 자리에서야 합니다. 사랑의 반석 위에서야 합니다. 적극적인 신아의 바탕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앙 위에서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무너지지 않는 신앙의인격을 갖추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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