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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들의 대(大)구원 (벧전 0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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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실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풍성한 삶에 대해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물질적인 풍족을 연상합니다. 신자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 불신자들은 언뜻 생각하기를 ‘구원받기 위해서 비용이 얼마가 들어야 할까’라고 계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말하면 비그리스도인들은 다분히 할리우드 스타일의 화려한 분위기를 상상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받는 구원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본 단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진술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복음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메시지에 응답하여 죄에서 떠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主)로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들이 거듭났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베드로는 18-21절에서 복음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베드로의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가 복음의 메시지로 서술한 말씀의 골자는 영생의 유일한 소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생긴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無)에서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는 만인의 심판자이시며 특히 구원받는 자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종종 아버지라고 지칭되었습니다(시89:26; 렘3:19; 말1:6).
(시89: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렘3:19)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것이니라 하였노라
(말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 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 진리는 신약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라고 하셨고, 바울은 로마서 8:15절과 같라디아서 4:5-6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셨다고 말하고 그 성령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우리 속에서 외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아는 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압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써 구속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1:21)
1660년대 중반에 로버트 레이톤(Robert Leighton)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통로이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없이 우리들을 보면 우리는 반역자이며 정죄를 당하기에 합당한 자로 비친다. 또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벌하는 것이 공정하고 능력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중간에 개입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분 안에서 의롭게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우리에게 은혜의 미소를 짓는 분으로 보게 된다. 그리스도를 빼어보라 모든 것이 황폐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간에 넣어보라 모든 것이 화평으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공평무사하게 대하십니다. 우리들은 어떤 큰 재앙을 당하면 “왜 이 일이 내게 일어났단 말인가” 라고 의문시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하기 쉽습니다.
베드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7)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로 항상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는 심판관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을 죄의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주권적인 분이므로 우리는 거룩한 경외심과 경건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지만 자기 자녀들을 공정하고 친절하고 지혜롭게 대하십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입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1절에서 이미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언급했었습니다. 베드로는 본문(17절)에서 이 점을 더욱 뚜렷하게 강조하였는데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이 곳은 당신들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눈을 항상 하늘 본향을 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런 자세로 인생을 산다면 이 세상의 어려움 들은 그리 큰 문제가 도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더욱 드러내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참 본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숙지하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려는 삶을 희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
베드로는 이제 그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1:1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말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거나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복음을 생각할 때마다 경이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떤 분은 주일예배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들은 오늘 어떤 새로운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달라고 원하는 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이 아침에 새롭게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신자들은 복음이 온전히 강해 되는 설교를 들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경이로 가득 차는 희열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18-19절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20절에서 계시를 언급하며, 21절에서 부활을 강론합니다.
구속(救贖)
주유소마다 쿠폰제가 유행합니다. 그런데 이 제도는 이미 영국에서 여러해 전부터 적용하던 것인데 고객들에게 물건을 사면 그 금액만큼의 쿠폰을 주어 일정량이 모아지면 지정된 상품 목록에서 선물과 교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쿠폰을 물품과 바꾸는 것을 영어로 ‘구속되었다’(redeemed)고 말합니다.
노예 제도하에서는 노예를 이처럼 구속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의 소유주에게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노예가 풀려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예 대금은 본인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대신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노예 대금이 지불된다는 것은 노예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이를 가리켜 노예가 救贖(구속)되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을 되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이 세상 백성들보다 더 큰 무엇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는데 이는 자기 백성들의 구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보고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공허한 생활 방식으로부터 구속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서신을 받은 수신자들이 모두 이방인들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아마 그들은 유대인들과 비(非) 유대인들이 뒤섞인 회중이었을 듯합니다. 아무튼 베드로가 지적하는 점은 그이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기 이전에는 무익하고 공허한 생활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의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공허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풍족하게 살거나 이것 저것을 즐기면서 살지 몰라도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의 추진력으로 삼지 못하면 공허한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생의 참된 목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만족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기쁨이나 평안이나 혹은 미래의 소망이 없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잘 죽은 자들이 아닙니다.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18). 이 말씀은 구원이 돈이나 어떤 세력으로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비매품입니다.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비매성(非賣性)을 언급했음이 분명합니다.
(행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행8: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한편, 구속은 싸구려도 아닙니다. 구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자기 백성들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대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선한 일들과 이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흠이 없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양처럼 흠이 없이 제단에 바쳐졌습니다. 마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은 죄를 덮기 위해서 흠없는 양이 죽임을 당했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요1:29).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들에게 자기 희생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지불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기에 죽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히7:26)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후의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들을 위해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계시(啓示)
이 십자가의 희생은 하나님이 사후 처리의 한 아이디어로서 짜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주가 필요할 것도 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시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올 것을 아셨고 구주를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선택되셨습니다(1:20). 그러니까 하나님은 가장 귀하신 분을 택하셔서 우리들을 위해서 죽도록 하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유일한 희생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온갖 좋은 섭리들은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구원 계획들은 우리들을 위해서 이 마지막 시대에 분명히 계시되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희미하게만 알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희생 제물을 바쳤는데 이것은 장차 있게 될 한 큰 희생에 대한 예시적인 제사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 시대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계시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났고 죄인들의 구주로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복음을 통해 성령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달리 말해서 이 계시는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죄에 찌든 세상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신 일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될 때까지의 영혼과 육체가 견뎌야 했던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신자라면 주께서 당신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주로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복음 시대를 통해서 인간들을 계속해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의 시기가 끝나는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22: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어집니다. 구원받을 마지막 인간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다른 모든 이들은 자기들의 죄 속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부활
십자가의 처형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바울 시대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강설하자, 아덴에 살던 사람들은 이를 도무지 믿지 못하였습니다(행17:32).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참으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광 중에 하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말씀하시며 우리를 돕고 복주시기 위해서 탄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의 모든 소망의 근간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한 위대한 교사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맹목적으로 어떤 훌륭한 교사의 사상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의 구속주로 보내 주셨고, 성경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셨으며, 예수님을 부활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생명에 대한 기쁨과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 신자들은 현세대의 끝에 가서 다시 부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들은 미래의 축복들입니다. 그런데 현 세상에 사는 신자들에게 지워진 책임이 있습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반응
이 복음의 메시지가 당신에게 어떤 효과를 주고 있습니까 격려가 되고 도움이 되는지요 당신은 그리스도께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까 만일 이 복음의 메시지가 진리라면 목적 없이 살아갈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과 순종으로 맞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되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서 지금도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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