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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경이 (벧전 03: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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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전체적으로 자세히 읽어보면 구원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도하려 하심이라”(3:18),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3:20).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3:21).
구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씻겨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확실히 아는 것은 큰 기쁨이며 위로입니다. 우리들의 지상 생애가 끝날 때 하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다는 확신도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은 공의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억울하게 고난을 받아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의(義)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들이 나쁜 짓을 하다가 고통을 받으면 전혀 자랑할 것이 없고 오히려 수치스럽게 느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3:17). 예수님은 그릇된 일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죄없이 살았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만이 우리들의 죄를 대속할 수 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은 불의한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죽으신 사건의 경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이런 일을 행한 자가 없습니다. 목사도 총회장도 그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안내를 할 수 있고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엄숙한 종교적 의식이나 부단한 기도라도 우리를 결코 구원의 문으로 넣어주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그처럼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이 세상을 사셨던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의 속죄 희생의 죽음만이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죽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백성들의 죄를 씻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반복해서 양들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백성들이 계속 죄를 짓기 때문에 계속적인 희생 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심으로써 죄를 위해 충분한 속죄가 이루어 졌으므로 다시 희생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씻기심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9:28).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온갖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를 위해 더 이상의 희생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으니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예수님은 실제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잠시 기절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이 그분 대신 죽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이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고(행2:32, 갈1;1, 엡1:10), 혹은 예수님 자신이라고도 하는데(요10:17-18),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번역 본에 따라서 ‘영’이라고 옮긴 것도 있고 ‘성령’이라고 변역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지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 한 하나님이시므로 굳이 어떤 분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는지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크신 능력으로 부활하셨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설교
예수님은 주후 1세기 지상에 계셨던 동안에 많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하셨고, 주기도문을 가르쳤으며, 비유 형식의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큰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주 가르치신 것 가운데 하나가 회개의 필요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주 가르치신 것 가운데 하나가 회개의 필요성이었습니다.
회개는 성서적인 설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고하셨습니다. 거듭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하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이라면 중생과 회개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위험을 모릅니다.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회개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생 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 자기들의 죄를 깨우쳐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이 없이는 전혀 절망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개를 숙이는 일이, 떳떳하게 느껴지지 않고 위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짓들에 대해서는 후회를 할망정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는 싫어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인은 재를 뒤집어쓰고서 회개하는 일에 대해 자존심이 허락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는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고 죄에서 떠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의 회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도움으로 되는 일인데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 다음 성령은 그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정결케 되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시기 전에도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말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구약에 나오는 ‘주의 사자’가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의 현시(顯示)라고 믿습니다. 주의 사자는 창세기 16:7절에서 하갈에게 나타났고, 창세기 19:21, 31:11, 13절에서 다른 이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2, 4절과 사시기 2:1-5, 6:11-12, 14절에서도 주의 사자가 언급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사사기 13장 전체와 스가랴 3:1-6, 12:8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삿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슥12: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노아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가서 설교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대 사회의 백성들이 매우 사악했음을 압니다.(창6:5). 노아는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벧후2:5). 노아는 그들에게 틀림없이 그들의 악함을 상기시키며 회개를 촉구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9절에 의하면 예수님도 이 백성들에게 가서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노아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셨다는 뜻인 듯합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오래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회개치 않았습니다. 단지 8명만 구원을 받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홍수에 수장되었습니다. 불순종했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이 “옥”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붙잡혀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예수님이 ‘지옥’이라고 부르신 곳에 갇혀 영벌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받지 않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릅니다. 노아 시대의 백성들은 회개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극소수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8명의 사람들은 방주에 올라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방주 속에 있었으므로 안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방주 속에 넣으시고 밖에서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방주 속은 안전하였습니다. 홍수가 나서 아무리 범람하여도 방주는 심판의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안전을 대변하는 매우 힘있는 예증입니다.
방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노아의 가족들이 홍수 때에 방주 안에서 안전했던 것처럼 보전됩니다. 지옥 불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해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마귀의 부르짖음에 놀라서 겁을 먹을 수는 있을지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전을 상징하기 위해 세례를 예로 들었습니다. 방주 속에 있던 8명은 물 위로 떠올랐습니다. 구원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고백한 자들은 “새 생명”(롬6:4)으로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킴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세례 자체가 아니고 세례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는 우선 물 속에 수장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인데 곧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례가 주는 또 다른 측면의 상징은 물에서 올라오는 것인데 이것은 부활의 새 생명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례 자체는 우리의 죄를 씻지 못합니다. 이 일은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우리들의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선한 양심”의 표지입니다. 우리들은 하늘로 가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오순절 날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무리들은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외쳤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38).
베드로가 여기서 말한 세례는 목욕을 더러운 때를 벗기듯이 세례 의식으로 죄를 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세례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돌아가면 우리의 죄는 씻겨집니다.
베드로는 본 단원의 끝절에서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계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구원의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능력과 권위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천상의 모든 존재들을 통치하는 권위를 가지셨습니다. 하늘의 피조물들은 모두 예수님께 복종합니다. 우리들도 마땅히 주님께 순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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